믿음의 선배 - 존 낙스의 생애

믿음의 선배 - 존 낙스의 생애

복음제일교회 0 1,898 2020.12.31 17:28

존 낙스:청교도의 창시자

어느 교회사 책을 보건 존 낙스(John Knox, 1514?-72)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그는 비록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의 조국과 영국, 미국 그리고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과 국가에 미쳤다.

스코틀랜드 사람인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낙스를 청교도의 창시자라 생각했고 마틴 로이드 존스도 같은 의견을 표했다. 한때 미치광이,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개신교 일파로 알려졌던 청교도들이 지난 50년 동안의 학계의 노력으로, 요즈음은 로이드 존스와 같은 평가를 내려도 큰 거부 반응 없이 수용되고 있다.

라이큰(Ryk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청교도는 이 세상의 성자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천진 난만한 것 같으나 탄력성과 창의성 있는 지혜를 가진 성숙한 자들이었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무서워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고,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기도했던 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는 수난과 억압 속에서도 현실 개혁을 위해 투쟁했던 용사들이었다.

본장은 낙스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삶과 사상을 조명함으로써 그에게 부여한 “청교도의 창시자”란 이름의 의미를 음미하고, 아울러 낙스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낙스와 장로 교회 그리고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겠다.

I. 정치적 배경
II. 낙스 이전의 스코틀랜드 종교 상황
III. 낙스의 등장
IV. 낙스의 제네바 사역
V.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의 항쟁
VI. 낙스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Ⅶ. 낙스와 장로교회
Ⅷ. 낙스의 정부론
Ⅸ.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X. 정리

I. 정치적 배경

영국의 바로 위쪽에 자리잡은 섬나라인 스코틀랜드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입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결의 양상으로 많이 분출되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국위를 선양하려 했고, 스코틀랜드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국을 보호하려 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 영국의 침략을 차단하였다.

영국 튜더 왕조의 창시자 헨리 7세는 국경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는 스코틀랜드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에게 출가시켰다. 잠시 동안 양국간에 평화가 깃들었으나, 헨리 7세가 죽고 그의 아들 헨리 8세가 영국왕이 되어 교황이 주도하는 신성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두 나라는 또 다시 대적이 되었다.

신성 동맹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것인데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우방이 아닌가! 처남인 헨리 8세가 매형인 제임스 4세를 골탕먹인 꼴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는 격분하여 영국군과 싸우다가 플로든의 전투(the battle of Flod- den, 1513)에서 전사하였다.

임종시 제임스 4세는 아내인 마가렛을 섭정으로 지명했으나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가렛이 영국왕 헨리 8세의 누나라는 이유로 이 지명을 거부하였다. 대신 알바니 공작(Duke of Albany)이 프랑스에서 불려와 섭정에 취임되고, 왕위는 생후 17개월밖에 안 되는 제임스 5세에게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왕가는 지속적으로 프랑스와 깊은 결속을 맺는데 제임스 5세가 프랑스 왕의 딸 마들린(Madeline)을 왕비로 취하고, 그녀의 사후 프랑스의 실력자 로렌 공작의 동생인 기즈의 메리 (Mary of Guise)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이 결속을 더욱 분명히 한다.

