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북한의 신년사에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지연되고 북·미 협상도 가시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기대했던 내외 여론에게는 실망일 수 있다.
알맹이는 최근에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 보낸 친서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지금의 상황에서는 북한 자신보다 미국이 먼저 움직일 차례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북한의 정세 인식이 여전히 안이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다분히 외부 시선을 의식하고 작성된 올해 신년사에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절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선 텍스트가 과거의 거칠고 과대망상적인 수사와 문법에서 벗어나 온건하고 비호전적인 방향으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
첫째, 신년사 구호가 '강성대국'(김정일 시대), '강성국가'(2012-2017), '사회주의 강국'(2018)으로 변하더니 올해에는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로 소박해졌다.
둘째, 작년의 성과로 군수공업부문은 무기가 아니라 농기계, 건설기계, 인민소비품 등을 생산하여 인민 생활 향상을 추동했다고 평가하였다.
셋째, 올해 과업을 제시하면서 '당과 대중의 혼연일체를 파괴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침식하는 행위'에 대한 투쟁의 대상으로 외부 적대세력의 반공화국 음모가 아닌 내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를 들고 있다.
넷째,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부분도 비록 외부 세계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육성으로 북한주민에게 공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신년사를 북한주민 전체가 연중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비핵화 방향을 내부적으로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국제사회에 북한의 결단이 진정성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방송의 화면 배경으로 노동당 중앙당사 내부를 공개한 것도 처음이다. 이것도 메시지의 진정성을 강화시키는 장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결국 북한이 신년사의 이미지 형식과 텍스트 문법의 변화로 외부에 전하고 싶은 것은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에 대한 호소로 읽혀진다. 즉, 당신(미국과 국제사회)들이 상대하고 있는 북한은 과거의 북한이 아니며, 우리(북한)는 협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밀고 당기는 노력은 하겠지만 상대를 속이거나 자신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신에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다짐을 강력히 전달하고자 했다.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사회주의 건설의 진격로를 열어나가자'며 '경제'라는 단어를 38차례나 사용했다. 신년사 이후 북한 주민들은 온통 경제과업 관철 결의 분위기로 넘쳐났다. 김정은 위원장의 최대 관심이 핵 개발과 국제사회와의 대결에 있지 않다는 증좌로 삼고자 한 것이다.
▲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노동신문
북한의 안이한 정세 판단 신년사에서는 북한이 협상에서 밀고 당기고 싶어 하는 몇 가지 새로운 아이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북한의 정세판단이 여전히 안이하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첫째, 올해 경제부문의 과제로 '원자력 발전능력을 조성'해 나가자고 언급한 부분이다. 스스로 핵 개발 중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하에 핵 개발 프로그램을 보존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의 원자력발전 문제는 흑연로든 경수로 방식이든 무관하게 핵 개발 의혹을 제공한 근본 원인이다. 이런 발전소를 갖추려면 비핵화 진전이 있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문제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이다.
둘째,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자는 언급이다.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우리 정부도 중국의 참여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평화 문제에 있어서의 진전은 협상 틀보다는 비핵화 진전 여부가 관건인 점은 마찬가지다.
셋째, 아무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를 밝힌 점이다. 일각에서는 개성공단이나 금강산사업도 최근의 남북철도·도로 연결 사업처럼 국제제재 하에서도 가능한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만, 실질적인 재개를 위해서는 여하튼 비핵화 진전이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북한이 제기한 새로운 주제들 모두 북한의 가시적 비핵화가 우선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신년사 여러 곳에서 작년 이래 조성된 남북관계의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필요한 비핵화 진전을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움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상황 인식은 여전히 안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새로운 길'은 경제적 잠재력을 발양시키는데 있다중국이 언급한 쌍중단(雙中斷) 쌍궤병행(雙軌竝行) 구도에서 현 상황을 보면 지금은 쌍중단은 유지되고 있지만 쌍궤병행에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쌍중단은 무한정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북한의 모라토리엄은 상당기간 지속 가능하지만 한미동맹의 군사연습은 매년 시기가 도래하며 그때마다 유예 결정을 반복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은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는 만큼, 국내 여론의 인내심은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다. 따라서 비핵화와 이에 따른 상응조치는 단계별로 동시 행동 원칙을 적용한다고 해도,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보다는, 누가 먼저 움직이든 그 시차를 좁히면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한미동맹 측이 북한보다 훨씬 인내 허용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쌍중단의 조건이 깨지면 그 타격은 모든 당사자에게 미치지만 가장 치명적인 후과는 북한이 겪게 될 것이다. 이는 역으로 속도감 있는 비핵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북한이 될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마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기를 만들지도 실험하지도 전파하지도 않겠다고 밝힌 점을 평가하면서, 2차 정상회담을 고대한다고 화답했다. 북한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조건 충족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순리다. 그 '새로운 길'은 오히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경제적 잠재력을 발양시킬 방도를 찾는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 속도전 기치를 들고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