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해석

구속사적 성경해석

복음제일교회 0 2,234 2021.01.23 17:54
구속사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학상의 원리들의 이해|▷ 성경에 관하여
2010.04.15 00:58

            구속사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학상의 원리들의 이해

이천우 목사(부천 개혁교회)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원리들을 계시해 주므로 해석자가 원리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혹은 주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설교는 무턱대고 성경을 해석하여 놓았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므로 설교는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뜻과 그 메시지가 올바르고도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딤후3:15).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 뜻과 계획하심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충족되게 하신다. 설교는 그 유익함을 있게 하는 중요한 교육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딤후3:14-15). 그래서 모든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성경의 절대적이며 고유의 목적을 설교는 수행한다(딤후3:17).

이는 목사의 직분이 갖는 기능에서 볼 때 분명하다. 설교자인 목사가 설교를 성경에 대한 바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겸하여 교사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설교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명하여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서 설명하는 것에서 할 수 있는 교사의 기능도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칼빈은 교회 직분을 네 가지의 형태로 보았다. 즉 목사(pastores), 교사(doctores), 장로(presbyteri), 집사(diaconi)이다. 여기서 교사는 교회에서 목사의 조력자(助力者)로 있는 학생부나 주일학교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신학을 전공한 교수로 선생 된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직분자를 세우시고 직분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기에 칼빈은 교회 직분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교사는 성경과 신학을 전공한 교수(선생)로 목사가 하는 설교에 간여하여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서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참고; 칼빈(J. Calvin)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목사직을 처음 언급하였는데, 그는 교회에 시대를 초월하여서 항시 존재해야 할 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말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목사와 교사는 서로 분리된 직분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목사요 겸하여 교사의 개념을 띠었다. 사실 목사의 설교는 선포적 개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성도를 교훈으로 양육하여 가르치는 교육적 개념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사는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만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 신자들이 그 가르침을 좇아 지키게 하는 자로서 교수의 일을 하는 목사의 직분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목사는 이 교사의 일을 함으로써 성경으로 바르게 가르쳐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서 있게 하여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며, 복음의 진리 사상에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교육의 지도를 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맡기신 양떼를 위하여 봉사하는 참된 목자로서의 목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파악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설교하는 목회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요구되어진다.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파악하여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와 그 중요성은 일면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참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설교하는 자의 사사로이 푸는 해석을 전혀 경계한다(벧후1:20).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므로(벧후1:21) 사사로이 풀어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실은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사사로이 풀어 해석하는 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음을 말씀하였다(벧후1:19).

따라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올바르게 파악하여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해석의 원리를 무시하고,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잘못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기발한 생각이나 괴이한 해석을 하거나, 소위 영해라고 하여 지나친 해석을 일삼는 일은 폐단이 너무 많으며 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알레고리화(Allegorical)시켜 ‘우화주의'(寓話主義; Allegorical Interpretation; 우화주의는 주로 동물이나 식물에 비겨 교훈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해석이나 설명을 말한다)를 낳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화를 모형으로 알고 잘못 해석하게 되어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뜻이 가려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엉뚱한 교훈으로 변질시켜 믿는 자에게 전하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사람의 세속적 지혜가 있게 하게 된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의 원리를 따르고자 할 때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구속사적 성경해석학상의 원리이다. 노튼 스테??( T. Noron Sterrett)은 성경해석의 원리로 일반 원칙과 특별 원칙을 구분하여서 일반 원칙에 문맥을 따라서 이해할 것, 어휘를 이해할 것, 문법을 이해할 것,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것, 배경을 알 것, 성경해석은 성경으로를 들었다. 그리고 특별원칙으로는 비사, 상징, 표상, 비유와 풍유, 히브리 관용어, 히브리 시, 예언, 교리,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들었다.

그러나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하신 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필요한 원리를 말한다.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은 다음과 같은 원리 위에 세워진다.