한편 야망에 찬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장악하기 위해 4만의 군사로 전쟁을 일으키나 스코틀랜드의 견고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일단 방어에 성공하자 의기 양양해진 제임스 5세는 영국군을 기습했지만, 솔웨이 모스 전투(the battle of Solway Moss)에서 패한 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위는 태어난 지 7일밖에 안 된 메리에게 돌아갔다. 헨리 8세는 아들인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갓난이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를 정략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장악하려 했다. 개신교에 동정적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결혼을 환영하였다. 1543년 7월 1일 양국간에 결혼 조약이 맺어졌다. 그러자 가톨릭 진영의 성직자들이 맹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통치를 두려워했다. 헨리 8세 역시 스코틀랜드에 무리한 요구를 강행했다. 그는 즉각 프랑스-스코틀랜드간의 동맹을 파기하고 어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영국에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고집은 스코틀랜드인의 저항과 반감만 부채질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후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에 보내져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황태자 프란시스와 결혼했다(1558년 4월).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보위를 이어 겨우 17개월 동안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가 1560년 12월에 죽었다. 이로 인해 메리 스튜어트는 1561년 8월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스코틀랜드 왕가가 친가톨릭, 친프랑스 정책을 취할 때 영국은 그 반대 입장을 취했다. 힘의 역학 구도상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반가톨릭의 힘으로 나타난 것은 대륙의 종교 개혁이었고 영국도 이 힘을 지혜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국이 반가톨릭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였다. 교황청은 이러한 헨리 8세를 “믿음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로 추켜세웠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유럽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 교회의 수장이 로마 교황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헨리 8세의 돌연한 변화는 그의 이혼 소송에 교황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왕정의 굳건한 토대를 세우려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어야 된다고 믿어 온 전제 군주였다. 자신의 아내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은 이러한 헨리 8세를 지속적으로 실망시키고 있었다. 캐서린으로부터 3명의 딸이 연이어 탄생되지만 모두 죽고 메리 튜더(Mary Tudor)만 생존해 있었다.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로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형수(원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결혼했으나 아서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다시 헨리 8세와 결혼했다)를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결론 내리고, 마침 궁녀인 앤 볼린(Anne Boleyn, 1507-36)이 마음에 들자 이혼을 결정하고 교황청에 이혼 승인을 청원했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 이혼을 허락하고 싶었으나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칼 5세(영문명, 찰스 5세)의 고모인 캐서린을 이혼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혼을 허락하면 당장 교황청은 황제의 군대에게 유린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을 못 받자 대노하여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교회를 가톨릭에서 독립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900년 이상 영국에 가해 온 교황청의 힘은 제거되고 영국 종교 개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재위 1547-53) 때에는 개신교가 영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1549년에는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53년에는 42개조항이 반포되었다. 이 기도문과 42개조항의 많은 부분에 칼빈주의 개혁파 사상이 삽입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죽자 뒤이어 메리 튜더(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어머니 캐서린이 이혼당한 것에 한을 품고 있었다. 이혼을 허락한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켄터베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를 미워하였다.

메리 튜더의 등극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런 차원에서 스페인 왕 필립 2세(스페인명, 펠리페 2세)와 결혼도 하였다. 그녀의 통치 기간에 300여 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했다.

메리 튜더가 죽자 왕위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1세)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종교를 다시 개신교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메리 튜더가 사망할 때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엘리자베스 외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도 있었다는 점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인 마가렛의 손녀가 아닌가! 그런데 메리 스튜어트의 종교가 가톨릭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권 신장을 위해서라도 스코틀랜드 왕정의 종교와 반대되는 개신교를 택함이 유리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인 헨리 8세도 그의 통치말기에 개신교에 기울어졌고, 에드워드 6세도 개신교도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앤 볼린도 개신교도였으므로 엘리자베스가 개신교에 접근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영국내의 종교 전쟁을 원치 않았으므로 개신교도나 가톨릭 교도들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도록 처신하는 방법, 곧 헨리 8세가 실시했던 “교회 형식은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를 채택했다. 이 방법은 개혁주의 청교도들이나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II. 낙스 이전의 스코틀랜드 종교 상황

스코틀랜드 교회는 아일랜드의 켈트 선교(Celtic Missions)에 힘입어 수립된 것으로 보이며, 7세기에는 수도원들이 스코틀랜드의 영적, 지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교구가 영국 요크(York)로부터 독립되었고(1176), 15세기에는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 교구가 메트로폴리탄 교구로 인정받았다(1472).

수도사와 수녀들이 기거하는 종교 건물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산재하였고, 선교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켈트 수도원들은 대륙의 양식에 의해 밀려 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소수의 인물들을 빼고는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의 종교 상황을 리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그들이 국왕이나 귀족들의 자손들이었거나 혹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성직자들의 높은 도덕적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성직자들의 최고위층에서도 고상한 미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튼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가졌다]······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교 개혁 당시 12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로 보이는 많은 수도원장들에게 또한 자기들의 사생아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하위 성직자들이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평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성직자들의 이러한 세속성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민중들, 특히 교육받은 이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교회는 활기에 찬 시민 계급들이나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지주 계급들에게 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무식했고, 교회 공동체의 운영은 개탄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에 동감을 표시한 영국 사제 레스비(James Resby)는 성경적 신앙을 주장하다가 1407년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화형당했다. 선교사로 파송된 후스파 크라바르(Paul Crawar)는 1433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고난을 당했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 재판관을 채용했고, 아마 상당수의 롤라드파 사람(Lollard)들이 이 무서운 종교 재판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1525년 루터파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다.

이러한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혁 사상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1520년 스코틀랜드의 롤라드파인 니스벳(Murdock Nisbet)은 위클리프 신약성경을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고쳐 썼고(이 성경은 1901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틴데일 영어 신약성경이 1526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가 하나의 운동으로 부각되었다.

이 운동에 좀더 분명한 금을 그어준 사람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28)이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하여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한 후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해밀턴은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주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파 신앙에 몰입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도 작성했는데, 이것은 후일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 개혁의 열정에 충일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오라는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네 살이었다.

