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오판을 되풀이할것인가?

맥아더의 오판을 되풀이할것인가?

복음제일교회 0 2,028 2021.01.24 23:30

맥아더의 오판을 되풀이할것인가?

전 국회의원(15,16,17대), 변호사
BY : 신기남 | 2011.01.13 | 덧글수(15) | 트랙백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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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더 이상 적국이 아니다

   1. ‘가장 추웠던 겨울’

 퓰리처상을 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2007년에 썼고 한국어 번역판이 2009년에 나온 책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영어 원제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정윤미 이은진 역)’를 읽었다.

미국군인 4만 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10만 여명이 부상했으면서도 미국인 사이에 ‘잊혀진 전쟁’(클레이 블래어가 1987년에 쓴 책의 제목)으로 불렸던 한국전쟁에 대하여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상세하게 쓴 책은 찾기 힘들다.

더욱이 이 책은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저자가 신뢰할만한 양식을 바탕으로 매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냉철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분석했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더 크다.

 우리 한국인 자신은 한국전쟁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각자가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처지에 따라서 편한 대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희미한 기억 속에 그 때의 진실을 잊어가고 있다.

어쩌면 본질은 소용돌이의 내부에서보다 한 발 떨어진 외부에서 들여다 볼 때 더 잘 파악되는지도 모른다.

60년 전 그 전쟁의 후유증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우리 자신보다도 오히려 이 외국의 세심한 저널리스트가 그 비밀의 터널 속에 더 밝은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이 책을 읽는 중에 들었다.

그 동안 한국전쟁에 대해 나름대로 품고 있던 생각들을 재정리하면서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그 역사의 불빛에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쓰라린 과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명한 새 역사를 풀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60년 전 바로 이 땅에서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채 끝을 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주변 상황이 많이 변화한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여전히 전쟁 재발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으며, 주위 강대국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놓고 계산이 분주하다.

남과 북이 번갈아 가면서 상대를 향해 엄포를 놓으면 주변국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훈수를 놓는다.

고의에 의해서든 우발적이든 전쟁은 하시라도 가능하다.

민중은 위기에 만성이 되어서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게 살아간다.

나는 이 책 속에서 60년 전 그 전쟁을 할 때 사람들의 생각과 심리상태를 눈여겨보았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들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할 수도 있었고 안할 수도 있었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심리상태에 이끌려 백해무익한 전쟁으로 돌입한 경우가 무척 많았다.

일단 시작한 후에도 현명하게 타협을 하는 대신에 고집을 부려 희생을 키우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민족의 그 전쟁은 어떠했는가?

그 시절 사람들, 특히 사회 지배층의 착각과 오판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지금 그 때와 유사점이 많은 이 상황에서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할 것인가?
가장 추웠던 겨울을 다시 맞이할 것인가?

   

2. 오판

  

무릇 전쟁으로 돌입하는 집단은 오판을 하고서 하는 것이다.

첫째,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과 상대 능력에 대한 경시, 즉 자만심이다.

둘째, 주위 환경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다는 일방적인 계산, 즉 착각이다.

이러한 자만과 착각으로 무장하고 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잘될 것이라는 희망(때로는 확신내지 믿음)을 품는다.

그 희망과 믿음에 들떠서 곧 이어 다가올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지도자들과 언론은 애국심을 부추기고 민중들은 환호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호성은 비탄의 곡성으로 변한다.

애초에 이런 것을 다 감안하고서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데 인간의 심리는 그렇지가 못한가 보다.

 핼버스탬은 ‘가장 추웠던 겨울’을 통해서,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정치가들과 군 지휘관들, 그리고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의 통치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어떠한 오판들을 하고 있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오판의 결과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코 흘러간 옛날얘기일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의 얘기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오판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3. 세계 1차대전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거나, 설사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렇게 총체적인 대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아도 되었을 전쟁의 비근한 예로 세계 1차대전(1914년-1918년)을 들 수 있다.

