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식씨 구속사 시리즈 비판(2)

박윤식씨 구속사 시리즈 비판(2)

복음제일교회 0 1,228 2021.01.26 13:16
박윤식씨 구속사 시리즈 비판(2)|평강제일교회(박윤식)
2011.02.20 17:55
박윤식 목사 저(著) 비판 (2)

왜 반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한 책인가?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책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하는 한창덕 목사는 비판의 글에서“필자가 그 책들을 읽어본 바로는 구속사적 입장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의 해석이었던 모범적 해석이었으며, 그것도 온전한 모범적 입장의 해석이 아니라 반쪽짜리 모범적 이었고, 반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해 놓은 책이었다.”라고 반박한다. 그런지 여부를 살펴보기 바란다(편집자 주).


2. 구속사적 해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전부 표지에 ‘구속사 시리즈’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책에는 ‘구속사 시리즈 1’이라 되어 있고, 두 번째 책에는 ‘구속사 시리즈 2’라 되어 있으며, 나머지 책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은 표지만 보면 누가 보아도 ‘아, 구속사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 놓은 책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그 책들을 읽어본 바로는 구속사적 입장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의 해석이었던 모범적 해석이었으며, 그것도 온전한 모범적 입장의 해석이 아니라 반쪽짜리 모범적 이었고, 반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해놓은 책이었다.

그러면 그 책들은 왜 반구속사적인 책들인가? 그 책들이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 놓은 책이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구속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며, 구속사적 해석이 무엇인지 구속사에 대해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읽어도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에서 가장 금하고 있는 것들을 근간으로 삼고 써진 책이기 때문이다.

⑴ 모범적- 구속사적 논쟁.

1930년대에 화란의 개혁교회 내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의 일상적인 설교 관례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였다. 그들의 불평은 설교자들이 역사적 본문에 언급된 사람들을 으레 본받아야할 모본으로, 따라야할 모범으로 제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범적 설교”란 말이 생겨났으며, 결국 ‘모범적- 구속사적 논쟁’이 시작 되었다.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구속사적 접근의 창시자라 불릴 수 있는 스킬더를 비롯해 스피엘, 판데이크, 판 드 피엘, 페인호프 등이었고, 이들과 논쟁했던 모범적 입장의 사람들은 바빙크, 데이크, 다우마, 하이젤, 스켈하아스, 스트레이프케르크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박윤식 목사의 책이 정말 구속사적 입장에서 써 졌는가 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므로 구속사 논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홀버다와 더 크라아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보면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원리가 무엇이며,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모범적 해석이 무엇인지, 그리고 필자가 왜 박윤식 목사의 책들이 반구속사적이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구속사적 입장을 강조했던 홀버다의 주장을 먼저 들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많은 역사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 계속 진행되는 하나님의 계시의 한 역사, 늘 점진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한 역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다양한 인물들은 모두 이 하나의 역사에서 그들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부여받았으며, 이 역사에 대해 그들의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그들이 서로간에 갖는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이 구속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그 일관성 속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권성수 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pp. 55~56)

홀버다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단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구속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모범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경우에 대해서는 본받아야할 좋은 모범으로, 그리고 또 어떤 인물들에 대해서는 피해야할 경고적 모범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역사적 본문을 보다 큰 단위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면, 만약 유기적인 연결 관계로 보지 않고 상황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건전한 해석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좋은 설교를 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편적 해석’이라 하며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특히 전체에서 한 사람의 일부, 그의 성격의 일부, 그의 경험의 일부, 그의 행동의 일부 등을 떼어내서 설교하는 것을 ‘원자적 해석’이라 하며 배척하였고, 무엇보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소위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위인전과 같은 ‘전기설교’를 가장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설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사람을 높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간곳이 없게 만드는 인간 중심의 설교이고, 결국 성경도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버리고 어떤 것을 본받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경만 볼 필요가 없다. 명심보감에도 좋은 말씀은 있으며, 심지어 불경을 봐도 교훈으로 삼을 내용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속사 논쟁이 한창일 무렵 구속사적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해석했던 더 크라아프는 그의 책 「약속 그리고 구원」이라는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주로 사람들이나 그들의 믿음을 매력적인 모범으로, 그들의 죄악들을 거부해야 할 모범으로 말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말해야만 한다.”

⑵ 반성경적인 책.

박윤식 목사의 책이 왜 반구속사적인 책인지 구속사의 논쟁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의 책은 족장들의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를 본받고 따르자는 방향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구속사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책은 구속사적 해석이기는커녕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분들이 가장 싫어했던 ‘전기설교’와 같은 형태의 주장을 하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인간중심적인 모범적 해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의 책은 모범적 입장에서 기록된 것인가?