해밀턴의 순교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가톨릭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들과 광부들까지도 종교 개혁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가톨릭의 지도층은 계속 탄압과 박해를 하였다.

1539년 제임스 비튼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자는 그의 조카인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이었다. 그는 교황청과 프랑스와 더욱 깊이 결속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악한 행적은 “선하고 경건한 민요들”(Good and Godly Ballads) 속에서도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추기경이 되자 비튼은 한층 더 이단 박멸에 열심을 내었다. 1540년 비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제어할 법률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사적 종교 비밀 집회를 금하였다. 그러나 비밀 집회를 가진 개신교 모임(소위 사적 교회, Privy Kirks)은 지하 운동으로 존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에 비튼의 표적이 된 자는 조지 위샤트(George Wi- shart)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 아카데미(the Academy of 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위샤트는 1532년 루벵(Louvain)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영국과 스위스에 가서 대륙의 종교 개혁의 흐름을 맛보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스위스 최초의 신앙 고백을 영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츠빙글리파에 속했다. 그가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코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강의할 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위샤트]는 키가 크고, 검은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금욕적이고 독실하며, 박식하고 자애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몬트로즈, 던디, 아이셔 지역에서 병자 간호 및 설교 사역을 하면서 종교 개혁의 당위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가 하딩턴 지역에 가까운 이스트 로티안(East Lothian)을 지날 때 그곳의 지배자 보스웰(Bothwell) 백작은 위샤트를 체포하여 비튼 추기경에게 넘겨 주었다. 1546년 3월 1일 위샤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해밀턴의 길을 따랐다. 순교의 역사에 동참한 것이다.

위샤트가 체포당하기 직전 양날이 선 검을 들고 위샤트를 호위하던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는 본장의 주인공인 존 낙스이다. 위샤트는 “종교 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른 날을 기다리라,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며 낙스를 떠나 보냈다.

위샤트가 죽자 시민들 가운데서 추기경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특히 귀족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다. 귀족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국왕과 결탁하여 귀족들의 국정 참여 권한을 축소시키고 재산(토지 등)을 몰수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았을 때 분노하였다.

1546년 5월 29일 무장한 귀족 몇 명이 잠들어 있는 추기경을 깨워 칼을 들이댔다. 그 중 개신교도로 알려진 한 사람이 추기경에게 위샤트 살해를 추궁하면서 “우리는 복수하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추기경을 두 번 찔렀다. 다음날 그들은 추기경의 시체를 창문 밖에 걸었다.

이 사건은 사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공포, 분노, 증오가 뒤섞인 복합적 이해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곧 귀족들과 시민들은 수비대를 만들어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함락시키고 가톨릭과 왕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낙스는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수비대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III. 낙스의 등장

존 낙스는 1514년경 하딩턴(Haddington), 아니면 그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존 메이저(John Major)의 영향을 받았다. 메이저는 스코틀랜드의 장래를 위해 프랑스와 가깝게 지내기보다는 영국과의 평화 관계 유지가 필요하며, 왕정의 독재자가 시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급진 사상을 가진 자였다.

낙스는 대학에서 이러한 급진 사상뿐 아니라 교회법도 공부하였다. 그는 신부로 활동하다가, 때로는 공증인(apostolic notary)으로, 위샤트를 만나기 직전에는 귀족 자제들의 개인 교사로 활동하였다. 낙스는 1540년쯤 회심했으며, 위샤트를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은 틀림없이 개신교적이었으나 개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분히 루터적이고 반교황적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낙스가 위샤트 순교 후 세인트앤드루스의 수비대에서 설교할 때 그의 나이는 30세 정도였다(1548). 낙스는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교수들과 일반 대중 앞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스승 존 메이저도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낙스는 다니엘 7:24, 25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라 해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청의 교리 이탈과 역대 교황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이 첫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낙스의 소명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낙스는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하였다. 둘째, 그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셋째, 예배의 근간은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심장을 쪼개는 “파괴력”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
낙스의 열정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모인 훈련되지 않은 시민들과 조직 없는 수비대는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 내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섭정, 기즈의 메리(제임스 5세의 미망인)를 통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제독 레옹 스트로찌(Leon Strozzi)의 지휘 아래 도착한 20여 척의 갤리선 대포가 성을 포격하였고, 낙스를 포함한 전수비 대원들이 포로가 되었다.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 “노트르담”(Notre Dame) 호에서 노젓는 노예로 일했다. 노트르담이 소속한 함대는 여름엔 루앙(Rouen)에 주둔하여 영국 해적들의 침략 행위를 방어하였고, 겨울에는 본거지인 낭트(Nantes)에 주둔하였다.

