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과 잘못된 편견
B형 남자는 이기적 사랑을 하고 A형 여자는 섬세한 사랑을 원한다. A형은 입맛이 까다롭고 B형은 무심하며 AB형은 많이 먹는다.
과학적 근거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대체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혈액형별 사랑 유형을 그린 영화나 뮤지컬도 나오고 혈액형이라는 테마로 이벤트를 벌이는 주점도 생겨났다. 이른바 `혈액형 비즈니스`의 탄생이다.
혈액형 성격 구분이 인기를 끄는 것은 재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재미로 끝나지는 않는다. 포털 지식검색창에는 B형 남자친구와의 교제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언을 청하는 소녀들의 고민이 넘쳐난다.
결혼정보회사 커플매니저들에 따르면 "B형은 소개 대상에서 빼달라"고 요구하는 고객들도 제법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B형 남자에게서 사랑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어디 사랑뿐인가. B형들이 가끔 철없는 짓을 하면 그냥 애교로 봐주는 법이 없다. 이런 식이다. "쟤는 B형이라서…." 한국 사람 10명 중 3명꼴인 B형들에게 찍히는 이 같은 낙인의 표식은 합당한가.
현재의 ABO식 혈액형 분류가 이뤄진 것은 1901년의 일이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혈액형에 따른 인종 간 우열을 구분하는 논의가 인기를 끌었다. 게르만족의 피는 A형이고 아시아 인종은 B형이 많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1927년 일본에서 나온 `혈액형을 통한 기질 연구`란 논문은 처음으로 혈액형과 인간의 성격을 결부시켰다. 내성적인 A형, 외향적인 B형 등 혈액형별 이미지 구축은 이때 이뤄졌다. 이후 인종차별적 파시즘의 야만을 겪으며 서양에서 종적을 감춘 혈액형 성격론은 일본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1971년 일본의 방송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쓴 `혈액형 인간학`,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쓴 `혈액형이 당신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가 대형 히트를 치면서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는 `정설`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현재 혈액형 성격론이 유행하는 나라는 일본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 정도다.
이에 대한 과학자들 입장은 한결같다.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면 혈액형을 바꾸면 성격도 달라져야 마땅하다.
방사선 치료를 통해 몸 안 조혈세포를 없애고 타인의 골수를 이식받은 환자들은 혈액형이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골수를 이식받은 사람은 혈액을 만드는 골수가 바뀐 만큼 혈액형도 서서히 기증자의 것으로 바뀐다.
김동욱 여의도성모병원 교수는 "지금까지 골수 이식으로 혈액형이 달라진 환자들을 2000~3000명 정도 봤는데 성격 달라졌다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사람의 감성과 성격은 두뇌에서 컨트롤되는 반면 혈액형은 세포 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등 `소속` 자체가 다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규형 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는 "놀이와 과학을 구분 못 하면 어떡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는 "한두 가지 기준으로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특질을 구분하는 지역감정과 다를 게 없고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듯이 혈액형 구분도 이를 통해 돈을 벌려는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노원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