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 남방 광둥성(廣東省)의 한 도시 근교 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에 살기 시작한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20여년 뒤에도 이 곳에서 계속 살기로 결심을 했다. 우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근대 유적지는 최근 논란이 됐던 한 역사적 인물과 그의 동료들이 100년 전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와신상담하던 곳이어서, 어쩐지 전생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흐뭇한 상상을 하는 게 가끔은 고단한 외국 생활의 수심을 지우는 '정신승리형 도락'이 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마을뿐 아니라, 오랜만에 해후한 이 도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 이 도시에 왔던 2004년 설 무렵, 나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다. 값나가는 손목시계라도 차고 이 도시의 악명높은 기차역 광장을 배회하다가는 팔을 잘릴 수도 있다는, 도시전설 괴담같은 홍콩 친구들의 겁주기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정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쥔, 정말로 낡고 작은 내 디지털 카메라를 노리고 따라 붙은 2인조를 만났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위험한' 이 남방 도시의 좋지 않은 기억만 간직한 채 나는 다음날 홍콩으로 총총히 돌아왔다.
2015년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홍콩 가는 김에 경유하는 기분으로 베이징역에서 고속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원래 예정과 달리 이 도시에 열흘 가까이 머물렀다. 특히 이곳 농촌 마을 곳곳의 열대 과실수나, 동남아를 연상케 하는 풍광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마을의 오래된 고택 또한 이런 풍광과 어우러져 예전에 알지 못하던 광둥성의 역사적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또 수백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삶의 무늬가 살아 있는 이곳 구도심이 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잘 관리되고 포장된 홍콩이라는 '빛'을 벗어나면, 회색 빛 공장지대나 퇴락하고 오염된 농촌의 '어둠'만이 광둥성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울긋불긋 진홍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컬러풀한 아열대의 꽃나무들과, 화려한 링난(嶺南) 문화의 건축 양식, 그리고 치로우(騎樓) 회랑식 건물이 줄지어선 거리들은 내가 한때 거주하기도 했던 여느 동남아시아 도시의 차이나 타운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홍콩의 허슬 앤 버슬(hustle and bustle)과 힙스터 문화가 더 이상 기껍지 않은 나로서는, 그 대가로 만들어진 홍콩인들의 민(mean)한 성정이나 그 도시의 부잡스러움이 생산하는 일상적 스트레스가 매우 싫어졌다. 그런데, 홍콩과 이웃한 이 오래된 도시는 반대로 여전히 내가 사랑하던 남방의 느긋하고 습한 공기와 향신료 내음이 살아 있었다. 내가 이전에 알지 못하던 여유, 또 어쩌면 홍콩 문화의 근간이 된 성실함과 꾸미지 않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성품의 원형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년 겨울이면, 이 도시는 내게 열흘쯤 피한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기어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중국 남방에 흔한 리치나무. 이곳에는 6월이 되면 나무 한가득 열매가 맺힌다 ⓒ필자
이 도시에서 내가 새롭게 발견한 광둥의 근대사는 다시 한번 이곳이 내 터전으로 마춤하다는 느낌을 더해줬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근대역사 기념관을 세시간 넘게 천천히 둘러보며, 반도 채 섭렵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내 무지에 충격을 받았다. 신해혁명을 전후한 중국 근대 전환의 주역들이 거의 대부분 광둥인을 비롯한 남방 사람인 것은 대체 무슨 연유일까? 태평천국 운동의 두령이었던 훙슈촨(洪秀全), 매우 급진적인 동방적 유토피아를 그렸던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한 캉유웨이(康有為), 무술변법운동을 이끈 그의 제자 량치차오(梁啟超), 그리고 근대 중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을 포함한 기라성들은 그들중에도 가장 앞자리에 빛나는 인물들일 뿐이었다. 당시, 각 지역별 국민당 당원의 숫자를 비교한 표를 보니, 그 도저함이 베이징을 비롯한 북방 도시들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많았다.
▲1차 국공합작이 있던 1926년 당시, 광둥성의 국민당 당원수는 광시성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수십배에 이른다 ⓒ필자
차차로 이웃들과 어울리며 깨닫게 된 것은 광둥인들이 가진 이러한 '반골기질'이 사실 수천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역시, 중화의 변방에 위치한 반도인 입장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는데, 한 국사학자의 칼럼 속에서 알게 된, 광둥-베트남과 만주-한반도 고대사의 대칭적 역사가 참으로 절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
"백제 땅 함평서 나온 토기에 왜 백인 얼굴이?" ) 선진(先秦)시대 이래, 백월(百越), 남만(南蠻), 남월(南越)국 등의 이름으로 변주되면서, 각종 역사적 기록이나 설화에 등장하는 이곳은, 중원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야만인들의 땅이었다.
