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회복지의 신학적 근거

기독교 사회복지의 신학적 근거

복음제일교회 0 1,585 2021.01.23 17:59

 기독교사회복지의 신학적 근거

                                                                                                                        

들어가는 말

   

기도교사회복지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구속된 사람들이 신앙공동체의 안팎에 있는 개인, 가족, 집단, 그리고 지역사회의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복지를 위해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전문적 과정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사회복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동안 병자를 치유하고 불우이웃을 돌보며 사회악과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40)는 말씀에 근거한다. 이러한 근거에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창조한 ‘인간의 존엄성’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사랑’의 가치와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교훈에 따라 교회는 자신의 비움(self empty)과 섬김의 생활로서의 봉사(service), 그리고 인간의 형체를 입은 인간과의 유대(solidarity with the people)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행하는 공동체(Hoekendijk, 1965)로서의 역할을 한다.

현대사회복지의 전문적 지식(knowledge), 기술(skill) 그리고 가치(value)는 이러한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에 기초하여 다양한 현대사회문제에 대처하는 전문적 학문으로써 발전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이후 기독교는 예수의 이러한 이웃사랑(복지)의 실천과 기독교사회복지에 대한 학문적 연구보다 교회선교(Missio Eklesia) 혹은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인 나머지 기독교사회복지의 학문적 근거가 되는 지식, 기술 그리고 가치(철학)를 전문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사회복지의 학문적 근거가 되는 가치와 철학을 조명하기 위해 먼저 사회복지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고, 다음으로 선교와 사회복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사회복지의 신학적 근거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사회복지의 성서적 근거


가.  사회봉사와 사회복지


1) 사회봉사에 대한 성서적 근거


봉사(Diakonia)의 어원은 ‘섬김’이라는 히브리말의 ‘아받’에서 유래했다. 아받은 ‘섬기다’ 즉 ‘종’을 의미하는 ‘에벧’이라는 말이다. 또한 봉사는 ‘종이 된다’(to be a slave)란 의미와 ‘종의 의무를 수행한다’(to be service)는 의미이다. 이 봉사는 종교적 봉사로서 제사장으로서의 의식과 직무를 수행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세속적인 봉사개념의 의미로까지 사용되게 되었다. 종교적인 봉사란 구약에서 레위지파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할 때 성전에서 수종들었고(역상 23:32), 희막집회 때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봉사하였던 경우이다(민 8:19). 세속적인 봉사란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한 경우이다 (창 30:26-29). 그러나 이러한 봉사의 개념은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화되면서 포괄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즉 봉사의 개념이 구약시대의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수평적인 관계의 행동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 20:28)고 말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봉사적인 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또한 유월절 성만찬 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줌으로써(요 13; 5-8), 이 관계는 섬김과 낮은자로서의 겸손의 모범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이라는 예수의 깊은 뜻이었다. 

이러한 형제애에 기초한 봉사는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로서의 선행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혹은 형제애로서의 의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 동안 나병환자, 앉은뱅이, 눈먼 자, 혈루병환자, 정신질환자 등 장애를 입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불상이 여겨 고쳐주었으며, 고아, 의지할 곳 없는 노인 가난한자 억눌린 자 등 사회의 약자들의 대변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었다(눅 4:18-19). 그리고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형제애(눅 10:25-37)의 교훈을 심어주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러한 교훈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40, 롬 13:9)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불우한 이웃을 위한 선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  사회복지