미증유의 세계전쟁의 시초가 되었던 세계 1차대전은 강대국들의 황제들과 장군들의 오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기에 이른 경위에 대해서는,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바바라 터크먼(Babara Tuchman)이 1962년에 쓴 책 ‘8월의 포성(원제 The Guns of August 이원근 2007년 역)’에 더없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독일의 빌헬름2세는 독일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어떤 나라라도 단시일 내에 격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요제프 황제는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보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에 세르비아가 관련 있다는 아무 증거가 없고 세르비아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유화적 태도를 충분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요제프황제는 범게르만주의에 입각해 독일이 개입해줄 것이라 믿었고, 유럽의 영원한 패자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던 빌헬름2세는 어김없이 이 기대에 부응하였다.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는 범슬라브주의에 입각해 세르비아를 지원하며 유사시에 전쟁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프랑스는 1870년의 보불전쟁 패배로 잃어버린 알사스로렌 지역을 회복할 열망에서 독일과의 일전을 불사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미리 군사동맹조약을 맺고 독일에 대비했으며, 독일이 감히 두 나라를 상대로 동서 양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국은 이리저리 셈을 하다가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도버해협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대독전선에 합류하였다.

그 밖에 여러 크고 작은 세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측 중 어느 한쪽에 붙음으로써 어언간 세계대전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각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가 자기네 편이 쉽게 이기리라고 예상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대 군사강국 독일은 단 6주 만에 프랑스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한 다음에 군대를 동쪽으로 돌려 다시 러시아를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옛 프러시아 군대의 용맹한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자부하는 독일군 장교들이 설정해 놓았던 소위 ‘슐리펜계획’의 도상계산이었다.

그러나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같이, 대프랑스 서부전선은 6주는커녕 4년간 그야말로 이상이 없이 참호 선을 따라 그 자리에 고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백만 명이 허무히 죽어 갔을 뿐.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2세도 예비군을 동원하면 600만 명에 이를 수 있는 대군과 대대로 왕실을 보호해 준 수호신이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프랑스도 150만의 대군을 동원해 놓고 승리감에 미리 도취하여 국민 모두가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축제의 분위기 속에 전쟁으로 뛰어 들었다.

결국 각자의 이러한 믿음, 기대, 예측들은 철저히 배신 받는 결과가 되었다.

4년을 끈 전쟁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 없이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년이 흐른 후 통치자들과 지휘관들은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더 큰 전쟁을 일으켰다. 세계 2차대전이었다.

두 번의 끔찍한 전쟁을 치른 후에야 유럽인들은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각성을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날아가 피어날 곳은 세상에 많이 있었다.
욕심에서 파생되는 오판은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4. 침략자들의 오판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의 강점 아래 있다가 가까스로 놓여난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이 되어 불안한 대치상태에 있던 남한과 북한은 평화로운 통합 대신에 전쟁이라는 파국을 선택했다.

이 한국전쟁의 침략자는 명백히 북한정권이었다.

북한이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았고 소련과 중국이 강력히 뒷받침을 한 3자 합작품이었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그것이 남한의 북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 때는 남한 내에서조차 그 주장에 편승하는 이들이 있기도 했으나, 이제 비밀이 없어진 세상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자는 북한정권말고는 없다.

김일성은 1945년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앉혀지자마자, 남한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한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미국과의 충돌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남북한에 각기 별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이르러, 김일성은 군대를 증강 시키면서 모스크바를 수차례 방문하여 전쟁을 허가해 달라고 스탈린을 압박했다.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 측이 승리를 거두어 중국 본토 전체가 공산화되자, 다음 차례는 한반도가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3국 사이에 형성되어 갔다.

특히 김일성은, 자신이 마오쩌둥보다도 먼저 아시아의 공산국 수반으로 올라선 사람인데 정작 통일국가의 지도자 자리는 마오쩌둥에게 선두를 빼앗긴 데 대해 일종의 질투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 빨리 한반도를 통일하여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었다.