본격적인 한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링난산맥으로 분리되어, 이곳은 오랜 기간 중화제국의 주류사회와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세계였다. 그래서, 중원에 전란과 사화의 피바람이 불 때마다 천년에 걸쳐 남하한 북방의 문인, 귀족들이 현지인과 통혼하면서도 그 삶의 형식을 잃지 않고 지금도 살아 남았다. 바로 이들의 후손이 광둥 세발 솥(鼎)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객가(客家)인들이다. 이재에 극히 밝아 상업을 발달시키고, 그렇게 쌓은 부로 화려한 수공양식 등의 라이프 스타일을 발전시킨 체면을 중시하는 챠오샨(潮汕) 사람들, 그리고 로컬 광둥의 질박하고 실용적인 향토문화를 담당하는, 다수인 광푸(廣府) 광둥 사람들이 있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공통점 중에는 분명히 북방의 정치 수도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이끄는 화둥(華東) 지역 한족 문화의 중심을 추수하지 않는 변방인들의 자부심이 있다. 이는 또, 천년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으로서 상업이 발달했던 광둥 지역이 외부 세계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는데도 가장 앞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장법사는 서역의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천축국으로 건너갔지만, 사실 달마가 인도로부터 배를 타고 중국에 당도한 곳은 광둥 지역이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를 무릎꿇린 영국 정부가 광저우의 주강(珠江)변에 위치한 중화 제일 거상들의 무역거래 중심이었던 13홍(行)을 불태우고, 상업 중심을 자신들의 식민도시인 한미한 어촌 홍콩으로 옮기기 전에, 광둥의 성도 광저우(廣州)는 청조의 유일한 대외무역항이었다.
흥미롭게도 중국내에서도, 가문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감으로 묶인 학업, 사업, 생활,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전통(宗族) 문화, 집성촌 문화가 가장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곳이 또한 이곳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든 외래 인구가 많은 것과 함께, 중국의 34개 성 중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연유에는 중국 정부의 한자녀 정책을 귓등으로 듣고, 벌금이야 때리든 말든 원하는 만큼 아이를 낳은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있다.
요는, 대륙의 변화가 시작될 어떤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핵인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자본이 절대 부족한 오지도 아닌, 그 중간의 어떤 변경지역 중심이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나는 이곳에서 가지게 됐다.
여하튼, 얼마전 이웃한 홍콩의 '반송중' 사태를 나는 한국의 매체와 외신을 통해 접했다. 그래서, 한참 긴장이 고조되던 지난 6월 중순의 일주일쯤을 나는 대단히 착잡하고 신산한 기분으로 보냈다.
그 이유는 두가지였는데, 첫째, 주로 페이스북과 국내외 미디어를 달구는 뜨거운 열기와 불과 2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화로운 이곳 분위기의 낙차가 너무나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것 때문이었다. 두번째로, 갑자기 먼곳에서 들리는 소식에 백열된 듯한 한국인들의 '홍콩연대' 구호가 퍽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두가지 이유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 혹은 뭉뚱그려서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어쩌면 급작스레 홍콩시민과 진보, 보수를 막론한 한국인들을 뜨겁게 뭉치게 한 진짜 이유가 아닌가 하는 불편함을 나는 계속 느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중화권 생활 10년차에, 이곳의 유일한 한국 사람인 나는 한국인들 혹은 홍콩인들의 혐중 감정을 접할 때마다 내가 욕을 먹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중국인 친구들과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이런 분들에게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을 구별해야 한다고 반박하기는 하는데, 여하튼 당을 중심으로한 국가와 사회가 미분화되지 않은 중국에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시민들이 국가나 정부와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것도 사실이다. 또, 소위 우리 '중국통'들도 시진핑 시대의 권위주의 정권에 갈수록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현재로서는 더 나은 대안이 없기에 '원칙적이고 대국적인 지지'를 거둘 방법이 없어 심한 '자기분열적' 고통을 느끼곤 한다.