사회복지(social welfare)란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사회복지정책과 필요한 서비스를 통해서 개인의 사회적 역기능(social disfunction)을 예방하고 경감시키기 위한 정부와 민간기관의 체계적이고 조직적 노력이며(ISWC, 1966), 복지국가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적 복지를 실제적으로 책임지는 제도적 실체이다(Girver & Terrell, 1998; Hepworth & Larsen, 1993). 이러한 책임은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책임, 기회균등 그리고 자기결정권이라는 철학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사회복지 이론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광의(廣義)의 개념으로서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제도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하여 사회의 역기능(逆機能)을 예방하고 치유해야한다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협의(俠義)의 개념으로서 고아, 노인, 장애인 등과 같은 생활이 어려운 특수계층에 국한하여 복지서비스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견해이다(Wilensk & Lebeaux, 1965, 119-20). 전자를 제도적(制度的) 모델이라 칭하고 후자를 잔여적(殘餘的) 모델이라고 부른다. 산업이 발달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제도적 모델(Institutional Model)을 복지프로그램으로 도입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에서는 잔여적 모델(Residual Model)을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복지사회를 지향한다. 복지사회의 조건중의 하나는 풍요한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산업화(産業化)이다. 산업화는 국민경제수준을 향상시켜 풍요한 생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산업화는 노인문제, 공해문제, 사회부조리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 시킨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전체국민을 위한 사회복지정책과 프로그램을 통해 산업화과정에서 야기되는 위험을 예방하고 대처해 나가기 위해 제도적 모델로서 사회보장(社會保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복지정책과 프로그램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적인 사회복지철학에 근거하여 사회보장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가치와 철학은 성서(구약, 신약)속에 나타난 봉사와 이웃사랑(복지)에 대한 실천적 이념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3)  사회봉사와 사회복지와의 관계 


기독교사회봉사와 사회복지와의 관계에서 일반자원봉사는 그 기반이 자발성(自發性)과 무보수성(無報酬性)에 근거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의 경우 봉사는 자발성과 무보수성을 넘어서 봉사 자체가 말씀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명령이요 사명에 대한 순종이라는 점에서 정신적인 의무감과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그에 따른 보상으로써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두 봉사에는 봉사자의 봉사동기는 서로 차이가 있을지라도 고아, 장애인, 노인 등 도움을 필요로 한 대상자(client)의 복지를 위한 행위결과는 동일하다. 따라서 양자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 또한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봉사행위는 봉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대상자를 위해서 행해지는 복지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사회봉사와 사회복지와의 관계에서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사회봉사와 사회복지정책과의 관계이다.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은 모든 국민 특히 복지대상자(client)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복지정책인데 반해 사회봉사는 복지대상자의 생활상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행위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봉사는 일반사회봉사에서 취급하지 못한 사회부조리와 사회악을 고발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사회행동을 통해 불우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 평등 및 사회적 책임의 가치를 정부사회복지정책에 반영되도록 자극을 주고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복지학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책임, 기회균등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사회복지의 가치와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가치는 기독교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창조된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은혜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불우이웃에게 형제애를 나누는 봉사이다. 이 봉사는 불상한 사람에게 베푸는 동정행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비움과 섬김으로써 겸허하게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사회복지는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책임을 바탕으로 한 철학에 기초하여 사회복지대상자(client)에게 “사회복지의 증진을 도모하는 행위”(국어사전, 1974, 793)이다. 그리고 기독교사회봉사(diakonia)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인간의 존엄성’의 기독교신앙에 기초하여 형제애를 나누는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사회봉사와 사회복지와의 관계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지라도 가치와 철학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를 동일한 의미로 보고 기술하였다. 


나.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회봉사(복지) 사상


성서적 의미의 ‘사회’란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신앙공동체의 생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사회란 구약시대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족장’들을 중심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출애굽기에 이르러 야훼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집단을 인류의 ‘초기사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사’라는 개념은 ‘섬김’, ‘섬기는 사람’ 또는 ‘종’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용어와 의미는 구약성서에 여러 차례 나온다. 즉 '섬김'은 271번, ‘종’은 800번이나 나온다. 이러한 ‘봉사(섬긴다)’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즉 ‘가난한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이 ‘섬김’ 즉 봉사의 개념은 지금 이 시대의 ‘사회봉사’ 또는 ‘사회복지’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가난한 이웃은 떠돌이(나그네), 과부, 고아 등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성서는 이들의 생활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형제애를 발휘하여 도와줄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복지이념은 계약법전에 잘 나타나 있다. 계약법전은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강력하게 고발하고, 고리대금을 금지하며, 담보에 관한 제 규정을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을 해방해야하며, 노예들을 석방하고, 사회지도층에게 사회불의의 개선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을과 같다.