1.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

헤르만 바빙크(Hermann Bavinck)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자의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고자 하실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는 자기계시이다”라고 말하여 ‘하나님의 자기계시’란 용어를 사용하였다(Hermann Bavinck, Magnalia Dei, 김영규 역, "하나님의 큰 일",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pp.27-28).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하나님의 본의(本意)로써 곧 성경 해석이므로, 성경해석학상의 원리로 적용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 저자의 저술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계시하신다. 이는 성령께서 다양한 계층의 인간 저자들을 택하셔서 저들의 인격을 전인적으로 영감하시는 가운데(유기적 영감론), 창세전에 수립하셨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계획(엡1:4-6)을 세상 가운데 기록된 말씀으로 밝히 드러내 보이신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 모두를 특별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다(요1:1, 18, 14:9-11; 계1:1). 또한 특별계시의 특별형태의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조석만은 조직신학 제3장 성경에서 “성경은 특별계시의 특별형태이다. 이것은 문서로서의 특별계시이다. 즉,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다시 그에 대한 설명으로서 “계시서로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다.”라는 말을 덧붙여서 성경이 계시서로서 하나님이 하신 일 곧,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에 대해 계시하시고 있음을 말하였다.

성경은 특별계시의 특별형태, 곧 계시서로서 기독교의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벌콥(L. Berkhop)이 말한 대로 종교의 개념은 자연히 그 필연적인 추론으로서의 계시의 개념에로 인도하는데 비교종교학의 연구에서 모든 종교가 어떤 종류의 계시에 기초되어 있으며 계시 종교와는 구별되는 순전한 자연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오르(Orr)의 ‘계시와 종교’(Revelation and Inspiration, p.2.)에는 “광범위한 면에서 지난 수 백 년 동안의 고등종교학(higher religion philosophy)이 ‘모든 종교가 계시에 기인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더 일치된 명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를 인용하여서 종교가 계시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기독교와 이종교(異宗敎)와의 근본적 차이점을 끄집어내어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종교는 자연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자연 계시에 의한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 종교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 계시에 의한 종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 타락하여 부패한 인간의 본능과 본성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 기능을 상실하고, 이성 또한 신앙 기능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전혀 지혜롭지 못하고서 우둔하게 되었는데 그 지혜로서 자연 계시에 의존하여 종교를 갖기는 우상종교뿐이다(롬1:20-25). 그러므로 벌콥은 다시 존 카드(John Card)와 맥퍼슨(Mcferson)의 말을 다시 각각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복하여 계시 종교와 구별되는 자연 종교나 이성 종교와 같은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의 개념과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계시는 사람의 영적 행동으로서의 신앙의 필연적 상호관계이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이다. 기독교가 계시 종교로서 특이한 것은 자연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 특별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인류 구원의 계획을 계시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여기에 있어서 다른 종교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모두가 다 자연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계시 종교 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특별계시의 특별형태, 또는 계시서라고 불리어지는 성경이다. 성경이 있음으로 해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을 신앙하며 종교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높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욱 특수한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구원적 은혜의 계시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다. 따라서 벌콥은 “ '그러므로 종교의 개념과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계시는 사람의 영적 활동으로서의 신앙의 필연적 상호관계이다'라고 말한 맥퍼슨의 말은 매우 정당하다."고 말하였다.

설교는 성경해석의 원리를 벗어나 이탈해서는 안 된다. 설교가 오늘을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메시지라고 할 때 설교하는 자는 그 첫째로 계시의 원리에 기초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에 의한 구원의 원리를 해석하고자 해야 한다. 성경을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계시의 원리에 의하여 풀어 해석할 때 사사로이 풀어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바른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 설교가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엡4:13). 이것이 설교가 구속사적인 설교여야만 하고, 구속사적인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에 따라서 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2. 언약사상의 원리