아니다. 그 책은 족보에 나타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이며, 신앙의 위인이라는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도 반쪽짜리 모범해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책의 문제점은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 책의 진정한 문제점은 엉터리로 해석한 신명기 32장 7절과 예레미야 6장 16절에 근거로 자신의 사상을 폈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성경과는 반대로 가르쳤고,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그것을 위하여 성경도 막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

신약성경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준 내용이 나온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14:11)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처럼 섬기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고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14:15)고 하면서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대한 존재로 높이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옷을 찢게 만든 것과 같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사도행전의 예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합리화 시킬 여지가 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기 때문에 ‘사람을 높여도 신으로만 높이지 않으면 된다’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사례는 그럴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써 젊고 팔팔하며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팔십세로써 상대적으로 늙고 꼬부라진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당시에 아주 불신과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보내려고 하실 때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하면서 갖가지 핑계를 대다가 마지막에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라고 하면서 다섯 번이나 거절하며 불순종 했다(출3:11, 13, 4:1, 4:10, 13). 그는 위대하기는커녕 힘없는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불신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던 것은 그가 특별하거나 능력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순종하고 믿음도 좋은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출2:23~25), 은혜로 그를 부르신 결과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바울이 자신에 대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한 것과 같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 반석의 물이 갈라지는 사건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출애굽기 17장에 있는 사건으로 출애굽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이고, 또 한 번은 민수기 20장에 있는 사건으로 출애굽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사건이다. 그런데 이 중에 두 번째 사건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의 영광을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아니, 지금까지 모세가 행했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분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힘없는 노인으로써 밑바닥까지 내려간 모세를 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영광이 마땅히 그분께 돌아가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과 아론에게 큰 능력이 있어서 그들에게 물을 주는 것처럼 성질을 내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20:10)라고 하면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부임하는 원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하는 백성들을 보고 태우고 가던 나귀가 자기보고 환영하는 줄 알고 날뛰다 원님 떨어뜨린 것과 같이 주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지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민20:12)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가로챈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특별한 사람들, 즉 소위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이라는 존재는 그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대하게 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사람에게 영광돌려 그들이 그 영광을 가로채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람들을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자는 입장에서 쓴 박윤식 목사의 책은 성경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⑶ 구속과 구속사에 대한 이해.

성경에 나오는 구속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만 알고 있었어도 박윤식 목사는 ‘성경의 족보에 역대 족장들의 신앙이 꿈틀대고 있다’라고 하며 그들에 관한 책을 쓰면서 표지에 ‘구속사 시리즈’라는 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① 죄와 구속.

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소테리아’(swthriva)로‘구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속을 나타내는 단어는‘뤼트로시스’(luvtrwsi")로 ‘풀다’‘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뤼오'(luvw)에서 온 것이며‘속전’혹은‘속전의 값’을 의미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본래 구속을 나타내는 ‘뤼트로시스’란 단어는 노예시장에서 생겨난 것으로 쇠고랑을 차거나 묶여 있는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 즉 노예 해방을 의미했다.

노예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전쟁에 져서 전쟁포로가 되어 노예로 되거나 돈이 없어서 빚 때문에 팔린 경우, 그리고 주인의 소유인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예 처음부터 노예가 된 경우 등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가 되었건 노예란 자신의 능력으로 쇠고랑을 풀고 해방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아예 노예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에게는 긍휼과 능력 있는 구속자, 즉 그 빚을 대신 갚아줄 대속자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은혜의 처방이다. 그래서 그분은 구속자를 보내기로 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죄와 관계없는 노예의 대속, 즉 노예의 구속과 성경에서 말하는 인류의 구속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노예 해방과 성경의 구속.

성경에서는‘죄’를 나타내는 단어가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쓰였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빚’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대표적인 예가“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죄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빚’을 나타내는‘오페일레마’(ojfeivlhma)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면서 모두가 다 죄인이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하셨고, 바울 또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6:17)라고 했기 때문에 종합하면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갚아야할 빚이 있는 노예란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빚을 의미하는 오페일레마라는 단어가 죄에서 구속받아 천국 가는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그 빚(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나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23~35).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에 관한 비유는 주기도문 중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나오는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또 다른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또 하나의 구원의 방법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누군가를 용서해 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 해 주신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아마 수도 없는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2절의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알고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용서하며 살 수밖에 없고 사소한 것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임금에게서 값없이 받은 용서의 은혜, 즉 임금에게 졌던 일만 달란트의 빚(죄)은 도대체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 것일까?