① 인위적으로 빚어진 불행 때문에 고향을 떠나 아무런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해준 사실이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레 19:34), “너희가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너희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이다”(신 10:19).

② “너희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나는 분노를 터뜰어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며 너희 자식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출 22:22-24).

③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율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즉 가난한자에 돈을 꾸어주었으면,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서는 안되며(출 22:25). 담보로 잡은 겉옷은 해가 저물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출 22: 25-26). 이러한 율법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던 당시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엄한 경고가 되었다.

④ 추수하는 방법과 안식년을 지키는 방법으로 극빈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는 “밭에서 나는 소출은 7년이 되는 해에는 소출을 배어 그 자리에 두어 극빈자들이 먹도록 해야한다”(출 23:10-11). 레위기에는 매년 밭의 네 모퉁이에 있는 곡식은 주인이 베면 안 된다. 이 곡식은 가난한자의 것이기 때문이다(레 19:9-10).

⑤ 신명기에는 빈민의 권리에 관한 내용을 ‘안식년 규정’과 ‘십일조 규정’으로 심화하고 명문화하고 있다. “너희는 3년마다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하라”(신명 14:28-29) 하였다.

⑥ 신명기 15장에는 또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빚을 면제해 주는 해’와 ‘종을 대우하는 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정을 배풀어 가난한 사람들에 필요한 것을 넉넉히 주라고 명하고 있으며, 종들에게는 빚의 면제의 날이 가까워 왔다고 주인에 대해서 앙심을 품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⑦ 이사야서(1: 16-17)에는 악법으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하고 향락과 악을 행하는 고관들과 귀족들에게 선행과 정의로운 삶을 명하고, 고아와 과부에 대한 권익을 되찾고 두둔하라고 명하고 있다. 즉 “너희는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이 1:16-17).

 ⑧ 모든 설교에서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예언자 아모스는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고 압박하는 일에 대해 강한 사회적 정의를 외쳤다(암 4:1)

 ⑨ 예언자들은 부자들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예언자들의 눈에 부자들은 살찐 돼지 같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급하고(렘 5:28), 마음대로 먹고 배부른 살찐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비꼬았다(암 5:11). 아모스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가난한 사람들은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암 4:1, 5:11-13) 이와 같이 아모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압박하는 일에 대해서 강하게 사회적 공의를 외쳤다.

 구약성서의 복지사상은 율법전과 예언자들의 외침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떠돌이, 나그네, 고아, 과부, 날품팔이, 극빈자 등 가난한 자의 생활의 궁핍함을 도와주는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이며 이러한 선행을 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회의 약자들이 정치, 경제, 법률, 문화 등의 사건에 휘말려 억압받거나 억울하게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외치는 사회정의이다. 


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회봉사(복지) 사상


 구약성서의 사회봉사사상은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사상에서 계승ㆍ승화되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주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불상한 네 이웃에게 하는 행위가 곧 내게 하는 것이다.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대에 돌보아주었다”(마 25:31-46) 이것은 심판의 날에 인간 됨됨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겠다는 말을 하고 네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네 영혼을 위해 좋으리라고 했다.


 초대교회와 봉사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자선 사상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꽃을 피운다.