처음 홍콩의 소식을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이것은 "'반중 감정'에 기인한 독립 움직임인가" 하는 우려가 들었던 것은, 한국의 한 일간지가 홍콩의 영자 권위지 SCMP(South China Morning Post)를 인용하여, 어느 미국내의 홍콩 유학생 이야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홍콩학생 "난 중국인 아니다" 글 파문…中 "처형하라"). 한국의 '일베족' 비슷한 '애국심 돋는' 어느 중국 유학생은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다"라고 선언한 홍콩인 대학생에게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중국인들의 반응이 이 젊은 홍콩 대학생의 '독립심'을 더 강화시켰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접한 '범죄인 인도법' 사태와 일부 시위 참여자들의 영국식민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들었을 때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학생이 했다는 "홍콩의 핵심 가치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발언은 일부 독립파 시위자들이 흔들었다는 식민지 깃발 이미지와 겹치며 나를 다소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 멍청이들아! 왜 너희들의 진짜 고향인 광둥의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전통을 얘기하지 못하고, 근본도 없는, 아니 식민지 땅에서는 실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영미의 민주주의와 이를 계승한 홍콩의 헌법을 들먹이니?" 나는 특히, 젊은 친구들이 아니라 홍콩의 지식인들에게 화가 났다. 어째서 홍콩의 지식인들은 청년들에게 자신의 자랑스런 전통을 가르치지 않고, 고작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선심쓰듯 흘리고 간 가짜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는가? 실제로 그들이 충분히 댓가를 치룬적 없이, 그냥 공짜로 얻은 자유를.
사실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다년간 홍콩 친구들, 그리고 광둥성을 포함한 대륙의 친구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갖게 된 안타까움에 기인한다. 나는 홍콩의 우산시위가 격화되던 무렵부터 홍콩의 활동가들과 중국의 활동가들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됐는데, 주로 대륙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홍콩의 진보적 인사들이 대개 대륙에 대한 강한 심리적 거부감을 가진 것을 알고 상당히 당황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이전에 알던 홍콩인들이 주로 대륙을 '누비며' 돈벌이에 여념이 없던 홍콩인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사업가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보통 홍콩인 혹은 이런 "대륙의 거대한 시장과 자원을 이용한 자본주의적 성취"에서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하거나 오히려 이때문에 크고 작은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을 충분히 숙고해 보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중국, 특히 광둥에서의 활동이 홍콩인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도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양쪽의 활동가들과 틈날 때마다 의견을 나누었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느끼게 되는 거대한 벽에 힘이 빠지고는 했다. 오히려 입장을 바꾸어, 남북한의 친구를 동시에 가진 제3국인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홍콩의 '식민지 노예근성' 문화에서 느끼던 거부감이 이런 감정을 강화한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찌기 서구, 특히 영미나 일본 등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높아진 홍콩인들의 자부심이 오랜동안 대륙인들을 눈에 띄게 멸시하는 정서로 이어진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홍콩전문가 인천대학교 장정아 교수의 논문("홍콩 땅을 지킨다는 것: 홍콩 정체성에서 향촌과 토지의 의미" 현대중국연구 제19집 4호)을 보고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아래 발전하는 도시 홍콩과 낙후된 거대한 농촌, 공산 중국대륙의 '흑이미지'를 노골적으로 홍콩인들의 머리속에 심어온 것을 알게 됐다. 결과적으로 왜 홍콩인들이, 심지어 자신들의 정신적 역사와 문화의 수도인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 나들이조차 꺼리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이는 당연히 일부 한국인들이 역시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과 미국 등을 숭배하면서, 아시아나 제3 세계의 여타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과 일치하는 심리이다. 특히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멸시의 대상이던 대륙 사람들이 지금은 홍콩의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됐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더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 신분 역전'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보통 한국인들이나 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조중동'을 비롯한 한국 주류 매체의 보도가 중국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슷한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홍콩인들의 운동 방법을 지혜롭지 못하다 나무라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해외의 홍콩 시위 지지자들과 그 정부가 가하는 형식적이고 소소한 비난에 눈이나 깜박할까? 하지만, 중국의 공민, 특히 베이징과는 한참 떨어져 있지만 홍콩과는 지척인 그들의 친척 광둥 사람들이 어느 샌가 홍콩인들의 주장에 공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좌우를 막론한 활동가와 혁명가들이 홍콩과 광둥, 그리고 중국 대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외세와 전근대의 압제자들에게 대항했던 100년전 그 시절처럼. 그렇다면, 그들이 보호하고 싶다는 자유와 헌법은 과연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 홍콩인들뿐 아니라, 대륙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것은?"