언약 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언약’의 용어를 어떤 신학자들은 ‘계약’이란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covenants'의 번역에 따른 것인데, ’계약‘이란 말은 군신 간에 갖는 일방적 특성인 조약적 의미의 성격이 강하다(Jhon M. Zinkand, 김영철 역, “성경과 하나님의 언약”, 서울 : 여수룬, 1989, p.28.). 그러나 본 글은 ’언약‘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복된 약속으로 주어지고, 성취되는 것은 이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그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어 맺으신 언약과 깊은 관계성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성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하심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전혀 변함과 변동이 없이 일관성 있게 이어져 지속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점진적 발전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서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요컨대, 창조 언약, 아담에게 주신 언약, 노아에게 주신 언약,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모세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주신 언약, 예레미야에게 주신 언약, 그리스도에 의하여 언약 성취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언약 완성을 해 나가시는데, 이 언약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원시복음으로 불려지는 구원의 약속(창3:15)이며, 약속의 자손(창15:4)이다. 이 약속을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성은 언약의 점진적인 발전에 의한 성취와 그 완성으로 보존되고 지속된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성은 언약사상과의 관계성에서 다루어질 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일관성 있게 해석될 수 있기 마련이다. 성경은 그 독특성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원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충분성(충족성)과 더불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된 것으로(영감설), 무오하며(무오성), 명료하여(명료성), 성경 그 자체가 신적 권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신뢰하며 복종하여 수락한다. 그것이 계시의 충족성과 통일성을 이룬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계시와 언약의 일관성 있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 조석만은 그의 조직신학 제3장에서 성경의 계시성, 신빙성, 영감성, 무오성, 충분성, 명료성, 통일성의 성경 논리를 ‘형식원리’로 규정하였다. 그는 성경을 계시로서의 성경이라고 하면서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보아다. 이때 성경은 “유효계시로 2대 원리를 갖는데 형식원리와 실질원리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계시성을 언약에 의하여 나타내셨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언약 관계를 자주 맺으셨는데, 그 예로는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다윗과의 언약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새로운 언약(렘31:31)이 성취될 날을 예언했고, 그리스도 자신은 최후 만찬을 언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눅22:20).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을 통해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자신의 뜻인 구원의 비밀을 알리셨다. 그러나 유기된 자에겐 알지 못하도록 감추셨다(마13:11-15). 그것은 유기된 자에겐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하시지 않아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시고 눈은 감게 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 행하심이다.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는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참고; Loraine Boettner가 쓴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은 ‘개혁주의 예정론’이나 홍의표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명은 ‘칼빈주의 예정론’이다)에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창시부터 두 부류로 구분하고 서로 원수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코 인류 전체를 같이 사랑하시지 않고 전 인류를 꼭 같이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시지 않은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41) 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3-44)의 말씀이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성과 함께 언약사상에 의하여 해석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 원리를 알지 못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언약종교이며, 기독교의 믿음의 순종은 언약적 순종이다. 모든 시대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의 통일성은 구원의 방식에 나타난 단순한 공통성보다 더 큰 것인데, 그들의 공통적인 유업인 단일한 약속의 언약에 의해 행태를 갖추게 되는 유기적 통일이다. 이 통일성은 중요한 성경해석학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에서 남은 자들에게 약속된 기업의 복이 교회에 의해 나누어 갖게 되는 바로 그 복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구약의 남은 자들이 지닌 것과 유사한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날 미가가 남은 자들에게 예언한 것과 같이(미4:7) 메시야의 보호 아래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미2:12-13). 그러나 새언약의 신자는 구약의 백성들이 얻었던 것보다 더 큰 영광을 경험하고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된다. 옛 언약을 훨씬 능가하는 새언약의 영광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사역에 있다. 신약의 설교는 새언약의 설교이다. 성경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므로, 설교의 양상은 새언약이 가져온 옛언약의 성취인 종말론적인 구속의 은혜를 설교해야만 한다. 이것이 구속사적인 설교가 언약사상에서 나오는 이유이다. 우리가 언약사상을 알면, 구속사적인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3. 모형의 원리

설교하는 목회자가 설교에 성경해석의 원리를 충분히, 그리고 더욱 하나님이 말씀하여 계시하고자 한 뜻에 가깝게 접근,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모형의 원리’에 의한 해석이 성경해석의 원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구약과 신약은 계시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 구원의 원리 역시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의 원리는 구원의 원리에 충실하여야 하므로 성경해석은 구원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신약은 구약에 의해서 해석의 단초를 제공받으며, 또한 구약은 신약의 해석에 의해서 풀어진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서로가 해석한다.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구원의 원리가 해석되며, 신약은 구약에 의해서 그 구원의 원리의 의미가 분명히 해석되어진다. 신약성경 기자들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던, 그리고 그들 자신의 시대에 행하셨던 모든 것을 요약하였다. 이때 계시는 언약의 점진적 발전에 의해 구원의 원리가 이루어지므로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구속 사역과 관련하여서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 혹은 사물들에서는 그것들을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예시(ambulations)나 예언들로 해석하게 되는데 신약의 이런 구약 이해에 대한 연구를 ‘모형론’(Typos: Typology)이라 한다.