초대 교회 성도의 불우이웃에 대한 봉사는 비록 선교(전도)의 목적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근본은 하나님 나라와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즉 예배(Leiturgia)와 봉사(Diakonia)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한 ’애찬(love feast)'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초대된 대상들은 대체로 기독교 신도들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고아나 과부들을 위로하고 돕는 행사가 많았다(행 6: 1-6). 이러한 이웃에 대한 봉사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교회의 직분인 집사라는 말은 헬라어 봉사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교회의 직분을 맡은 성도들은 모두 봉사자의 사명을 인식하고 선교를 위해 이웃에게 다가갔던 것을 짐작케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모든 교인들에게 봉사활동의 사명이 부과되었다. 교인들에게 부과되었던 봉사활동의 사명은 집사(Diakone)들과 여집사(Diakonisse)들이 전직(全職) 혹은 부직(副職)으로 맡아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교인들에게 돈과 노력을 바치는 것은 천국(天國)가는데 기여하는 일이라고 설교함으로써 복지사업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행위가 의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봉사행위를 신앙생활의 덕목으로 만들었으며, 마침내 봉사활동이 국가의 모든 사회사업을 그 대상영역으로 삼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었다. 예를 들면, 마틴 폰 투르스(Martin von Tours) 주교나 그레고르(Gregor) 대 교황들은 ‘바치는 것’ 헌금이 하나님 앞에 큰 공적이 된다는 종교적 의미부여를 강하게 했던 분들이었다(이삼열, 1992, 92).  또한 구조(救助)가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주는자의 삶은 완전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높임을 받았다.

초대교회 봉사활동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가난한자, 장애인, 노인 등에 대한 개별적인 구제활동은 축소된 반면, 병원이나 빈민구제원 같은 기관들이 설립되어 보다 광범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흔적들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에서 여러 종류의 봉사기관들이 나온다. 즉 행여자숙박소, 사원숙박소, 고아원, 병원, 양로원 등이 언급되고 있다(이삼열, 1992, 93). 이러한 시설에서 교인들은 진정한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승려들의 양로원 노인과 병든자들에 대한 봉사활동은 헌신적이었다. 이러한 봉사활동은 현대사회복지의 초기 역사 자선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세 교회와 자선사업 :  기독교 신앙의 동기에 의해서 발생한 자선사업(philanthropy)은 “궁핍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웃에게 자선을 행한 사람은 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원(修道院, Hospital)이 중심이 되어 학교, 병원, 구빈원(救貧園)을 설립하여 과부, 노인, 병자, 아동 등 광범위한 구제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수도원 운동으로 프란시스코(Franciscan) 운동과 도미니코(Dominican) 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선활동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순수하고 진실된 선행이었지만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가 조직하기 전까지는 수도원의 이러한 선행을 많은 사람들이 악용하여 수도원을 배회한 많은 걸식자들을 양산한 걸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 중요한 자선사업의 형태는 신도 상호간의 상호부조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신자를 방문하고 석방운동을 전개하고 또 고아와 기아 등 생존권의 보호에도 힘썼다. 중요 자선사업기관으로서는 사원숙박소, 구빈원, 수도원, 십자군, 기사단, 공익전당포 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사원숙박소와 구빈원은 그 대표적인 기관이다.

사원숙박소는 교회 또는 수도원에 소속되어 주요한 교통로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로 행여자들의 숙박소의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고아, 과부, 노인, 병든 사람, 빈곤한 사람 및 여행하는 사람들의 수용시설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구빈원은 초기에는 수도원에 부설된 숙박소로서 순례자의 접대 장소였으나 후에 노약자, 병자, 고아, 과부들에 대한 구제시설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기능의 전문화로 15세기에는 정신병원, 롱아교육원(聾啞敎育院) 등의 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선활동은 선교에 그 근본적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는 봉사활동을 신앙생활의 덕목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모든 교인이 이 일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중세기 자선사업이 남겨놓은 광범위한 빈민구제시설과 병자치료시설은 후에 사회복지사업의 모태가 되었다.  


라.  성서를 통해서 본 예수의 복지사상


예수의 복지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가난한 자, 병든자들에 대 한 치유요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권익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복지사상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아, 노인, 장애인에 대한 권리옹호와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한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의 전통노선과 율법을 존중하게되어 예수는 당시 부유층, 권세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행동들은 그들과 충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참다운 인간회복운동’을 위하는 일이었다(요 1:1-, 골 1:15-).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와 사회적으로 버려진 자들에 대해 자비와 인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포로된 사람이나 억압받는 사람에게 자유를, 빚진 사람에게는 빚으로부터, 노예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눅 4:18-19). 그리고 죄인들 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써 인간평등의 모범을 보이고 실천하였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는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와 권세자들에게는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이고 반종교적인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는 행위로 보여 이들에게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 못밖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인간회복을 위한 한 알의 밀알로써 후세에 교훈이 되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재물과 부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한다고 가르쳤다(마 19:16-30, 막 9:21, 눅 18:18-30). 또한 그는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제공하지 않고, 감옥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경고했다. 