나는 그 뜨거웠던 일주일간, 내가 사는 광둥성의 남방 도시와 홍콩의 공기가 너무나 다르게 느껴진 이유가 단지중국 공산당 정부의 언론통제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심리적 위화감과 격절감이 지척간의 대륙인과 홍콩인들 사이를 깎아지른 절벽처럼 가로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겨레 신문 박민희 기자의
"우리는 모두 홍콩인이다"라는 글을 읽고 심한 의식과 감정의 분열을 느꼈다. 이런 나의 심리적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주위의 중국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20여명 친구들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 봤다. 가장 흥미있는 답변은 홍콩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는 한 광둥 친구와 토론을 벌이다 나왔다. "홍콩인들은 왜 중국에 귀속감을 느끼지 못하는가 ? 중국인들은 홍콩 사람들이 도대체 왜 시위를 벌인다고 생각하나 ?" 그는 두개의 열쇳말을 건냈다. 그것은 'refugee'와 '過日子'였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난민'과 '먹고사니즘' 정도로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래전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 과정을 거치며 대륙에서 이주해 간 홍콩인의 심리상태를 '난민'으로 표현했고, 그들의 관심사는 '먹고사니즘'과 현상유지일뿐이지, 홍콩독립이나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나는 이 대답에 선뜻 수긍할 수 없었다. 우선, 홍콩인들과 곤경에 처한 난민들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 "그래 '먹고사니즘'이 홍콩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분명히, 홍콩의 괴뢰정부가 아니라 그 배후의 중국 정부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그러자 그는 내가 비약을 하고 있으며,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야말로 그가 (비겁하게)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고 역정을 냈다. 전 세계가 다 배후의 중국 정부를 손가락질 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또, 홍콩인들이 자기는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고 하지 않나?
며칠후, 불현듯 더 적절한 한국말이 생각났다. '실향민'. 갑자기 머리속이 명료해지면서, 동시에 내가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홍콩인들, 특히 2~4세대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난민'이 아니라 실향민이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 적수공권으로 홍콩으로 넘어 온 1세대의 분투로 국제적인 위상과 독자적인 발언권조차 획득한 홍콩인들을 한국의 실향민들과 비교해보니 비로소 그들의 처지를 제대로 상상해 볼 수 있게 됐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실향민 후대는 1세대의 성취와 그를 계승한 현재의 한국 생활에 관심이 있지, 굳이 선대가 떠나온 '고향'과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평균적인 한국인보다 더 공감하는 것 같지 않다. 홍콩이라고 크게 다르랴. 중국에서도 過日子에 작을 소小자 하나를 더 붙여, 한참 유행하는 小日子(샤오를즈)라 고쳐쓰면, 한국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소확행'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사태를 맞는, 대다수 보통 홍콩인들의 요구는 사실 "독립도 자유"도 아닌 "제발 내 '소확행'을 뺏어가지 말아주세요"라고 해석해도 될듯 싶다.
얼마전 홍콩의 인접 도시 선전(深圳)에 가서 만난, 선전살이 20년차인 전문직 종사자 여성은 홍콩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홍콩에서 파는 분유와 의약품에서 가짜가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사례를 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선전의 중산층 중국인들은 진품을 구매하기 위해 대부분 홍콩에 가서 이런 제품들을 사오곤 했는데, 이젠 그것 조차 믿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예전엔 중국이 (선전이) 홍콩과 교류하며, 생활 표준과 사회신뢰도를 홍콩 수준으로 높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명의 중국인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고서 얻은 대륙의 '고요함'에 대한, 나의 거친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중국인들의 경우, 사실 대다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다.
2.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더라도, 주로 중국 정부의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중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불평만 하는" 홍콩인들이 배은망덕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영미와 같은 외세나 홍콩에 재산을 감춘 중국의 부패세력이 홍콩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의사를 표시할 필요도 별로 못느낄 터이니, 오히려 1번에 더 가깝다.
3. 물론, 어느 사회나 집단도 그러하듯이, 독립을 주장하는 홍콩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날뛰는 '일베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시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4. 중국인들의 삶의 표준(사회자본, 즉 신뢰도)이 더 나아지길 원하는 중산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홍콩인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5. 그들이 속한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소수의 그룹은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줄어 드는 것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낀다. 중국 사회도, 홍콩 수준으로 상향 조정될 것을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 반대라는 점에서.