고펠트(L. Goppelt)에 의하면, ‘모형’이 되는 조건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필요로 한다. 첫째, 어떤 인물이나 사건 혹은 사물은 그것이 상징(혹은 모형)하고자 하는 것의 참 표상이어야 한다. 예컨대, 아론은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히5:4-5). 둘째, 모형은 반드시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 계획 속에서 구약의 모형이 신약의 실체(혹은 원형)를 가리키도록 주권적으로 역사를 설정하셨다. 셋째, 어떤 모형은 항상 미래의 것을 예표 한다. 반면 상징은 어떤 사물의 현재나 과거 혹은 미래를 가리킬 수 있다.

모형의 원리에 의할 때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고 하여서 어떤 인물이나 사건, 혹은 사물에서 영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의인 구원계시의 원리를 벗어나 주관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셉의 꿈을 해석할 때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으로 하고 있으며, 요셉이 꾼 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질 권세와 능력, 축복을 상징하고, 요셉이 팔려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을,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국무총리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승리자가 될 것을 모형으로 하고 있다고 했을 때 곧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요셉과 같은 과정을 밟으면서 요셉과 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요셉의 꿈에서 요셉 당사자나 요셉이 꾼 꿈과 일생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요셉에게 하실 일을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야곱의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여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창세기 15장 12-21절, 45장 1-15절에서의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모형론은 영적 해석에 의해서 해석을 주관적으로 추려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섭리해 가시는 역사에서 구속사적인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모형은 원형의 그림자로서 항상 해석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 역시 구속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모형)’이라고 해석되어 있다(롬5:14). 그러므로 아담은 앞으로 오실 아담의 모형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담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는가 하면 그가 첫 사람으로서 마지막 아담을 모형하고 있으며, 첫 사람이 온 세상 사람에게 미칠 영향과 같이 또한 마지막 사람이 온 세상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다(롬5:12-21).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양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양을 속죄양이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구약의 제사에서 속죄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들은 비단 양만이 아니라 소나 염소, 비둘기, 심지어는 동물과는 상관이 없는 곡식인 고운 가루도 들어 있다. 그러면 소도 염소도 비둘기도 그리고 곡식을 빻은 고운 가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은가? 또 이사야 53장 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우리를 다 양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한 우리들이 다 양 같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인가?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형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구속 사역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이다.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 36)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과 관련하여서 한 말이며, 아무런 말없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음을 염두에 두고서 구약적 개념을 가지고 한 말이다(출 12;1-14, 21-28; 사53:4-9).

그러므로 어린양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첫 사람인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의 속죄를 위해서 어린양이 희생당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경해석학상의 원리에 의해서 설교를 할 때 그 설교가 구속사적인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은 구약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신약은 그 모형의 원형인 실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증거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드러난다.‘베일’이 주께로 돌아설 때(고후3:16) 벗겨진다.(*참고; 구약 성경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한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벗겨져 밝히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까지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신학 사상은 하나님의 구속사와 그 계획을 구약에서부터 끌어냈는데, 많은 부분이 구약의 인용에 따른 것으로 모형론적 해석에 근거한다. 따라서 구속사적인 설교에서 모형론은 성경해석학상 중요한 원리의 하나이다.


4. 속죄의 원리

설교는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반드시 ‘속죄의 원리’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은 ‘복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계시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하나님의 영원 전 뜻과 계획(*참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뜻과 계획은 ‘신적작정’(decree)이란 용어로 사용된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정하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서 그의 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말하였다(엡1:3-6). 또한 그에 따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엡1:7)과 하나님의 그 뜻의 비밀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들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갖게 하여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곧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엡1:8-9).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요6:40)인 구원의 성업(聖業)을 이루어 놓으신 ‘진리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참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복음’은 구원을 얻는 복음, 또는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을 의미한다)이라고 하면서(엡1:13)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참고; 여기서의 '인 치심을 받았으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용한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구원의)복음’이라고 한 것과 ‘구속’(죄 사함)이란 단어이다. 왜냐하면 복음과 구속은 사실은 서로가 상대 단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하자면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의어인 셈인데, 그것이 에베소서의 주제인 ‘교회(론)’을 이루고 있는 핵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 생명이요 진리의 집, 그 터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전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갖는 의미, 곧 그의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고 있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케리그마가 발생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곧, 구속을 구원의 복음으로 계시하셨으며 교회가 증거해 나가야 할 것으로 주어졌다. 이 성경은 그 일이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정하신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미쳐 성취되고 완성되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다 이루게 될 때까지 예언의 말씀(*참고; 여기서의 예언은 한문이 ‘豫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預言’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일을 선지자[예언자]에게 맡겨 전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그 맡은 장차 되어질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 자이다)으로서 계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예언의 말씀이 되어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이 구속의 원리를 드러내어 나타내는 것에서 복음이 되며, 복음의 본질인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원리(*참고; 구원하시는 원리 곧 구원 원리는 하나님의 의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또한 믿음으로 각각 그 의미가 쓰여 진다)를 알게 하여서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믿음이요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게 한다. 설교가 구속의 원리에 의해 성경 해석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그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성경은 계시의 책으로서 구원 언약(언약신학)에 의해 계시(하나님의 비밀)를 나타내셨으며, 구원 언약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아담에게 주신 구원의 원리(창3:15)에 의해 시작되어 그에게 속한 모든 후손에게 영원히 적용되는 중단되거나 변개치 못하는 견고한 구원으로 삼게 하셨기에 참으로 설교는 구속의 원리에 의해서 성경해석 한 것이 되어야 한다(참조. 마1:1-17; 계1:1, 22:18, 19).

