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대를 나온 척추전문의인 남모씨(55)는 얼마 전부터 서울 가락시장에서 새벽마다 과일상자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시장 일을 한 뒤에는 시간강사로 출강 중인 대학수업을 준비한다. 남씨는 지난해 ‘기독교 사회복지은행’에 4000만원을 투자했다 날린 뒤 매월 100만원씩 나가는 카드빚을 갚으며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 달 전에는 이자를 제때 못내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남씨는 “평생 이렇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신혼 3년차인 주부 표모씨(30)는 얼마 전 남편으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았다. 표씨가 기독교 사회복지은행에 투자했다 날린 돈 2000만원의 이자가 점점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이자가 원금의 약 40%에 육박한다.
표씨 남편은 빚을 갚기 위해 낮에는 유통회사 직원, 밤에는 대리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간호사였던 표씨는 채무자들이 병원까지 쫓아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표씨는 현재 두 돌 된 딸을 친척집에 맡긴 뒤 채무자들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다.
▲ 상당수 신용불량·가정 파탄 출자금 명목 수십억 사기 강보영 목사 7년형 복역
남씨와 표씨는 지난해 한국사회복지뱅크 대표였던 강보영 목사(67·구속)가 “미자립 교회와 소외계층 지원을 목적으로 한 기독교 사회복지은행을 만들겠다”며 목사와 신자들로부터 투자금 명목으로 수십억원의 돈을 받아 가로챈 사건의 피해자다. 검찰 조사 결과 280여명의 투자자가 이 사기사건으로 23억8000만원을 날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피해자대책위원회는 “실제 500명의 피해자가 50억원의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대책위원은 “기독교 은행에 출자자로 참여하면 은행이 설립된 뒤 투자금의 2~3배가량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많은 피해자들이 속았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떼인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대다수 피해자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가정이 파탄날 지경에 몰렸다.
강 목사는 2010년부터 일간지에 광고도 하며 투자자들을 모았다. 2010년 11월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독교 은행 발기인 대회에는 무려 8000여명의 교인들이 모일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행사 팸플릿에는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성공을 위한 기도회 및 한국사회복지금융 설립대회’라고 돼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회장인 엄신형 중흥교회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계 원로들과 유명 정치인들이 설교자와 축사자로 나와 있다.
황진수 제일성도교회 목사는 대회사에서 “강 목사를 비롯해 여러 목회자들이 사회복지은행을 출범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했다”며 “은행 설립에 한국 교회와 목회자, 성도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만신 한기총 증경회장은 격려사에서 “한국사회복지금융이 하루빨리 설립 인가를 얻어 한국 사회에 크게 이바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당시 “기존 은행을 인수하거나 새 은행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자본금 1조1000억원 규모의 제1금융 기독교 은행을 설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 조사 결과 강 목사는 은행 설립을 위한 인적·물적 설비를 갖추지 않았고 당국에 은행 인수를 위한 절차를 진행한 적도 없다. 지난해 8월 구속된 강 목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춘천구치소에 복역 중이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피해는 전혀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피해자들은 “사기를 주도한 목사와 함께 설명회를 진행한 대형교회 목사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전국 곳곳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들 대부분은 이름없는 강 목사가 아니라 교계 원로들을 보고 투자했기 때문이다. 피해자 남씨는 “장충체육관에서 기라성 같은 대형교회 목사들과 유명 정치인들이 참석한 투자설명회를 보고 강 목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형교회 측은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장충체육관 행사에서 설교를 한 엄신형 목사는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당시 행사 때 설교를 하긴 했지만 G20 정상회의의 성공을 위한 것이지 기독교 은행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난 지금도 우리 교회 앞에 있는 17평짜리 전셋집에 산다”며 “행사에 참석하고 강 목사한테 돈을 받은 것도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1억3000만원을 날린 수도권의 한 교회 장모 목사(71)는 “처음엔 강 목사 혼자 주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행사 때마다 참석해 축사까지 해 놓고선 자기들만 쏙 빠진다는 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용찬 피해대책위원장은 “법적인 잘못은 없다 해도 한국 기독교의 양심인 지도자급 목사들이 이 문제를 마냥 덮어두기만 하고 단 한번의 사과나 해명도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