2.  선교(전도)와 사회복지(봉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노력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루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sending)은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선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행한 선교활동은 어려움을 겪고있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봉사)활동이었다(막 10:45, 눅 22:27).

그러나 현대신학의 선교와 봉사에 대한 사조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경향이 있다. 즉 복음선포를 강조한 전통주의신학은 복음주의신학 혹은 복음주의교회라는 조류를 낳게 했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써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나머지 진보신학 혹은 진보주의교회를 존재케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복음주의신학에서도 로잔(Lausanne)총회를 계기로 복음선포와 사회봉사는 선교신학에서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가.  선교의 두 주류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1)  복음주의 선교


사회봉사에 대한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교회의 입장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즉 교회가 구조적 사회부조리와 사회악을 제거하고 사회변혁에 더 많은 몫을 담당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보수주의ㆍ복음주의 교회들은 회의적이거나 무관심해왔다. 이 진영의 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봉사할 영역은 인간실존의 본질적 구원이 우선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회를 비판하고 모범을 보일수는 있어도 본질상 정치적 조직체는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봉사는 사회구조개혁을 위해 행동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며, 심지어 이들의 사회행동에 대한 반감 때문에 사회봉사의 행위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Bosch, 1980).

하나님의 선교에서 전도를 강조하고 사회봉사를 격하시키는 사람들의 견해를 보쉬(Bosch, 1987, 98)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교회의 사역은 영원한 죄악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 외의 일에 개입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분을 저버리는 것으로 믿는다.

② 교회가 구제, 교육, 치유와 같은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전도(선교)의 한 방법으로 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선교의 목적은 될 수 없다.

③ 교회가 구제활동이나 교육 등 선한 사업을 하는 것은 악이 아니지만 교회가 이와 같은 일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그 과정에서 교회의 본래 사명인 영혼구원에 소홀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봉사활동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다.  

④ 선교(전도)와 사회봉사는 교회사역에서 꽃과 열매와 같은 관계가 있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그들이 사회봉사에 동참하게 된다. 예수도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사회변화는 그의 성육신의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도 전도하면 그 결과로 사회봉사라는 부수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무상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보수주의 교회 중에는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을 그대로 존속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많다. 20세기 초 이후의 근본주의자들의 인간영혼구원 중심의 신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설립된 많은 교회들은 복음적인 선교신학이나 선교사역에 강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들의 선교관이 사회봉사적인 차원을 활발하게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견지되어온 이와 같은 신학사상은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에게서 보게된다.


2)  진보주의 선교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를 중심으로 표명된 진보적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입장에 있는 교회들 특히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구조적 사회악과 부조리를 제거하는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행동에 적극적이며, 때로는 혁명적인 방법을 지지하거나 시도한다. 교회는 불우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조리, 불평등, 비인간화 등 구조적 사회악을 변혁시키는 사회행동을 주요분야로 간주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성서적 근거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을,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함을,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눅 4:18-19)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진보주의 교회들의 이와 같은 주장에는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즉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며 예수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오셨으니 교회도 세상을 섬겨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사례는, 예루살렘대회(1928)에서 선교는 단순한 인간구원이나 교회개척에 한정하지 않고 선교와 사회봉사가 포함된 포괄적 프로그램(comprehensive program)의 개념으로 넓히기를 원했다(RJM, 1928, 181). 또한 1965년 교회상호원조, 난민구호 및 세계봉사위원회(CICARWS: Commission on Interchurch Aid, Refugee, and World Service)의 제네바 협의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봉사(디아코니아)의 개념을 고아원 양로원을 운영하고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봉사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고발하고 일깨우는 사회행동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1978년 CICARWS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정교회 전문위원회가 주최한 크레테협의회에서 디아코니아는 신앙공동체 안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임의 또는 도덕적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공동체 자체의 필수 불가결한 표현이며, 그 근원은 교회의 성례전적 생활에 있다고 했다.