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보통 갤리선의 길이는 일백 오십 피트에 달하였으며, 길이가 오십 피트 가량 되는 돛대를 달고 있었다.

선미에는 선장용 객실 하나와 창고가 있었고 노예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한가운데는 우뚝 솟은 복도가 자리잡고 있어서, 감독이 이 위로 왕래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을 말로, 또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한편에 대개 스물 다섯 개의 노가 있었고, 한 노에는 여섯 명의 노예들이 배당되었다. 보통 삼백 명 정도의 노예가 한 배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쇠사슬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항해 중에 이들은,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영국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이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54), 베릭(Berwick)과 뉴캐슬(New castle)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눔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노예 생활로 인해 생긴 위궤양과 신장염도 목회 기간 동안 치료되어 갔다. 성경 연구와 좋은 주석을 읽는 데도 열심을 내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노햄 성(Norham Castle) 장군의 딸인 마조리 보우즈 (Marjory Bowes)도 이때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낙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를 여섯 명의 궁정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명하여 설교를 시켰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낙스를 “청교도의 창시자”로 평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청교도주의의 기원은 정신과 원리면에서 윌리엄 틴데일이지만, 그 원리를 보다 분명히 한 자는 낙스라고 한다. 낙스는 “기성인”이 아닌 “독립적인 사람, 독자적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었고, 이 독립성은 “스스로 성경을 읽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가졌기에 그는 청교도의 창시자이다.

이 외에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고, 그 주도 원리에 기초해서 철저한 개혁을 믿었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다. 청교도로서 낙스에게는 개혁이 단순한 수정이 아니고 새로운 형성이었으며, 이 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낙스는 영국에서 목회하는 동안 1548년판 에드워드 6세의 공기도서(Order of Common Prayer)나 1549년에 발행된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사용을 거부했다.

그 대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 순서를 사용하였다. 낙스는 제목 설교나 본문 강해 설교를 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도 본문 요절의 교리적 의미를 반드시 시대 상황에 적용시키도록 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낙스는 성례를 집행할 때도 영국의 공식 규정에 매달리지 않았다. 낙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스스로 성찬 예배 양식을 개발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요한복음 13:16에 기초한 설교를 하고, 그 후에는 믿음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1:17-31에 있는 성만찬에 관한 바울의 설명을 낭독하였다. 그 후에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에게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신자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다음에는 고백의 기도와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약속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다시 회중 전체를 위해 기도를 올린 후, 식탁에 앉은 교인들에게 보통 빵과 포도주로 된 예품들을 분배하였다.]

낙스는 성찬식을 집행할 때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정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지지하였다. 베릭에서 남긴 그의 글은 이 문제를 보다 확실히 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이 입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주셨으니, 이는 본질의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마치 구약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성찬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낙스는 성찬에 관하여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성찬을 받는 방법의 변화였다. 당시 국교도들은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을 관례화했다.

낙스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 때 앉아 계셨으므로 성도들도 당연히 앉아서 성찬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실행하려 했다. 후대의 영미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의미에서 성찬시 무릎을 꿇지 않고 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받았다.

1552년 11월 “제2 공기도서”가 반포될 때, 낙스가 외친, 성찬을 무릎 꿇고 받는 데서 오는 위험 특히 우상 숭배의 가능성을 막기 위한 조항이 다른 종이 한 장에 인쇄되어 이미 출판된 기도서에 풀로 붙여졌다.

낙스가 왕 에드워드 6세에게 직접 설교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 개신교적 설명은 “검은 예배 규정” (the Black Rubric)으로 호칭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성찬에 관해서는 낙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낙스는 출교 처분을 받았던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다른 국교회 사역자들은 그런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낙스는 교회의 권징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교황제의 잔재인 국교회의 감독직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가 “검은 예배 규정”으로 유명해지자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인 노섬벌랜드 공작 측에서 낙스에게 로체스터(Rochester)의 감독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낙스는 정중히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낙스는 정치가와 야합하여 감독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그 위에 성경이 감독 정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메리 튜더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300여 명이 순교하고, 800여 명이 대륙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낙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낙스는 1554년 1월 프랑스 디에프(Dieppe)로 망명 후 3월 초에는 제네바의 칼빈을 찾았다. 낙스는 칼빈을 만나자 그동안 의문을 가졌던 것들에 대해 여러 가지 신학적 질문을 던졌다.

[미성년자로서 부왕의 왕위를 계승한 이도 합법적 군주로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것인가? 여인이 일국을 통치하는 경우, 이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할 수 있는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집권자에게도 마땅히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이 경우, 지방의 수령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도시, 촌락을 점령하는 것은 합법적일 수 있는가?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을 그리스도인들은 후원해도 좋은가?]