1949년 말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회동에서 양자가 처음으로 김일성의 전쟁계획에 대해 협의를 했고, 마오쩌둥은 아직까지는 종주국의 위치에 있던 소련이 권유하는 대로 유사시 김일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제거된 듯이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바로 그 유명한 ‘애치슨 선언’이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이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한 연설 중에서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은 애치슨의 개인적 무지내지 부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실언에 불과했으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다는 점이 전쟁 발발 후 미국 정부가 보여준 단호한 군사조치에서 드러났지만, 그 당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침략자들에게는 실로 크나큰 고무가 되었다.

만약 애치슨이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그 해 한국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치슨의 연설이 있은 지 18일 후인 1월 30일 스탈린은 평양의 점령군 사령관 격인 스티코프 장군에게 “남침을 지원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하라고 타전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일성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개입 의사가 있더라도 본국에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려면 몇 개월이 걸릴텐데 전쟁은 3주 내에 끝날 것이므로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논지로 소중 양국을 설득하고 있던 참인데, 애치슨 발언은 김일성의 위대한(?) 예지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셈이 되었다.

1950년 4월 북한 수상 김일성과 남한 노동당 지도자 박헌영은 보름간 일정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세 번 만났다.

5월 13일에는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비밀회담이 있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김일성 특유의 낙관론에 빠져 들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패배에 직면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그를 구하려고 군사개입을 하지 않았던 전례를 보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대를 했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둥은 혹시 미국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입장이었고, 그렇게 될 경우 중국군울 파병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히려 김일성이 중국군 지원이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마오쩌둥에게 거만하게 행동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몇 개월 후인 그 해 10월 평양을 뺏기고 패주하여 마오쩌둥 앞에서 애걸복걸하게 될 모습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적극 지원했다.

소련은 2차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가 세계 최고의 전차라고 감탄해 마지않던 T-34 탱크 150대와 미그기 100대를 비롯한 최신 무기를 지원했다.

미군이 남한에 배치한 대탱크 무기인 2.36인치 바츄카포로는 T-34 탱크를 관통하지 못했고, 전쟁 발발 후에 긴급히 들여온 신형 3.5인치 바츄카포를 가지고서야 대항이 가능했다.

중국은 대륙의 항일전선에서 단련된 노련한 한국인 병사 4만5천 명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켜서 전선에 투입하게 했다.

전쟁 초기에 이들은 우세한 전투력으로 한국군과 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또한 중국은 만약의 경우 미국이 개입하여 북진해 올 것에 대비하여 만주지역에 30만 명을 대기시켰다.

결국 김일성의 오판에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동승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의 오판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북한군은 남한군에 비해 월등히 우세할 뿐만 아니라, 남한 정부는 민심을 잃어서 북한군이 밀고 들어가면 안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을 것이므로 3주 안에 완전 평정이 된다는 것.

둘째, 미국은 결코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

첫 번째 오판은 절반쯤 틀렸고, 두 번째 오판은 완전히 틀렸다.

남한군은 열세에 몰리면서도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훗날 반격을 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소련에 의해 점지된 생경한 지도자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남쪽의 인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고, 남침에 대한 내부 호응도 생각만큼 열렬하지 못했다.

미국은 새로운 라이벌로 떠오른 소련의 사주를 받은 침략에 분개하며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국의 반응은 신속단호했다.

개전 당일에 일본 주둔 해공군의 지원을 결정하고, 3일 만에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결정을 끌어냈으며, 5일 만에 미국 본토에서 지상군을 파병하여 전면 개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3주 평정을 호언하던 전쟁이 3년을 끌게 되었다.

그러고서도 영토의 변화는 거의 없이 결국 원래 있었던 38선 부근을 경계로 한 채 휴전을 했다.

그 사이 한반도는 폐허로 변하고 동족 간의 증오만 남게 되었다.