교회는 디아코니아를 통해 인간의 기본적 생활에 장애가 되는 물질적 빈곤에 처한 이웃을 돌보는 일에 인간구원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의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구원을 제공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사회악을 고발하는 역할을 못하고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교회에 대한 세상반응은 냉담함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  통전(통합)적 선교와 사회복지사역


정통신학은 교회의 역할을 복음선포에 강조점을 둔 반면에, 진보신학은 사회봉사에 강조를 둠으로써 교회에 이분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로잔(Lausanne) 총회는 이러한 두 경향에 대한 신학적 준거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복음선포와 사회봉사는 불가분적인 관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와 섬김, 즉 말씀의 선포와 사회봉사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Daiber, 1988, 15). 말씀의 선포 없이 사회봉사는 맹목적이고, 사회봉사 없는 말씀선포는 공허하다. 사회봉사를 통해서 복음의 선포는 그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증거인 성만찬(martyria), 섬김과 봉사(diakonia) 그리고 예전(liturgia)은 각기 분리될 수 없는거와 같다(김영환, 1999).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말씀 선포(kerygma)와 실천(diakonia)이 심한 불균형을 낳게 한 배경에는 교회사적, 신학적 문제가 개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영혼의 구원과 내세를 동경하는 신앙이다. 즉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중심이 사회봉사를 등한시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교정책이 참 진리추구보다 교세확장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선교신학의 오해가 한 몫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들이 점차적으로 강조해 온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주장이 빌링엔대회(1952)와 움살라대회(1968)를 정점으로 인간화와 사회정의 등 교회의 수평적 차원의 사역강조가 일방적으로 되어진 데 대한 비판과 자기반성을 통하여 나이로비아에서의 W.C.C.대회(1973)는 일방성을 탈피하여 온전한 선교관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이로비아 선교관을 통전적 선교(wholistic mission)라고 하는데 전교회(the 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전세계(the whole world)의 온전한 사람(the whole person)에게 전하는 것을 선교의 기본으로 생각하였다(Paton, 1976). 즉 전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할 때 전도와 사회행동은 통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선교에 대하여 나이로비아대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Paton, 1976).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와 봉사활동에 함께 전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동시에 우리는 사회전반에 걸쳐서 평화, 정의 및 자유를 실현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와 같은 사역을 동참하도록 명령받았다(p. 189).

   

그럼으로 통전적 선교(wholistic mission)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이 둘은 하나가 다른 쪽에 종속하거나 의존해 있지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동역적 관계를 유지한다. 마치 바지의 두 가랑이나 가위의 양날처럼 서로 상호작용함으로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교개념을 M=P.S+S.S의 등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선교(Mission)는 인간구원(personal salvation)과 사회봉사(social service)로 구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면 M=E+N+S(S.S+S.A)+F가 된다(서정운, 1992, 41). 다시 설명하면, 선교(Mission)는 전도(Evangelism)와 양육(Nurture), 봉사(Service), 그리고 친교(Fellowship)로 구성되며, 봉사는 사회봉사(Social Service)와 사회행동(Social Action)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전도는 교회밖의 사람의 구원이며, 양육은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교, 심방, 교육, 상담 등의 사역을 의미하며, 친교는 개개인 및 교회, 교파, 국가간의 교회들의 친교와 나눔의 협력 등을 의미하며, 봉사는 결과에 대하여 대응하는 일로서 구제와 이웃을 돕는 행위로서의 봉사와 사회에서 나타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원인에 대항하는 일로서 사회적 문화적 구조적 정의를 위해 활동 혹은 투쟁하는 사회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활동무대는 어느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성전의 머리이신 동시에 현세와 미래에 역사(役事)하시는 주인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개방된 활동무대인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성처럼 건물로 우뚝 서있는 교회로부터 세상과 관계에서 세상을 위해 고난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고난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세계를 위하여 세계안으로 보냄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호켄다이크(Hoekendijk, 1952)에 의하면, 선교는 이 세상에서 메시아의 샬롬(shalom, 평화)을 수립하는 일인데, 선교로서의 샬롬은 설교(kerygma)에서 선포(proclaimed) 되고, 친교(koinonia) 속에서 생동하며, 봉사(diakonia) 속에서 실증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고 그 뜻에 참여함으로써 서로의 사귐과 친교 속에 살며 이웃을 향한 삶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친교하고 봉사하는 우리의 삶이 곧 샬롬에 참여하는 일이며 샬롬에 참여하는 일은 실제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겸허한 종으로써 세상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크고자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자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 10:43)”. 결국 ‘Kerugma', ‘Koinonia', ‘Diakonia'의 세 요소는 선교에 통합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정당한 선교방법이 되는 것이다.



