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성경의 사회복지와 기독교사회복지
교회사회사업을 어떻게 전개해야 성경적인가 를 고민하면서 앞으로의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고 있었는데, 금번 여름학기를 통하여 새로운 자신감을 갖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이는 농촌 목회의 새로운 대안에 대한 미션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항은 기독교 신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2005년 인구조사 결과 통계청 발표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가야 하는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야하는 시기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겸손하고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바른 길을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
1998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수행한 “한국개신교인의 교회활동과 신앙의식조사” 보고서의 결과를 보면 영적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81,4%).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76.0%). 진리추구보다 교세확장에 더 관심이 있다(71.1%)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69.1%) 봉사 등 사회적 역할을 못하고 있다(62.0%).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점 10가지는 한국교회가 목회 신학적 대안 없이 성장지향주의만을 추구하여 이루어낸 고도성장 이후에 후유증이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교회사회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1. 신약성서에서의 사회복지
세상 논리는 약자보다는 강자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신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인간 사회 속의 고난 받는 약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약소만족 이스라엘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속에도 그러하고 고아와 과부나 나그네를 보호하시는 신명기 법 정신에서도 그러하다. 성서의 하나님은 강대국의 폭정 아래 고난 받는 소수 민족 이스라엘의 고통과 탄식을 보고 들으시는 하나님이다(출 3:7; 신 10:17-19, 15:7-8,11).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파송된 예수의 공생애의 초점도 이 땅의 고난 받는 백성에게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던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식탁교제를 나누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무수히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고난 받는 모든 자들의 구원과 샬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로 나타난다. ‘사회복지’는 이러한 의미에서 신구약성서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예수의 공생애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구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눈물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이 땅에 온전히 구현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핵심 사명이었다. 예수께서 전하셨던 것은 죄와 사탄의 통치세력을 무너뜨리고 공의와 사랑과 평화가 구현되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지상 모든 인간의 구원과 행복과 샬롬을 지향한다. 여기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종교적 이유나 인종차별적 이유도, 성차별적 이유나 체제 이데올로기적 이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특히 약자와 가난한 자와 죄인과 병자와 이방인 등 이 땅의 소외 계층에 주목한다. 하나님의 관심과 긍휼이 일차적으로 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정신에 입각한 기독교 사회복지는 어떤 차별도 예외없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 행위가 되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최우선적인 관심은 이 땅의 ‘잃은 자’, ‘나중된 자’, 고난받는 ‘땅의 백성’을 향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 세계 통치세력인 불의한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세우는 통치권의 교체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통치권의 교체 없는 사회 변혁이나 구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의 통치 세력 아래 있는 인간은 근본적인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인간이요 근본적인 죄 문제 해결이 없는 복지사회 구현은 불가능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는 사회 개혁이나 사회 구원을 부르짖기 이전에 그 사회 구성원들인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죄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고 있다. 예수께서 추구하셨던 사회복지는 이와 같이 인간 내면 깊은 곳의 죄성 극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죄에서 해방된 인간은 새롭게 자기를 찾게 되고, 새롭게 이웃의 고통을 볼 수 있게 된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 사회복지의 길이 언제나 복음전파와 동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의 극복 없는 인간변화는 없고, 인간 변화 없는 사회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시한 사회복지 운동의 길은 철저한 자기희생과 섬김의 길이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순종의 길이다.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회복지의 길은 모든 예수의 제자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고 복음의 명령이요 당위사항이다.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정신으로 무장된 예수의 제자들로 거듭난다. 성령께서 그들 속에 강력히 역사하심으로써 예수의 정신이 최초의 교회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났던 소유공동체 생활상이다. 이것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예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성력의 능력 안에서 소유공동체 현상으로 표출된 것이다(행 4:32-35). 이 현상 속에 내포된 정신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다. 나와 너 사이의 마지막 장벽까지 허물어지고 성령 안에서 온전히 하나 되는 하나님 나라 현상이 단편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성령으로 무장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명을 다하여 예수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했으며, 예수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복음이 전파되었고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치유 받는 성령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사랑과 섬김을 가장 헌신적으로 실천한 두 인물은 욥바의 다비다와 가이사랴의 고넬료이다. 욥바의 다비다(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병으로 죽자 베드로가 찾아가 죽은 다비다를 소생시키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로마 군대 백부장으로 소개되고 있는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인물로 등장한다(행10:2-4).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고넬료가 행한 많은 일들 중에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일은 ‘기도와 구제’라는 점이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은 이 밖에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와 섬김의 직분을 맡은 일곱성도와 유명무명의 수많은 초대교회 봉사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온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최초의 기독교 ‘디아코노스’들이라 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 구원과 사회변혁 내지 사회봉사는 오직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연스럽게 그의 활동의 모든 초점을 복음전파와 인간구원에 맞추고 있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 속에서 새 출발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제시한다. 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법은 약한 자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고(갈6:2),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롬13:9). 참된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요(롬13:10),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참 믿음인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갈5:6).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는 아버지에 의해서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그리스도시다. 아버지의 파송목적은 아들을 통한 인간세상 구원이다. 여기에서 구원이라 함은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포함한 온 세상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인간의 타락은 세상의 타락과 직결되어 있고 인간구원은 세상구원을 포괄한다. 요한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단절된 세상은 흑암과 죄악에 파묻힌 세상이다.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올 수 없고 스스로 변혁되어질 수 없는 철저히 사탄의 지배 아래 떨어진 세상이다.