이때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구속성취’는 일반적으로 속죄(贖罪)라고 불리어 온 개념과 관련이 있다. 속죄 교리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사랑에까지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지 않으면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흠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실 것인 속죄 사역을 계획하신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엡1:3-4).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은 속죄 교리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구속’을 ‘속죄’와 같이 본다. 사실상 같은 의미의 용어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영원한 속죄”(히9:12)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두 용어 사이에는 개념상 차이가 있다. 이 두 용어에서, 구속(redemption)은 기독교의 교리를 나타내는 특징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종교 용어로 중요히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를 대신하는 값(贖錢)으로 지불하고서 죄의 노예 되었던 데서 ‘해방’시켜 ‘자유’한 자가 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죄 사함으로서의 구원’의 개념이 강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속죄(贖罪)가 구속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서 속죄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서의 고난 받는 종(사53장)의 ‘죽음’의 개념이 강하다.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주 예수의 복음 전파는 “회개하여 죄 용서함을 받으라” 였다(행2:38). 속죄는 죄에 종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자가 될 수 있게 해주기 위하여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의 한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속죄제(贖罪祭, 히5:3)의 희생제물로 바친 ‘대속물’(代贖物, 막10:45)이 되심으로 ‘속량’(贖良, 갈3:13)이 되셨다. 성경해석학상의 원리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여 하는 설교가 구속사적인 설교여야 하는 것은 구속의 복음을 설명하여 전하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5. 신학의 원리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원리로서 ‘신학의 원리’를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없는 신앙(믿음)은 신앙이 아니며, 신앙은 신학이 없이는 또한 신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신학이며, 신학은(*참고;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교회사의 산물인 신학(神學)의 개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서인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데 따른 ‘신지식’에서 하는 말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 1장 2항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었다) 신앙을 신앙하게 한다 사실, 신앙은 신학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신지식’이기 때문이다. 선지자 하박국이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고 하였고, 사도 바울 또한 그의 말을 인용하여서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그 은혜를 얻은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의를 아는 지식(지식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사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의 신앙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것으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였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7, 26) 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말의 의도는 지식 있는 믿음에서 행함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행하는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할 수가 없다. 아는 자가 또한 행할 수 있는 법이다. 사도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보이라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겠다.” 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칼빈(J. 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1권 1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들 자신을 아는 지식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가 갖고 있는 지혜 중 참되고 견실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두 가지 즉, 하나님과 우리들 자신에 관한 지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상호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 것을 낳아준다는 것을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음을 말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지식과 자기 지식 하는 것은 시간과 순서적으로 볼 때 동시적인 것이다(*참고; 눅18:13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죄인 됨을 하나님의 인식 속에서 함께 가졌다). 다만, 설명하여 가르치는 교육을 시킬 때 어느 것을 먼저 쓰고 어느 것을 나중 쓸 수는 있다. 그 둘은 동시적으로 인지(認知)되어 상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시킨 신지식적인 것인데 그 지식과 신앙은 상호 관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호 관계인가 하면 서로 협력하고 보조하여 보완함으로 충족케 하며 온전케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제10문에서 인간은 의와 거룩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석만은 그의 조직신학 제3권 인간론에서 설명하기를 “의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을 의미하며,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하고 나서, “중생된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중생 된 인간은 두 가지 인식 능력의 통일적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두 가지 인식 능력이란 신앙과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가진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인식 능력인 신앙과 이성에 의해서 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기능인 인식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신앙의 기능과 이성의 기능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 협력, 보조하여 보완함으로 충족케 하고 온전케 하는데 신앙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여 행사할 수 있도록 이성의 기능이 신앙의 기능을 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신앙이 되게 하고, 또한 신앙의 기능은 이성의 기능이 더욱 풍성히 하나님을 지식하여 인식할 수 있게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발전되고 온전토록 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과 이성은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듯이 중생한 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협력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로 자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그 지식으로 견고하게 되는 것인데, 만일 신학을 바로 아는 것이 없이 신앙하고자 한다고 하면 무지한 신앙, 맹목적인 신앙, 이방종교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는 신학에 바로 선 가운데서 성경해석을 옳고 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교의신학으로도 말해진다. 