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생각한다
광복 70년을 맞아 현대사의 진정한 지도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생각하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이 한반도를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한국군 10만 명을 무장시킬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라. 둘째, 한국이 무력침공을 당할 경우 안전보장을 약속하라. 셋째, NATO에 준하는 ‘태평양 지역 동맹체’를 결성하라. 예상대로 미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때 이 대통령은 ‘북진 통일론’을 꺼내 든다. 화들짝 놀란 미국은 결국 이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된다.
1950년 7월, 6·25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오산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군이 유엔군 산하로 편입할 것을 요청했다. 대구에 머물던 이 대통령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낸다.
“본인은 한국전쟁 상태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것이다. 지휘체계 일원화는 유엔군의 참전으로도 전세가 불리하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 9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메모를 전한다. 한국군에 단독 북진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명령으로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고, 사실상 통일의 목전까지 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꿈은 무산됐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작전권을 넘겨주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주권을 행사했던 이 대통령의 뚝심과 지혜의 완결판이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발표한다. 전쟁이 끝나고 미일 강화조약이 체결되면 당시 한일 간 해양 경계선인 ‘클라크 라인’이 불분명해질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평화선을 선제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독도에 대한 선점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1953년 6월 1일, 휴전회담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한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고 인민군에 편입될 2만7000여 장병이 자유대한에 남는 계기가 된다. 유엔군에 저항하면서까지 단독으로 내린 석방조치로 민족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금물이라고 한다. 혼돈의 해방정국에서, 그리고 6·25전쟁의 와중에서 이 대통령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리더십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찌 됐을까?
이정호 (구리넷 취재본부장 / 前 재향군인회 홍보실장)
* 국방일보 5월4일 18면 ‘병영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