 

5. 맥아더의 오판

 

침략자들의 이러한 판단과 의도가 장막 뒤에 감추어진 상태에서 방어자인 대한민국과 미국은 어떠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가?

특히 당시 미군의 총책임자로서 태평양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er) 장군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한마디로 오판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북한의 전면 남침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은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 했고 남한군의 전력은 과대평가 했다.

비록 미국 지상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지만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있고, 지척인 일본에 맥아더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감히 전면전을 벌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소련이나 중국이 미국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북한을 도와 전쟁에 참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툭하면 북진통일론을 되뇌고 있어서 미국은 오히려 남한이 전쟁을 일으킬까봐 걱정을 하는 형편이었다.

남한의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쟁이 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고 호언하기도 했다.

맥아더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가끔씩 북한 측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우려하는 정보를 올렸음에도, 자기 직속 정보참모인 윌로비 준장이 올리는 낙관적인 정보에만 의지한 채 안일한 자세로 일본 동경에서의 ‘점령국 황제’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발발 직후 상황을 물어오는 워싱턴 당국에게 “북한의 단순한 정찰병력일 겁니다. 등 뒤에 한 손을 묶은 채로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대한민국의 오판보다는 맥아더 장군의 오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차피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만의 전쟁이 아니었고 미국, 소련, 중국이 한 데 어우러진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태평양 사령관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판단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맥아더는 심한 착각 속에서 중대한 오판을 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사실 맥아더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는 실상에 비해 너무 과대포장 되어 알려져 있다.

그의 성장과 출세의 과정, 성격과 인격, 군 생활,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과 등등을 자세히 알고나면 그에 관한 신화는 상당히 퇴색할 것이다.

맥아더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때부터 장교로 활약하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여 필리핀을 미국 영토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후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을 지낸 성공한 군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남편보다 더 훌륭한 장군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맹렬여성이었다.

맥아더의 출세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의 성과물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맥아더 본인의 영민한 두뇌와 성실성이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부모의 도움과 영향이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맥아더의 유아독존적 성격은 많은 갈등과 부작용을 수반했다.

그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가의 기질이 많았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대한 목표도 가졌다고 본다.

그는 자신이 워싱턴과 링컨의 대를 잇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모두 무능하고 부패하여 믿을 만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는 2차대전 후 일본에 주둔해 있을 때에는 엄연한 군통수권자인 트루먼(Truman) 대통령까지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일쑤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황을 논의하기 위해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을 만났을 때는 대통령에게 경례도 하지 않음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맥아더는 일찍이 태평양 전쟁에서도 미군 태평양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능력을 과소평가 했고 취약한 지휘계통으로 진주만 공습을 방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포위되었을 때 부하들을 놔두고 홀로 호주로 탈출하는 치욕을 감행했다.

뒤에 남은 부하들은 항복을 하고 7만 명이 포로가 되어 잔혹한 대우로 2만 명이 죽는 비극을 초래했다.

비록 나중에 본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펴서 그 유명한 징검다리 작전으로 태평양을 수복하긴 했지만 맥아더의 위신은 상당히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이미 70세의 고령으로서 건강이 좋지 않아 집중력이 부족하고 기운이 쇠락했으며 파킨슨병의 증세도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의 오판은 두 가지 면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 번째가 ‘방심의 오판’이었다면, 두 번째는 ‘과잉의 오판’이었다고 할 만하다.

첫 번째 오판은 자신에 대한 과신과 상대에 대한 멸시였다.

그는 북한군의 능력을 형편없이 과소평가 했음은 물론이고, 그 배후에 있는 소련과 중국의 의도나 능력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위에서 잠깐 살펴본 것같이, 상대 쪽 움직임에 대한 사전정보도 부족하여 개전 이전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개전 직후에 응전하는 데도 무능했다.