20만년의 품삯.

예수님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이었다. 그리고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6,000×10,000 = 60,000,000 이므로 6천만 일이나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년으로 환산하면 1년은 365일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안식일이나 기타 휴일을 제외해야 함으로 아무리 잘 잡아줘도 일 년은 300일 정도 일 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다시 60,000,000 ÷ 300 하면 200,000 년, 즉 일만 달란트는 이십 만년이나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며 이십 만년 동안이나 일 해서 돈을 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기껏해야 100여년 남짓하게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의미는 명백하다.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 죄 값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구속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라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노아(창6:9)와 아브라함(약2:21), 기생 라합(약2:25),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1:19)과 아리마대 사람이며 공회원이었던 요셉(눅23:50), 그리고 백부장 고넬료(행10:22) 등과 같이 직접적이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의인이라 칭한 사람들이 있고, 에녹(창5:24), 욥(겔14:14), 다니엘(겔14:20) 등 의미적으로 의인이라 칭한 사람도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인으로 거론되기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잠17:15, 사5:23, 45:25, 눅18:14, 행13:39, 롬3:24, 26, 4:2, 5:1, 9, 18, 8:30, 33, 고전6:11, 갈2:16, 딛3:7).

그러나 이와 같은 구절들은 잘 분석해 보면,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악인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의인이라 하거나, 믿는 자에 대한 칭의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의인이라 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써 구속자가 필요한 것이다.

② 구속사적 해석.

앞에서는 ‘구속’이란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속사적 해석의 실 예를 통해서 박윤식 목사의 책이 왜 잘못된 책인지 살펴보자.

성경에서 의인이라 했던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명이 노아이다. 그래서 박윤식 목사와 같이 노아를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족장, 혹은 믿음의 영웅이란 측면에서 그를 보게 되면 그는 본받아야할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로웠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오해할 가능성까지 있게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6장을 보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다 타락하고 부패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까지 한탄하실 정도였지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9)고 하면서 그를 의인이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그 의를 보시고 방주를 짓게 하여 그를 구원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다 홍수로 멸망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의 해석은 행위구원과 같은 방식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 영광을 가로챈 것과 같은 방식,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인간 노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같은 잘못된 해석이다.

뿐만 아니다. 이것은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범적 해석으로써 단편적 해석이며, 원자적 해석이고, 전기적 설교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해석은 구속사적 성경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성경의 사상과도 완전히 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구속사적 해석인가?.

구속사적 해석은 그가 의인이 된 것은 ‘그가 의로웠다’라기보다 그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성경에서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9)고 하면서 그를 칭찬하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8~9)는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아가 의롭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강조해야할 것은 노아가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 의를 기초로 해서 구원 받았다고 하며 그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노아로 하여금 의롭게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 6장을 잘 살펴보면 당시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를 잘 밝혀주고 있다. 온 세상에는 죄가 가득 했고, 사람들의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항상 다 악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으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며 모두 다 쓸어버리실 계획까지 세우셨다고 하셨을까?

그러므로 성경의 이와 같은 표현은 노아든 누구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었다는 것이며, 그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는 말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이 말씀은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었다’라는 문장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었다’는 말은 ‘그러나’라는 반의어적 접속사가 잘 나타내고 있듯이 앞에 있는 주장들을 뒤집는 것으로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었지만 노아만은 예외로 ‘죄인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는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하는 것으로써 노아가 비록 죄인이었고 멸망당해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또한 근본적으로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은혜’라는 단어만 생각해 봐도 잘 알 수가 있다.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무언가를 해 놓고 마땅히 그 댓가로 당당하게 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지만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의 결과로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9)는 말씀만 보고 노아가 선택받고 구원 받은 것이 그가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면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구속사적 해석이 되려면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렇게만 보면 성경 전체를 통해 증거 되고 있는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하나의 역사와 하나의 계시로 보며,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인물들을 그 계시의 역사 속에서 구속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보는 구속사적 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이 구속사적 해석인가?.

이것이 구속사적 해석이 되려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을 약속 하셨다. 그 여인의 후손은 물론 신약에서 여인의 후손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노아 당시에 그 언약은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탄식할 정도로 세상이 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쓸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의 신실하신 약속은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실하신 약속을 지키고자 한 사람 노아를 선택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방주를 짓게 하심으로 인류를 보존하시고,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게 된 것이며, 이런 입장에서 보면 노아 또한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를 입게 되어 구원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며 그분을 보내신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다.

(전) 전주시 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장.
호 로고스 성경연구원.
한 창 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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