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무적 따이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전사자의 8배에 가까운 4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당시 언론들은 10:1의 눈부신 전과라며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 ‘무적 따이한’으로 보도했다.
한국 언론
“한국군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라고 그들 군대에게 명령할 정도로, 베트콩은 한국군을 겁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무적 해병대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미군의 두 배이자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없는 전과였다. 그렇다면 당시 동맹국 미국은 한국군을 어떻게 보았을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릭 와이드먼
“한국군은 교전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격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사살하곤 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이들이라고나 할까.”
당시 미 대통령 법률 보좌관 맥퍼슨의 현지 보고서의 내용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맥퍼슨
“한국군은 정말로 무서웠다.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군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한밤중에 신분증 없이 한국군을 만나는 일이 과연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 베트콩들이 한국군을 만나면 피하라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군을 1명이라도 사살하게 되면 화가 난 한국 군인들이 인근 마을로 쳐들어가서 애꿎은 양민들에게 보복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베트콩들 스스로, 한국군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던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종군기자가 본 한국군의 모습은 이러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로버트 키틀리 (종군기자)
“한국군은 상대가 누구인지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베트콩이 있다고 알려지면 그 지역의 아무에게나 총을 쏘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 파월 장병의 증언은 이렇다. (『한겨레 21』 273호, 1999년 9월 21일 자)
파월 장병
“우리 군이 한 명 죽거나 다치면 그 다음 날엔 줄초상이 났어. 설령 그 마을이 베트콩과는 무관한 마을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그냥 보이는 대로 쏴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한 뒤에 죽이고 그랬으니깐….”
한국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해외 언론에서는 자주 언급됐던 부분이다. 오죽했으면 남베트남군의 한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에게 한국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 대해 국내 언론은 철저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의 회고다. (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252~253쪽.)
리영희
“매일 수 없이 죽어가는 무고한 베트남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우울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한국군이 4만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국내 언론들은 자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실 이 중에는 9천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수정,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 21』 279호.)
증오비의 문구: 남조선 군대는 ‘미국의 용병’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민간인은 크게 다음의 4개 성(省)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숫자는 한국군에 학살된 수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44~145쪽.)이 중에서 꽝남성에서만 희생자의 절반가량인 4,500명 정도가 발생했고 나머지 성들에서는 각각 1,700명씩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 학살이 일어난 지역마다 오늘날에는 ‘증오비’와 ‘위령비’ 등이 세워져 있다.
꽝응아이성 빈호하의 증오비: 남조선의 만행을 뼛속 깊이 새길 것 ☞ 참고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의 비문에는 늘 한국군과 함께 미군이 함께 거론되고 있으니,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20쪽.)
베트남인
“한국은 돈을 벌기 위해 미군을 대신해 싸운 용병이었다! 그러니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는 것이다.”
그런 베트남인들의 생각은 1967년 12월에 있었던, 투이보촌(村) 학살을 기억하는 비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투이보촌 위령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위령비의 내용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투이보촌 위령비
“1967년 12월, 야만적인 미국 군대는 우리가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를 후손들은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
하지만 학살은 미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67년 12월, 당시 투이보촌에는 2대의 헬기가 한국군(청룡부대) 1개 소대를 내려놓았다. 이때 한국군은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주민들은 총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들은 땅굴에 사람이 숨어있으면 죄다 베트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해 주민들을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게 하고는 나오는 사람마다 차례대로 총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두 145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게 된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응웬 티 니
“새벽 1시였어요. 한국군들이 들이닥쳐서 주민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더니, 갑자기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쐈습니다. 그렇게 모두 100명도 넘게 죽었어요.죽은 사람들 속에는 내 자식들도 3명이나 있었습니다.”
“사위와 외손자까지도 모두 잃었어요. 그때 세 살짜리 외손자는 내 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고, 나는 턱과 혀 반쪽에 날아갔다는 걸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입이 돌아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령비에는 한사코 미국 군대라고 적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누가 죽였든 그것은 미국의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끌고 온 것은 미군이고,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애꿎은 양민에게 복수하던 한국군
해병대 청룡부대는 1968년 2월 여단 규모(4천 명)로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 작전이었다. 그런데 퐁넛 마을을 지나던 1개 중대가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국군의 증언은 이렇다.
사병
“행군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총알이 날아오잖아요. 그래서 마을에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알고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없더라구요. 겁먹은 마을 사람들밖에 없어서 우리는 주민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놓았는데 , 어디선가 갑자기 또 적의 총알이 날아오는 거에요. 그래서…”
소대장
원래 사람들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요. 참나…”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한겨레 21』 334호, 2000년 11월 23일) 문제의 퐁니·퐁넛 마을은 애초에 베트콩과는 거리가 먼 ‘안전 마을’이었다. (안전마을: 미군이 베트콩으로부터 안전한 마을이라 지정한 곳)
당시 미군의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한국군이 정찰 중에 대인 지뢰에 걸려서 발목을 날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 해병 1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가 난 한국군은 보복하겠다며 인근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증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8~159쪽.)
베트남인
“시체들은 정말 끔찍했다. 어린아이들이 발가벗긴 채 죽어 있었고… 양쪽 다리를 잡아당겨 찢어 죽인 것도 있었다.”
한 비구니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구니
“어린아이를 칼로 창자를 끌어내 죽인 시신도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우리는 절 안에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학살사건
그러나 퐁넛 마을의 사건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100여 건이 넘었던 학살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이 사건은 한국군의 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다. ☞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그중에 거창학살사건이 가장 유명한 것처럼… 퐁니·퐁넛 마을 사건도 흔히 ‘한국판 미라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희생자 중에 남베트남 군인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배상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베트남 국회에 보내 탄원했던 것이고, 남베트남 정부의 항의로 미군이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 탓에 사건의 전말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 등을 통해서 기사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채명신
“민간인 학살이라뇨? 우리 군인들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베트콩들의 기만전술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