칼빈은 낙스를 반가이 맞이하고 위의 질문들을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인 로잔의 비레와 취리히의 불링거에게도 할 수 있도록 낙스에게 기회를 주었다. 불링거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신민들의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합법적 통치자라는 데 동의 [하고, 이 말은] 곧 스코틀랜드의 메리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원칙적으로 여자가 통치한다는 데에는 반대하나, 일단 합법적으로 즉위하였을 경우 그 국가의 법이 허락한다면 남편에게 통치권을 넘겨 줄 수 [있다].

상 숭배적 통치자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사례별로 이들을 검토해야 [하며]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에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들의 문제 역시 상황과 양심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이러한 상황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위선자들은 제거해야 하며, 항상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는 겸허한 정신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칼빈은 불링거의 견해에 전반적으로 찬성하였다. 그러나 여성들의 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타난 여선지 드보라를 예로 들면서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무력 항쟁으로 통치자를 제거하려는 낙스의 생각에 반대하였다.

낙스는 이와 같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의 답변에 상당히 실망하였다. 이후, 낙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영국인 피난민 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였으나, 곧 영국 성공회식 교회 관리를 주장하는 리처드 콕스와 대립하여 결국 칼빈이 사역하고 있는 제네바로 이동하였다.

IV. 낙스의 제네바 사역

낙스가 칼빈주의를 알게 된 것은 프랑스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로 추측된다. 낙스는 프랑스 해군의 갤리선 노트르담 호에 강제로 승선되어 중노동을 했지만, 이 배가 루앙과 낭트에 정박할 때는 육상 근무를 할 수 있었다.

1548년에는 이 지역에도 칼빈주의가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낙스가 프랑스 개혁주의자들을 만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신빙성 있는 증거는, 낙스가 칼빈이 쓴 예레미야 주석을 이미 1549년에 알고 있었고, 1550년에 간행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학계는 낙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제네바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가 신빙성 있다고 볼 때, 영국 체류 때 낙스의 신앙은 상당 부분이 칼빈주의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리처드 콕스와의 대결 양상도 낙스의 개혁주의 신앙과 콕스의 성공회 신학의 마찰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콕스와 헤어진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때 낙스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The Form of Prayer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예배 순서는 “죄 고백과 시편 낭송, 주의 강림을 간원하는 기도, 설교 및 그 후의 질의 응답, 목회자의 기도, 축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가장으로서, 목회자로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진술한다.

[······전에는 전혀 당해 보지 못했기에 더욱 두려운 날마다의 가정사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순진한 양떼들을 다스려야 하는 일 등으로 정신없이 쫓기다 보면, 나는 소중한 친구들뿐 아니라, 나 자신을 망각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

칼빈과 낙스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밀접하게 나누었다. 칼빈은 낙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사 계급인 지도층 위그노들과 그들을 따르는 상인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폴란드,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 칼빈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낙스는 직접 간접으로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사상 체계와 신학의 폭을 넓혔다. 낙스는 그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제네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이곳이야말로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들에서도 그리스도는 진실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종교가 이처럼 신실하게 개혁되어 가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낙스는 4년 동안(1555-59)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다.

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에 들아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1558년 낙스는 칼빈과 의논하지 않고, 여인의 괴수 정부에 대한 첫번째 나팔 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이 책자는 개신교를 박해하는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의 메리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여인의 국정 관여와 통치 행위의 부당성을 탄핵한 것이었다. 낙스는 말한다.

[자연의 빛,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질서, 여인들을 향한 저주와 악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의 해석자인 성 바울의 말,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아 온 저자들의 지혜에 의해 조명된 규칙과 법령에 의하면, (여인들의 지배는) 자연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역행하는 것임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여인이 국가와 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남성을 지배하거나 국가, 영지, 지방, 도시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그러므로 모든 남자들은 이제 나팔 소리가 한 번 울렸다는 사실을 명심할지어다.]

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 칼빈도 낙스의 언어와 행동의 격렬함에 놀랐다. 낙스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여선지 드보라와 같다고 일컫고 그의 언어를 순화시켜 여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다. 1559년 5월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 길만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V.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의 항쟁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낙스는 제네바에 있을 때 일시 스코틀랜드에 들려 여러 귀족들을 동역자들로 세웠다(1555). 모레의 백작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아질의 백작인 로른(Lorne) 경 그리고 레싱턴의 윌리엄 메이트랜드(William Maitland) 등이 그들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이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틀을 가진 것이다. 낙스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격을 느꼈다.

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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