그는 일본통치에만 신경을 썼고 한반도에 대해서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가 지휘하고 있던 태평양 사령부는 전반적으로 무사안일에 젖어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습남침을 당했고, 그 후 대응책도 허술하기 이를 데 없어 패배를 거듭하며 후퇴만 했다.

일본에서 급파한 불과 2개 연대 병력의 미군은 북한 인민군을 얕잡아 보고 덤비다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수적으로도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미군은 전투경험이 없는 서투른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던 반면 인민군은 중국 내전에서 단련되어 노련할 뿐만 아니라 사기마저 월등했기 때문이다.

서울을 빼앗기던 날인 그 해 6월 27일 아침 일본 동경에서 본 맥아더의 얼굴 표정은 지극히 기가 죽고 절망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미군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은 큰코다친 후에 부랴부랴 본국에서 제대로 된 병력과 물자가 투입된 이후였다.

개전 석 달 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가 반전되고 나서야 맥아더의 구겨진 위신이 살아났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모한 계획이라고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맥아더는 특유의 배짱으로 밀어붙였다.

그 무모하게 보였던 작전이 성공하기에 이른 것은 미국의 국력을 기울인 대규모 지원과 함께 김일성 군대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행운도 한 몫을 했다.

북한군은 전쟁의 조기종료를 목표로 너무 서두르느라 후방 방위를 소홀히 했다.

중국 측에서 미국의 대규모 상륙작전 정보를 가지고 경고를 했으나 북한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군과 한국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북상하게 되어 맥아더의 성가가 회복되는가 했으나, 결국 맥아더의 치명적인 두 번째 오판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오판이 맥아더 자신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전체에 미친 피해가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오판은, 국제정세와 군사정보에 어두워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과도한 북진을 시도하다가 중국군의 참전을 초래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중국의 힘을 과소평가 하여, 어떤 경우라도 중국이 감히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설사 개입한다 하더라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중국이 참전한다면 그것은 공산진영에 빼앗긴 중국 본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개전 전부터 마오쩌둥은 미국이 개입하여 38선 너머로 북진한다면 중국군이 나설 것이라는 언질을 김일성에게 주었고, 실제로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오자 만주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국군의 파병준비가 진행되었다.

훗날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외국의 외교관이 묻는 데 대하여 중국 고위 당국자는 “중국인 수백만 명이 죽을 것이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을 감수할 각오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더욱이 북한군 남침 직후 맥아더가 대만의 장제스 군대를 한반도에 파병하여 싸우게 한다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뜻으로 미7함대를 대만해협에 보내어 무력시위를 하였는데, 이것을 지켜 본 마오쩌둥은 때가 오면 중국 지상군을 동원하여 미군에 맞설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 장소를 한반도로 삼기로 했다.

마오쩌둥은 미 극동군과 일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9월 30일 한국군 제2사단이, 10월 7일 미군 제1기병사단이 각각 38선을 넘었다.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한국군이, 10월 20일 미군이 각각 평양에 입성했다.

이제 한반도는 통일이 되고 미군 병사들은 귀향하게 될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맥아더 휘하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탄약이 많이 남았으니 탄약을 적재한 군함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이를 승인하여 그 군함 여섯 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한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바로 그 날 10월 19일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은 아무도 모르는 중에 이루어졌다.

맥아더는 미군이 순조롭게 북진하여 곧 압록강에 도달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병사들이 고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38선 돌파는 워싱턴 당국의 공식명령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여기에는 맥아더의 강력한 주장이 주효했던 것이다.

워싱턴 당국은 맥아더에게 “38선을 넘되 소련과 중국에 맞서 더 큰 전쟁에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조차 우습게 보고 있던 맥아더는 워싱턴 당국의 그런 소극적 태도는 안중에도 없었고 하루 빨리 한국전쟁의 완전한 승자가 되고 싶은 일념에 차 있었다.