조직신학은 기독교의 신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여 신앙의 의의를 명시하는 신학범주의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이며, 신학 전반에 걸쳐 그 역사적 이해와 신학적 방법, 문제성과 위치를 논리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종합, 체계화시킨 독자적이고 특수한 학문이다. 이때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참고; 벌콥의 조직신학을 번역한 고영민은 역자의 말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역사신학의 관계를 조직신학을 상위에 두고 있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그 예비학, 보조학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 논문의 연구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범주에서 조직신학이 성경신학과 역사신학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등장하고 가르쳐졌다고 할지라도 조직신학이 갖는 교리적 신학의 이해에 의한 체계화는 성경신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각의 신학적 이해에서 되어진 것이며, 또한 교회사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진 신학의 이해에 대한 논쟁과 그 확립에서 조직신학이 체계화되어 등장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및 역사신학은 서로 상하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응하는 관계에 의한 신학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때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그 신학이 왜곡되어 가르쳐지게 될 수가 있으므로 조직신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병행해서 상호이해 관계를 가져나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자는 신학의 연관성을 갖고서 조직신학만이 아니라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밝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신앙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까닭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가 복음을 말로만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는 것이 되며, 설교를 듣는 믿는 성도 또한 많은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되려면, 조직신학을 비롯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서 다루어지는 신학의 이해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신학의 원리에 충실하여서 성경해석을 한 바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할 때 믿는 성도들을 바른 신앙과 생활로 이끌어 참으로 건전한 믿음을 보존하고 지속하게 하는 유익을 끼친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쓴 서신인 베드로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6-18). 여기서 ‘무식한 자들’은 성경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本意)에 대한 이해가 없어 알지 못하는 자, 그러니까 성경의 뜻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또한 ‘굳세지 못한 자’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앎으로써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진리인 복음의 원리를 아는 것으로서, 그래서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푼다. 그러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만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믿는 성도들에게 미리 경고하였다. 경고를 받아 미리 알았으면 이제는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당하는 무법한 자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라고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믿는 자가 그들의 미혹에 이끌려서 자신들이 알고 믿음으로 굳게 있었던 복음에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학에 충실하여 성경을 해석한 설교는 믿는 성도들을 거짓 복음 사상, 이단 사상과 그 행위로부터 보호하고, 능히 그 사상과 행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 주게 된다(참조. 계2:-3:, 계21:1-7; 유1:3-4). 사단은 신학의 이해가 없이 신앙하는 자들을 틈만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단절시켜 넘어뜨리려고 미혹한다. 사단은 거짓 선생들을 조정하여서 그들도 알지 못하는 복음을 훼방하여서 믿는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그들이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살게 하여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게 한다(유 1:1-19).

믿는 자의 신앙이 신학의 원리에 탄탄히 서 있으면 교회가 갖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다른 복음에 대처해 나갈 수가 있다.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사이비 기독교나 이단은 항상 교리적으로 접근해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며 훼방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리에 굳게 서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을 굳게 잡고 이 믿음을 아무나 빼앗지 못하게 한다. 이 믿음에 서있는 것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에서 갖게 된다(고전11:26). 그러므로 설교자가 신학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신앙에 있을 때 그가 하는 설교는 구속사적인 설교이다.

이상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또한 문자적, 역사적, 상징적의 상호 해석적 관계에 의한 해석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시가 지닌 의미가 하나님이 말씀하여 기록하게 하신 문자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에서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야 하며, 때로는 은닉적인 비밀로서 상징하고 있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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