빛으로, 말씀으로, 생명으로 오신 에수 그리스도의 파송은 세상에서 분열을 일으킨다. 이제까지 흑암이었던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생명과 사망으로, 신앙과 불신앙으로, 진리와 거짓으로, 사랑과 증오로, 위의 것과 아래 것으로 갈라진다. 에수의 오심으로 인하여 세상은 믿음의 결단 앞에 세워지게 된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 속에서 참된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된다.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 들어온 이 빛의 자녀들을 통해서 세상은 어둠에서 빛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게 된다. 빛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이 이러한 세상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진리를 아는 자요 진리를 아는 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다. 실천적인 사랑 안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일 4:16).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전승이 빠진 대신 다른 복음서에 없는 세족전승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승이요 주님으로서 섬김의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신다. 이 메시아적 상징행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섬김의 메시야로 오셨음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신다(요 13:14-15).
고난 받는 이웃을 보고도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이다(요일 4:20).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과 혀로 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요일 3:18).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 것 같은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부여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요 20:21-23).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구속사업을 완성하신 예수는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을 성령으로 무장시켜서 자신이 구원한 그 인간 세상으로 파송하신다(요 20:21).
신약성서 시대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른 행함과 사랑의 실천을 가장 강조한 교회들이 바로 마태의 교회와 야고보의 교회이다. 이 두 교회는 신약성서 시대 유대교의 율법에 기초한 실천 신앙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것을 기독교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자 주님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약 2:17), 믿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다(마 7:24-26, 27). 최후 심판의 기준도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며 고난받는 이웃에게 구체적인 사랑과 섬김을 실천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여부로 나타난다(마 25:31-46). 마태와 야고보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믿음에 합당한 행함과 실천을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요(약 1:22),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사회복지와 목회
교회 안에서는 ‘기독교사회봉사’, 또는 ‘디아코니아’를 사용하고, 교회 밖을 향해서는 여러 가지 편의상 ‘기독교사회복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 보육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사회개혁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예컨대 미신타파,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존중, 축첩제도와 노예제도와 신분계급 타파, 민주주의 사상 고취 등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한 계몽운동을 일으켰다. 특별히 사회복지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나병환자 치유, 장애인 복지, 형정(刑政)개선 등 백성들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선교의 교회중심이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헌신적인 사랑의 돌보심을 그 근본원리로 삼는다.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되 흑암과 혼돈, 그리고 죄악의 세력을 극복하시면서 역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의 역사적 주권은 특히 애굽의 압제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과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서 증거되었다. 이 출애굽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내용은 하나님의 계약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더욱이 구약성경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을 본받아서 자기를 내어주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구현을 지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두 가지 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순수한 말씀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말씀의 실천으로서의 디아코니아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사회복지가 교회 밖의 사회사업과는 구별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 실천에는 항상 함께 복음의 전파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핍을 함께 채워주는 전인적인 섬김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사회봉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범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배와 통치와 권력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비우는 겸손의 행위인 섬김의 정신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며 생명을 살리는 영이시며 생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이 되시는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과 함께하는 사역이셨다. 초대교회가 역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역사하심이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동참하셨으며, 예수께서 승청하신 후에도 그 사역을 지속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하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의 디아코니아도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사랑의 샘이 폭발함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 힘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즉 성령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구현을 위한 복음 선포와 디아코니아 활동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힘을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사회봉사 실천의 실질적인 주체이자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세력으로 나라를 세우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시행하는 일반사회복지는 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디아코니아는 될 수 없다. 기독교 사회봉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랑의 충만함이 넘쳐흘러서 그 힘으로 행하는 사역인 것이다.
바울이 몸이라는 단어를 교회에 적용할 때 그것은 사회단체가 아니고 육체 또는 그리스도 인격의 유기체를 의미한다.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공동생활과 지도자를 가진 단체가 아니고 그 일치는 하나의 육체적 실재이다. 그가 강조하는 개념은 초인간적인 집합체가 아닌 특정한 인격의 유기체의 개념이다. 따라서 불일치는 곧 해체를 의미한다. 에클레시아는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이러한 하나됨은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둘째로 지체간의 돌봄, 섬김, 나눔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3. 결 론
신약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지사회를 지향한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공의와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복지사회를 구현하며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현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복음전파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는 두 축으로 이루어졌듯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이 땅의 모든 교회의 핵심과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요, 사회와 세상 속에서의 사랑과 섬김의 실천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이 최우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과제는 사람을 먼저 변화(거듭남의 체험)시키고 성령의 역사로 사회복지에 참여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짐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질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