워싱턴의 고위 참모들은, UN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내쳐서 국경 인접지역인 운산으로 진격하려 하자, 중국군의 개입 위험이 있으니 너무 북상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맥아더는 아시아에 관한 한 자신이 전문가라고 하면서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만약 중국이 참전한다면 그들은 역사상 최대의 참사를 겪게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연합군은 하루 빨리 압록강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서둘러 진군했다.

그러다가 중국군이 산악지역에 미리 쳐 놓은 호리병식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한국군의 한 부대(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1사단 제15연대)가 기어코 압록강에 도달하긴 했으나, 바로 그 날 10월 25일 최초로 중국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운산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운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주력부대는 아직도 중국군의 개입을 수긍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11월 1일 밤중에 중국군의 총공격을 받고 미군은 괴멸상태에 빠지게 된다.

운산전투는 2차대전의 승리자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품고 있던 미군이 처절하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였다.

맥아더가 한껏 깔보고 있었던 중국군의 전술과 전투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미군은 처음 당하는 중국식 전투방식에 당황하여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들은 몇 개월이 지난 1951년 2월 중부전선의 지평리전투에 가서야 비로소 중국군의 전술에 익숙해져서 제대로 대응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평이다.

일단 중국군이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되자 세계 최강의 군대라고 자부하던 미군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원래 맥아더는 일종의 백인우월사상에 젖어서 아시아인의 전투능력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단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쟁능력만은 예외라고 보았다.

당시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의 인식도 비슷했다.

1905년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통해 한반도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데 기여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도 모든 아시아인은 열등민족이지만 일본인만은 준서구인의 자격이 있다고 보았으니까.

그런 열등민족에게 패퇴를 거듭하는 맥아더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여기서 자존심이 상한 맥아더의 복수심은 불타올랐고 그로 인해 후에 또 다른 갈등에 다다르게 된다.

연합군은 지리멸렬 후퇴를 거듭하여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다.

1951년 1월 무렵 워싱턴 당국은 한국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UN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로 이전하는 비상수단을 극비리에 강구하기까지 이르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미국은 전력을 기울여 반격을 펴서 최소한 전쟁 이전의 수준까지는 회복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자존심이 걸린 최소한의 요구였다.

마침 중국군도 37도 선까지 남하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여러 가지 고려를 했을 것이다.

그 후 치열한 교전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대체로 전쟁 전 수준을 유지하는 선에서 전선을 교착시킨 채 길고 긴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비견할 ‘중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한국전쟁 소설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6. 그 후의 맥아더 – 실현되지 아니한 제3의 오판

 

맥아더의 영욕에 찬 긴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은 마지막 피날레였다.

이미 군인으로서는 노쇠해진 그는 이 전쟁에서 큰 오판을 했다.

개전 전의 나태한 방임과 개전 후의 무모한 강공이 그것이다.

모두가 지나친 낙관과 무책임이 가져온 결과였다.

물론 두 가지 오판의 그림자 사이에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맥아더다운 반짝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오판의 그늘은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맥아더의 그 후 행보는 결코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이어 가고자 더 힘을 내어 투쟁했으나 시대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복잡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UN군 총사령관의 지위에 남아 있으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러나 중국군에게 참패하여 후퇴를 한 이래 맥아더의 명성은 이미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다시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대등한 전세를 유지하게 된 데는 미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Mattuew Ridgway) 장군의 공이 컸다.

리지웨이는 2차대전 때 유럽전선에서 공수부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고, 한국전쟁에서 연합군이 한창 밀리고 있던 때인 1951년 1월 미8군 사령관으로 한반도에 와서 주도면밀한 작전으로 전세를 만회하여 그 해 2월 서울을 수복한 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이다.

리지웨이의 빛나는 전과는 맥아더의 질투를 사기도 해서, 기자들이 맥아더에게 리지웨이의 전과에 대해 물었을 때 맥아더는 그것이 다 자신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사실과 다른 대답을 한 적도 있었다.

