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라도 기억은 경험에 따라 다르게 적힌다. 베트남전쟁은 직접 참전했던 할아버지와 교과서에서 이를 배운 세대, 그리고 당시를 살아간 베트남 사람들에게 모두 다르다. 그러나 베트남 참전 할아버지의 훈장과 ‘한국이 증오스럽다’며 우는 베트남 여성의 '시계'가 1968년을 향해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지난 13일, <기억의 전쟁>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양천구의 한 카페에서 이길보라 감독을 만났다. 이번 영화를 통해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그는 "영화가 잘 돼 베트남에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7일 개봉을 앞둔 영화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 9000여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트남 당국에서조차 진상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기억의 전쟁>의 이길보라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영화는 학살이 이루어진 베트남의 퐁니·퐁넛 마을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았다. 마을은 무덤으로 뒤덮였다. 그들이 기억하는 한국군은 무자비했다. 노인, 여성, 어린아이까지 할 것 없이 그들의 시간은 1968년 1월 13일에 멈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덤가에 꽃을 심으며 그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곳에 와준 한국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빈다. 그러나 이길 감독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 할아버지가 저희에게 말씀하시길, '다 지나간 일이지. 너희가 뭘 할 수 있겠어. 할아버지가 한 일은 할아버지가 책임져야하고 자식이 책임질 수 없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더 죄책감을 줬어요. 결국 이제와서 아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베트남전쟁은 우리나라에게는 경제발전의 계기가 됐다. 이길 감독은 "전쟁 특수와 경제발전을 누린 전쟁 3세대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학살로 부모님과 언니, 동생을 모두 잃은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와 말을 못하는 청각장애인 '럽 아저씨', 그리고 학살의 피해로 두 눈을 잃은 '럽 아저씨'다. 여성과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에 이길 감독은 "공적인 언어를 가지지 못한 소수자의 기억은 공적 기억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증언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럽 아저씨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바디랭귀지로 한국군의 모습과 학살 장면을 묘사한다.
영화의 제목이 <기억의 전쟁>인 이유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길 감독은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그리고 아직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기억을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예기치 못하게 촬영기간도 길어졌다. 등장인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면서다. 옆구리에 총탄의 큰 흉터가 남은 탄 아주머니는 영화를 촬영하는 기간 동안 '증언자'에서 '증인'으로 변모했다.
"증언자 중 한 명이었던 탄 아주머니의 변화가 감지됐어요. 2018년 시민참여재판 때 증언을 하러 한국에 오셨는데 '꼭 사과를 받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셨어요. 큰 변화라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는 수동적인 증언자였다면 그때는 주체적으로 피해를 알리고 스스로 상처를 들춰내 보이고 사과를 요구하는 증인이 됐습니다"
탄 아주머니는 2015년 한국에 처음 왔다. 당시 위안부 피해자 분들과 함께 수요집회에 참석을 하고 나눔의 집도 방문했다. 영화 속에는 탄 아주머니와 고 김복동 할머니가 만나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어서 일까. 짧은 장면이지만 그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영화 초반과 말미에는 '시민평화법정'이 등장한다. 단상에 선 탄 아주머니는 학살의 그날을 증언한다. 그 모습은 마치 김복동 할머니가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하는 모습을 연상케한다.
피해자만이 피해자의 아픔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이길 감독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에 증언하러 한국에 온 탄 아주머니와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지날 때"를 회상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이길 감독은 탄 아주머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유가족들이 왜 광장에 나와 농성을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아주머니가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주머니는 농성장을 지나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를 낮추고 텐트 아래 놓여진 희생자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이길 감독은 "큰 아픔을 가지고 그걸 증언하러 한국에 왔는데 여기서 또 다른 아픔을 마주하고 그것에 공감한 것"이라며 "말은 통하지 않아도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분들에게 어떤 '순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마지막, 법정에서 탄 아주머니가 최종 증언을 하시는 장면에서는 조금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넣었습니다. 그 부분을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길 감독은 그것을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길 감독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왔고 몇 명을 학살했느냐는 수치보다 "'누군가는 가족을 모두 잃고 평생 고아로 살아왔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길 감독은 "가끔 우리는 너무 멀리 있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간과한다"며 "수치를 떠나 그 사람들의 아픔이 얼마나 깊은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억의 전쟁>(이길보라 감독, 2월 27일 개봉) ⓒ시네마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