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는 훈련입니다.(히브리서12:1-8)
1. 상처가 낫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릅니다. 상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낫습니다.
아픔은 아파해야지 치료가 됩니다. 아프지 않고 그냥 낫는 법은 없습니다. 손가락이 곪으면 그것을 찢고 고름을 빼내고 소독을 하면서 약을 발라야 낫습니다.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픔의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큰 아픔이 작은 아픔을 이기게 합니다. 나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주변에 더 큰 아픔이 발생하게 되면 내 아픔 정도는 아픔처럼 여겨지지 않기도 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능력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이 겹치기도 합니다. 육신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픈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을 남에게 이야기해야 고통이 해소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고통을 이야기하고 나면 그것이 후회가 되어 더 고통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혼자 겪는 고통도 어려운데 굳이 남에게까지 말을 해서 그 사람까지 힘들게 할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압니다.
“같은 아픔을 겪어보지 않았으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아픔을 감싸주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더 속이 상하지요.
3. 오늘 성경은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자기를 반대한 자들을 끝까지 참으신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사생자'라는 말은 ‘illegitimate children’으로 합법적인 자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자식인 것입니다.
이런 자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징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본보기로 예수님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을 당하시기까지 참으셨기에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도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하십니다.
이렇게 징계하시는 이유에 대하여 12-13절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징계의 이유가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고, 곧은길을 만드는 것이며, 어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아픔을 고치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4. 그런데 징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 징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①허물 따위를 뉘우치도록 주의를 주고 나무람 ②부정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제재를 가함
여기서 ‘제재를 가한다’는 말은 ‘벌을 준다’는 말입니다. 곧 징계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벌 받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벌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학교에서 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적이 있습니다. <엎드려뻗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징계가 벌이었고, 벌이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징계>라 번역이 되었는데, 영어성경에는 <Discipline>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훈련 또는 연단이라는 뜻입니다. 징계와 훈련은 엄연히 다릅니다.
헬라어 원어는 <파이데이아>로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꾸지람, 훈계’의 의미를 말합니다. 원어의 뜻은 징계가 벌이라는 의미보다는 훈련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에 그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나에게 훈련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여길 것입니다.
5.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께서 어느 날 당신이 사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혼자 사는 노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집을 들어서자 방문은 굳게 닫혔고 집안은 쓰레기더미로 가득했습니다. 그 때 테레사 수녀의 눈에 먼지가 쌓인 램프가 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 왜 이 램프를 켜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누구를 위해 램프를 켭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할아버지의 원한에 찬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럼 앞으로 제가 찾아오면 이 램프를 켜시겠습니까?”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지 말고 당신이 먼저 작은 촛불을 켜세요. 살아가면서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쁜 마음으로 풀어보세요.”
심리학에서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자기 인생을 자신이 가꿀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내 인생을 위하여 내가 먼저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생의 장애물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중에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6.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당신이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한마디로 고통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로마사람들에 의한 징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법과 로마법에 의하여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셨기에 사랑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십자가로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음이 끌린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픔이 아픔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통하여 예수님의 아픔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픔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아픔을 겪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므로 내 아픔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고, 아픔으로 아픔을 치료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7. <제펴슨 베스키>라는 기독교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Why I hate religion, but love Jesus"(종교는 싫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로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 동영상을 만들어서 유투브에 올렸습니다.
사흘 만에 조회수가 600만이 넘었고, 그 다음날에는 1,020만이 되었고, 1년 만에 2600만명이 그의 동영상을 봄으로 전 세계에 <베스키 신드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고 섹스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등학생의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욕구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간은 마음을 지키기도 하였고, 또 얼마간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 어머니는 자기 집을 찾아온 어떤 여자 분과 심하게 싸운 후에 아들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동성애자이며 자신이 엊그제 싸웠던 그 여자가 자신의 파트너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엄마에게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그토록 마음을 지켜 살려 했던 것이 한 순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 후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생의 저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마음을 지켜 살려 했던 믿음들이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훌륭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모두 겉치레로 보였습니다. 저들도 자기와 같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자기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를 붙잡아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8. 그런 가운데 그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힘든 처지를 위로하고, 자신의 인생을 좀 선하게 살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교회생활은 결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자신이 지금껏 지켜왔던 신앙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의 지난날의 신앙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책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교는 있지만 예수는 없다.
우리에게 좋은 모범 사례들은 많지만 하나님은 없다.
우리에게 신학적인 논리는 있지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은 없다.
우리에게 선한 일은 있지만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그 근원은 없다.
우리에게 사랑은 있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은 없다.>
그가 깨달은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 종교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최악의 경우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다녔던 교회생활이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지 못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9. 그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물음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발견한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고통 가운데서, 그 고통을 이해하여 주실 분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주님만이 자신의 아픔을 만져주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여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친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을 품어주실 수 있는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아픔이 아픔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33살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30살 즈음에 인생의 비련을 체험하며 아파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10. 그는 고통을 통하여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알맹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생활과 같은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건져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통은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징계는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는 연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징계는 훈련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십니다.
징계는 벌이 아닙니다. 징계는 훈련이고 연단인 것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고통을 통하여 나를 구원하여 주실 분을 찾게 합니다. 고통을 통하여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통은 결코 고통이 아니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장애물이 있을 때에 그 안에 어떤 선물이 있는지 기쁨으로 그 안을 들여야 볼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징계라는 훈련을 통하여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징계와 훈련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안일하게 살다가 느닷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11. 훈련은 이런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방 벽에는 <그래도>라는 시가 결려 있었답니다.
훈련이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시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어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이면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을 하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세상 사람들은 약자 편을 드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들을 위하여 투쟁하라.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서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도움을 주라.>
12. <그래도>처럼 살자면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훈련인 것입니다. <그래도>처럼 살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훈련인 것이지만, <그래도>가 없으면 예수님과 무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징계처럼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까? 징계라 생각하지 마시고 훈련이라고 여기십시오.
살아가시는데 장애물처럼 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힘은 드시겠지만, 잘 참고 견디어 보세요. 분명히 그 장애물과 씨름하노라면 이전에 깨닫지 못한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저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징계가 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훈련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축복합니다.
덴버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