맥아더는 계속 오판상태에 머무른 채 자신의 판단을 실현시켜 보려고 했다.

말하자면 제3의 오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만은 워싱턴 당국에 의해 제동이 걸렸고 결국 맥아더는 군복을 벗기에 이른다.

그의 또 다른 오판이 미처 이 한반도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맥아더의 실현되지 아니한 제3의 오판은 바로 중국본토 정벌이었다.

그렇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세계전쟁으로 확대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맥아더 개인의 중국에 대한 복수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다분히 작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은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 십자군전쟁이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UN군을 투입하여 중국의 도시들을 폭격하고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항구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

맥아더가 전쟁을 확대할 생각을 가지고 기회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 1951년 1월말 경에 이르러 워싱턴 당국에 분명히 알려졌다.

미국의 국가안보국이 해외에서 도청한 정보를 통해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하고 말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사실이 밝혀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보고를 받고 “이런 매국노가 있나!”하고 외치면서 책상을 두드리며 분개했다.

또한 맥아더가 트루먼 정부를 공격하는 공화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공화당은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대해 유화정책을 쓴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공화당 대표와 맥아더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 여기에 대만의 장제스 군대를 투입하는 데 서로 공감했다.

맥아더는 대통령을 공격하는 정치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2차대전 이후의 경제불황과 냉전 분위기 속에서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한국전쟁 발발같은 일련의 사태를 대하며 강경 반공산주의 경향이 일고 있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극우반공주의의 광풍 속으로 몰고 갔던 ‘매카시즘’이 그 예이다.

매카시(MaCarthy)상원의원이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정계, 군, 언론계, 예술계에 이르기까지 아무나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쫓아내는 마녀사냥이 진행되었다.

매카시의 공세는 결국 아무 실체가 없는 선동주의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지지를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지만, 한 때 미국사회를 큰 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 사실이다.

맥아더의 극우 반공주의는 개인적 성향과 아울러 그러한 정치적 분위기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라 실제로 전장에서 막대한 군대를 움직이고 있는 실력자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을 상관으로 여기지 않는 독불장군이기에 더욱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맥아더가 꿈꾸는 것은 나뽈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연상케 했다. 그는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영국의 군사학자 헤이스팅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맥아더의 오만과 과신은 도가 지나쳤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는 이유로 중국군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가 중국군에게 얼마나 이득이 되었는지 이루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트루먼대통령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워싱턴 고위 참모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극동지역 UN연합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미8군 사령관으로서 이미 전쟁을 사실상 진두지휘하고 있던 리지웨이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본국 송환 직후에는 미국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동정도 많이 받았다.

미 의회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거기까지였다.

의회 청문회를 거치면서 그의 경력에 쌓여있던 과오가 하나씩 드러나자 그는 궁지에 몰렸다.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던 사실과, 중국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소련이 보일 반응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일반에게 공개되자,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금이 가고 인기는 식어갔다.

대책 없는 모험주의자의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청문회 결과는 트루먼의 승리였고 맥아더 해임은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맥아더가 어떤 사상을 가졌든지 그것은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그 실현무대로 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의 최후의 오판이 시도되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하겠다.

 

7. 오늘의 교훈 – 극우파의 오판을 경계함

  

침략자들의 오판으로 시작되고 방어자들의 오판으로 확대 연장되었던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내고서야 겨우 휴전이 되었다.

그러고서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같은 민족끼리 각자 외세를 등에 업고 싸운 업보가 쓰라린 고통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또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도 많다.

남북 간의 응어리 진 감정이 그렇고 우리 민족을 둘러싼 외세의 세력분포가 그렇다.

강대국들의 포진 한가운데에 위치한 우리의 지정학적 구도는 100년 전 구한말 때나 한국전쟁 때나 지금 이 시대나 숙명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국권을 강탈당했을 때나 민족끼리 전쟁을 했던 때의 쓰라린 경험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매한 짓이고, 그런 민족에겐 다시 그런 굴욕의 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

오늘 중국이나 러시아는 다시는 그러한 무모한 침략자 역할을 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한 전제하에 북한도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리라고들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만이 아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 버티어 나가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는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민족통일이다.