3.  교회사회복지에 대한 신학적 근거


베버(Weber, 1998)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인 첫 번째는 코이노니아이며, 두 번째는 디아코니아이다. 그리고 삼각을 이루는 세 번째가 케리그마이다”라고 강조했다(김성철, 1992, 37). 본훼퍼(D. Bonhoeffer)는 교회의 본질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하나가되는 현장’이며, 그리고 ‘타자를 위한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설명은 ‘그리스도’는 복음선포인 ‘케리그마(Kerygma)’이며, ‘현장’은 ‘사랑의 친교(Koinonia)이며, '타자를 위한 공동체’는 이웃을 향한 책임 있는 봉사(Diakonia)이다. 교회의 사명은 이 삼자가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가.  선교(Kerygma)하는 공동체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마 16:16),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마 16:24)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예수께서 2000년전 유대 땅에서 행하셨던 비움과 낮아짐(빌 2:5-11)과 나눔과 섬김의 사랑의 사역을 오늘 이 땅에서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고전 12) 되고자 하는 공동체이다. 또한 교회는 예수의 마지막 위탁의 말씀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고 하는 말씀을 수행하는 공동체이다(박창빈, 1991).

‘선교(mission)’라는 말은 13세기 탁발수도회에서 선교적인 임무수행을 위해서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을 ‘선교사(missionary)"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이때 선교사란 수도회에서 세상속으로 보냄을 받아 병원, 여관(숙박소), 학교 등을 세워서 그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을 감당하고, 또 교회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 등을 포괄했다. 이렇게 볼 때 선교의 본뜻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교의지를 구현하는 사도로 보냄을 받음‘을 의미하였다(박근원, 1986). 이러한 선교개념은 19세기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외국선교’로서 다른 나라에 가서 그들을 위해 그 지역사회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었다. 이와 같이 그동안 선교활동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나아가는 지리적 또는 양적 교세확장운동의 성격을 띤 복음전파운동이었으며, 이와 같은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는 인간의 영혼구원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선교활동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교개념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1952년경 세계교회협의회(WCC) 회의에서 제기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의 선교는 지리적 또는 양적 교세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오늘도 활동하시는 은총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1966년 베를린에서 모였던 세계전도회의(World Congress on Evangelism)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들은 빈곤, 알코올, 약물중독, 구조적 사회부조리 등 사회문제에 대해서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하면 이같은 사회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4년 로잔(Lausanne)에서 개최된 선교대회에서 스타트(Stott, 1975, 23)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파해야함(마 28:19-20)은 물론 사회적 책임의 이행까지를 포함시켜야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복종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바르게 전하려면 전도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Missio Eklesia)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선교는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연합된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 역사 안에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주체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안에 존재하시며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즉 하나님은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행동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은 교회이면서 세상자체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동참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이같이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이며 동시에 세상을 위해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나.  친교(Koinonia)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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