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6차 변론기일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 헌법재판소 제공법관련사진보기
"윤석열 대통령 측의 헌재 변론을 듣는 게 '고문'이에요. 창피해서 몸이 다 오그라들 정도예요."온 국민이 윤 대통령 관련 뉴스를 보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입을 모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요즘처럼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알렉시 드 토크빌의 금언조차 차마 믿지 못하겠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그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고 응분의 형사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솔직히 비상계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진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가 집무실 책상 위에 'The Buck Stops Here!' 명패를 올려둔 '진정성'을 믿었다.
그마저 '쇼'였다. 그는 도통 앞뒤가 맞지 않은 거짓말을 태연하게 내뱉었고, 그와 공동운명체를 자임한 측근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입을 닫았다. 얄팍한 법 지식을 동원해 처벌을 회피하려는 술수지만, 그런 행태가 우리 사회에 끼칠 악영향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염치마저 내팽개친 추악한 엘리트의 전형.한 지인이 윤 대통령을 두고 내린 한 줄 평이다. 그는 윤 대통령을 향해 범부만도 못한 옹졸하고 비루한 자라고 성토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다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한민국의 '엘리트'지만, '12.3 내란 사태' 이후 그의 민낯이 고스란히 까발려졌다.
윤석열이 본받아야 할 '염치' 있는 엘리트'염치'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염치는 양심이나 도덕, 신념, 철학과 같은 '거창한' 가치가 아니다. 그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최소한의 '전제 조건'일 따름이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설파했다.
장담하건대, 윤 대통령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서울대 입학과 사법고시에 필요한 '스킬'만 완벽히 갖췄을 뿐, 정작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역사의 교훈은 단 하나도 깨우치지 못했다. 만시지탄이지만, 그에게 정면교사가 될 '염치 있는 엘리트'를 두 분을 소개한다.
▲면우 곽종석 선생 묘소.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자리하고 있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주소(가조면 장기리 산 74-1)를 검색해야 한다. 승합차는 물론, 차폭이 큰 승용차도 접근하기 어렵다. 운전이 미숙한 경우, 마을에 주차한 후 걸어가는 편이 낫다. ⓒ 서부원관련사진보기
면우 곽종석 선생. 구한말 서세동점의 시대를 산 유생으로, 서양 열강의 침략을 규탄하면서도 당시 그들에 의해 제정된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호소하는 등 현실 감각을 지녔던 인물이다. 항일 의병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 처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왕이 내린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그는 전국의 유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국권이 피탈되자 아예 은둔의 길을 택했다. 교류하던 지식인들이 그를 찾아와 의병을 도모하거나 해외로 망명해 일제에 맞서 싸우자고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 그가 숨어든 곳이 현재의 경남 거창군 가북면이다. 덕유산과 가야산이 겹으로 감싼 첩첩 산골로, 전기가 들어온 지 채 10년도 안 됐다는 오지 중의 오지다. 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난 그는 이곳에 터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냈다.
역사 교사로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공부하면서, 난 그를 존경하기는커녕 마뜩잖게 여겼다. 전국에서 제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만큼 추앙받는 지식인이라면 그에 걸맞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가 은둔을 택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반하는 행태로 봤다.
▲면우 곽종석 선생이 말년에 은둔했던 곳에 이태 전 전시관을 세웠다. 폐교한 초등학교 분교장을 활용했는데, 워낙 오지여서 찾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 ⓒ 서부원관련사진보기
은둔한 채 식민지 백성으로 산 그도 마음 한구석엔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소식에 민족적 울분이 3.1 운동으로 터져 나오자 시나브로 잊힌 그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다. 이른바 '파리 장서 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영남 지역 중심의 명망이 있는 유생들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경북 성주 출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과 함께 그는 독립 청원서의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그는 전국 유림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던 셈이다.
의병도, 망명도 거부하고 은둔을 고집했던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 건 지식인으로서의 '염치' 때문이었다. 그는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연서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 유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이를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 성리학의 수치로 여긴 것이다.
'파리 장서 사건'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발각되고 그도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노령을 이유로 병보석되었지만, 옥살이에서 벗어난 지 두 달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역사는 그의 은둔적 삶보다 '파리 장서 사건'의 주동자로만 기억한다.
마뜩잖게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삶이 위대하게 느껴진 이유▲전남 광양의 매천 황현 선생 생가. 구한말 화가 채용신이 그린 선생의 초상화가 방안에 세워져 있다. 문화해설가가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서부원관련사진보기
또 한 분, 매천 황현 선생. 인지도로 치면, 면우 곽종석 선생보다 한 수 위일 테다. 그와는 9년 터울의 동시대 인물로, 국권 피탈 직후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00여 년 동안 선비의 나라였던 조선이 멸망했는데, 단 한 명도 책임지는 선비가 없다며 탄식했다.
그는 나이 서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기실 그는 국가의 녹을 받은 적이 없으니, 망국에 책임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봉건왕조 지배층의 일원이자 지식인으로서, 하나뿐인 목숨과 '염치'를 맞바꾼 것이다.
그 역시 존경하긴 멋쩍었던 인물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그 무엇보다 힘든 선택일 테지만, 은둔하는 것만큼이나 비겁하게 느껴져서다. 심지어 그는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왕을 도와 일제와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폭도로 규정했다.
대쪽 같은 선비일지언정 그는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봉건적 신분제를 철저히 옹호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을 신봉하고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요즘 말로 하면 '뼛속 깊은 보수파'였다. 망국이라는 현실 앞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 음독 자결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도 지식인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다. 절명의 결심은 섰으되, 독이 든 사발을 입에 몇 번이나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고 전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던 거다.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 갔을까. 현실이 절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억울한 심정도 들었을 테다.
▲매천 황현 선생 묘소. 선생의 선대와 후손을 함께 모신 가족묘 형태로, 한 가운데에 선생과 부인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다.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 서부원관련사진보기
그가 낙향한 뒤 저술한 <매천야록>과 <동비기략>은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또한 신분제의 동요로 양반의 권위가 몰락하는 상황일지언정 '글 읽을 줄 아는' 지식인의 '염치'에서 비롯된 저작이다. 소명 의식도 '염치'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염치'조차 귀해진 시절이어서일까. 여태껏 마뜩잖아했던 면우 곽종석 선생과 매천 황현 선생의 삶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부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윤 대통령의 뻔뻔한 모습과 대조되어 두 분의 '염치'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염치'가 사라진 사회에선 거짓과 허세가 기세등등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다. 입만 열면 거짓말에 남 탓만 하고 있을지언정, 윤 대통령이 '염치'를 안다면, 종일 적적할 구치소 독방에서 두 분과 관련된 책을 구해다 읽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