이제 반전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와 동료 한국인들의 주장이 무람없게 느껴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이들에게 중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되살리라고 윽박지르고 있는가? 당시 한국 언론에 보도된, 홍콩 시위의 사진을 낯익은 광주의 진압 사진과 비교하는 것은 특히 나를 불편하게 했다. 홍콩시민들이 광주나 천안문과 같은 유혈사태를 겪고, '피의 댓가'로 그들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어쩌면 홍콩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홍콩사람들이 원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상정하며 '민주주의 순교자 프레임'이라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홍콩인들에게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뉴스를 보면, 홍콩인들이 왜 선뜻 광둥의 근대 혁명 열사들을 재조명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재키 챈은 2011년 신해혁명이라는 중국/홍콩산 애국영화에 등장해서, 쑨원의 '절친'이자 혁명영웅인 황싱(黃興) 장군으로 열연한다. 나는 중국 근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다. 재키 챈의 낯간지러운 히어로 연기와 '국뽕필' 대사 가득한 영화의 키치스러움이 본전 생각을 나게 했다. 문란한 사생활이나, 재능없는 아들을 주연 배우로 밀어주기 때문에 가뜩이나 홍콩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재키 챈이 나오는 '신해 혁명'을, 홍콩 친구들이 어떻게 볼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런 대중문화나 공론장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공산당 정부가 독점하는 현실에서, 지식인과 시민들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세계화한 홍콩인 '브루스 리'가, 역시 가장 중국적 메시지인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자신의 철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홍콩인들의 가장 좋은 정체성 찾기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다시 브루스 리의 스승인 엽문이나 그 이전의 황비홍 등으로의 '탈국가주의적 길찾기'는 꼬불꼬불, 좁고 긴 산비탈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홍콩과 광둥인들을 위한, 그저 기도와 위로, 격려의 마음이 아니라, 과감하고 엉뚱한 예측 혹은 제안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홍콩과 광둥의 동일체 운명을 그들이 절실히 깨닫는다면, 체제 개혁에 대한 요구는 사실 홍콩이 반환될 30년 후가 되기 훨씬 전에 양쪽 모두에서 과감히 이루어져야 한다. 얼마전 출간된 김종철 선생의 저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라는 책 제목이 웅변적으로 이를 계시한다.
지난 5월 호주의 국립연구소가 '기후 재앙 보고서 (Existential climate-related security risk)' 를 제출했다. 향후 10년내에 전시 동원령을 방불하는 수준의 전지구적 산업과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30년 후 상당수 지구의 대도시들에는 사람들이 살 수 없을 것이며, 10억 이상의 인류가 상상할 수도 없는 재난을 경험하고, 어쩌면인류 자체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아포칼립스적인 내용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미디어가 보도한 사실이다. (관련기사 :
호주연구팀 "2050년 기후난민 10억명...핵전쟁급 위기")
하지만, 아직 상당한 언론 자유가 있는 홍콩도, 권위주의적 정권이 보도 자체를 통제하는 대륙도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200년전에 시작한,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이를 보장하는 헌법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미국과 한국 같은 나라들은, 아마도 물에 잠길, 당사자가 아니라서, 외면할 뿐이다. 저 멀리, 베이징조차도. 하지만 홍콩과 광둥, 특히 이곳의 젊은이들과 다음 세대는 30년후에 비통함을 달랠 길 없게 될 당사자들이다. 핵발전소 사고로, 향후 100년간 고향에 아예 돌아 올 수 없게 됐거나, 설사 그곳에 살아도, 마을 길을 산책하는 것 같은, 소소한 일상조차 안심하고 누릴 수 없게 된, 일본 후쿠시마 사람들의 마음을 이들은 상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 마침, 역시 물에 잠기게 될, 홍콩의 이웃, 선전의 연안에는 상당 수의 핵발전소가 존재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의 유일한 미래의 생존 가능성을 열어줄,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은 개혁이나 혁명이 아닌, '천지개벽'과 같은 수준의 그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국에서 시작된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운동은 과격한 소통 방법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중미의 에쿠아도르같은 나라는 이미 2008년 자국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인류가 지구에서 생명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좋은 삶(Buen vivir)을 보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콩과 광둥, 그리고 중국도 거버넌스와 제도뿐 아니라 영적 각성 수준의 의식 변화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30년후 중국에 반환되어야 할 홍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 진철군(陳鐵軍, 가명)은 중국 남방의 한 도시에 사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