외세의 세력균형 틈에서 현재 수준의 평화를 이어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외세의 균형을 선용하여 우리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수행으로 통일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비뚤어진 민족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우리 대한민국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민족 앞에 밀려오는 파도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갑자기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극우파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국내정치의 극우파도 문제이지만, 특히 대북관계를 포함한 외교정책에서의 극우파는 정말 우려스럽다.

북한붕괴론을 내세우며 일전불사까지 외치는 것을 보면 위태롭기 그지없다.

현명함과 냉철함을 저버리고 감정과 이즘에 빠져 있다.

더구나 북한을 두둔한다는 이유를 들어 중국에 대한 비난에 열을 올리는 현상이 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같은 행동이라 하겠다.

얼마 전 어느 극우집단의 정기간행물에서 ‘중국은 우리의 적국이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린 것을 보았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우리의 적국이었고 그 후에도 줄곧 북한의 배후역할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영원한 적국임을 잊지 말자는 경고를 하는 글이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한심하다 못해 위험한 수준이다.

그런 생각으로는 통일은커녕 국제사회에서 생존하지도 못할 것이다.

중국은 이 시점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한 중국에 대해 우리는 정확한 인식을 해야만 한다.

중국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보를 예측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중국에게도 한반도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그래 왔다.

중국이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 출병한 것이나 20세기 말 청일전쟁을 한반도에서 벌인 것은 다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참전한 것도 그 역사적 맥락이 적용된 또 하나의 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58년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순망치한’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중국은 북한을 그냥 버릴 수 없다.

왜냐? 잠재적인 적대세력이 코 앞에 와 닿는 것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의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익과 필요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중국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한 단둥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단둥은 중국과 북한의 교류 관문이다.

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북한 음식점도 여럿 있다.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건너편 북한의 신의주 쪽으로 바짝 접근하면 그 쪽 사람들과 얘기도 할 수 있다.

그곳에 매우 인상적인 장소가 있었으니, ‘중국-조선 항미전쟁 기념관’이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모아 세계 최강 국가와 싸워서 이겼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아주 큰 시설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혈맹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그리 쉽게 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근 6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단순히 혈맹의식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제는 안보 측면이 훨씬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다.

중국이 골칫덩이 북한을 한사코 싸고도는 것은 한반도가 미일 세력의 대륙을 향한 교두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서는 중국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중국이 변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은 그만큼 어렵다.

이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서 대중국 외교를 펴야 한다.

물론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연미봉중(聯美封中)으로 비쳐서는 안된다.

북한을 정신 차리게 한다고 해서 서해에 미국 항공모함을 띄우고 합동군사훈련을 하면 그것이 단순히 북한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고 여기겠는가?

또 일본과 해상 합동군사훈련을 벌인다면 그것은 연일항중(聯日抗中)으로 비쳐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설정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 해 400억불의 흑자를 내는 무역을 더불어 할 수 있으며, 북한이 대화전선으로 나오도록 압력을 넣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는가?

요즘 한일 국방장관회담이 열리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가 새삼스레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남북관계 추락과 한중관계 경색을 계기 삼아 대두되는 것이 걱정스럽다.

60년 된  ’한미일 VS 북중러’라는 낡은 구도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그래야 새 시대가 온다.

새로운 구상을 하는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의 외교는 실용외교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어느 한 쪽으로 너무 몰입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고 위험하다.

맥아더는 북한에 대한 멸시, 중국에 대한 적개심,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밀어 붙이다가 한국전쟁에서 실패했다.

우리는 지금의 통일과 평화를 향한 외교전쟁에서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된다.

맥아더의 실현되지 아니한 제3의 오판과 맥을 같이 하는 극우파의 모험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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