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5대교리 (Five points of calvinism)
종교개혁자로 너무도 유명한 존 칼빈의 5대교리는 신본주의를 신봉하는 장로교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서, 이제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인본주의와 교리를 상대 비교하여 자세히 정리하여 보는 계기를 마련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전적타락(Total deprivity) (엡2:1)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죄가 없었지만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의해 우리가 오염돼서 우리는 죄 아래 인간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대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므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롬2:14-15,20)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 2:17절에서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하셨고, 로마서 3:10절에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1517년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그에 95개 조항을 걸고 종교개혁을 한지 벌써 488주년이 되었습니다. 이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우리는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해서 공부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합니다. 칼빈(1507-1564)은 루터와 함께 16세기에 활동한 위대한 종교개혁자입니다. 역사 속에 많은 신학자들과 성도들이 칼빈의 교리를 연구해왔고, 그가 세운 교리를 신봉해왔습니다. 그의 신학은 성서적으로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교리는 대부분 그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저도 옛날에 읽어봤는데 새롭게 자세히 읽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을 내서 반드시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진리 위에 세워져서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칼빈의 5대 교리는 기독교의 ‘위대한 기독교 진리’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7세기 화란 도르트에서 복음에서 빗나간 신앙의 흐름, 곧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에 대처하기 위해 종교회의가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도르트 총회라고 합니다. 여기 모인 종교개혁 계승자들이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칼빈의 주장을 재확인하면서 이 기독교 5대 교리를 체계화했습니다.1)
이 5개 교리는 반세기 전에 작고한 칼빈의 이름과 연계해서 「칼빈의 5대 교리」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의 교리는 영어로 'Total Depravity'(전적부패), Uncon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된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ence of Saints(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데 신학자들은 이 교리의 영어 첫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펄전은 이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은 무슨 진기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교리도 아니다. 나는 '칼빈주의'라는 별명이 붙어있지만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임이 확실한 저 강력한 옛 교리를 기쁜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5대 교리는 기독교 진리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중요한 진리이다.
첫 번째 교리 “Total Deprevity”(전적타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첫 번째 것을 상고할 때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체계가 구원받을 자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간의 타락이 단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의 공로를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의 공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과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공식화한 도르트 총회의 개혁주의자들은 이 점에 관해 충분히 인식했기 때문에 성경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서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자연 상태는 전적 부패의 상태라고 선언 했습니다. 이는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거나 구원에 어떤 류의 기여를 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 곧 전적타락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다거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아낼 수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동료 인간에서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거나, 외면적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곧 인간은 악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선을 행하고 신앙 행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전타락이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을 때 인간의 인격 전체가 타락의 영향을 받은 상태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능력 전체, 곧 의지, 이해, 애정, 기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대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본래 죽은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성경은 인간이 마귀에 속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이하). 성경은 인간이 눈멀고 귀먹은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이하). 성경은 우리가 가르침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성경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느니라”(창6:5).
이상이 인간의 자연적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가? 속박된 자가 스스로 놓여날 수 있는가? 눈먼 자가 스스로 보거나 귀먹은 자가 스스로 들을 수 있는가? 종이 스스로 속전을 낼 수 있는가? 가르침 받을 수 없는 자가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가? 날 때부터 죄인된 자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가?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욥은 욥기 14장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고 욥은 물은 다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욥14:4) 예레미야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묻습니다.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렘13:23). 부패가 전체적인 것이고, 구원을 바라거나 얻을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 또한 전체적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손과 발이 속박되어 있으며 부패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은 시체 속에 생명의 빛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수용적(受容的)인 내적 불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육적으로 죽은 자는 물론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구원은 바로 그 본질상 주께 속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1) 죄로 죽음- 구원을 달성하기에 족한 만큼의 어떠한 공덕도 전혀 행할수가 없음(엡 2:1,창 8:21,롬 2:1,요 6:33,욥 15:14-16,렘 13:23,17:9)
2) 이성과 지식에 있어서도 -죄로 죽고,육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고전 2:14,1:18,2:9-10,요 3:3,5, 10-12, 엡 4:17-18,마 11:27,행 26:18,고후 4:3-4)
3) 정에 있어서도
4) 의지에 있어서도 죄로 죽음- 우리의 의지는 자유인바, 즉,우리들은 외부에서의 어떠한 힘에도 지배되거나 강제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들은 날개 꺾인 새와도 같은ㅈ로 본래부터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며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어 하나님께 오지 못하는 것이다( 요 3:19,5:40,롬 8:7,요 8:43-44,딤후 2:26)
5)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선행 그 자체에 있어서는 적극적인죄의 행위는 아니지만 그러한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까락에 죄있는 행위이다(롬 7:8,히 11:6, 롬 14:23)
6) 타락에 의해 인류는 유죄와 부패의 상태로 떨어졌다(창 2:17,3:1)
아담은 고의로 죄를 범했다(딤전 2:14) 또 그는 대표적으로 인류의 처음으로서 대표로서 죄를 범했다.우리들이 타인의 죄 때문에 고생하는 분명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출 34:6-7,롬 5:12,18-19,고전 15:22,시 51:5) 그렇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대표적 희생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다(엡 2:1-5,5:24,고후 5:17)
7) 우리들은 본래 정죄된 상탱에 있다(요 3:36,롬 11:20)은혜로 구원되지 않으면 우리들은 영원 형벌을 받을 수 바께 없는자들이다. 형벌에 대한 마태복음의 증거들은 (마 5:29-30,7:19, 10:23,11:24, 13:31,41,42,50, 18:8,9, 34:, 21:41,22:14,24:51,25:12,30,41,26:24)
2.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택정을 입는데는 어떠한 인간적인 조건도 없다.
에베소서 1:4-5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예정 섭리에는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는 작정과 전적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딤후1:9), 인간의 어떠한 선한 행위나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딤후 1:9, 행13:48)(예정예지론)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이미 전능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신 전능자이시며, 인간의 모든 의지는 그분께 종속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첫 번째 교리인 ‘전적 부패’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인간은 타락은 했어도 선을 완전히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고자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들은 인간은 전적인 타락을 믿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선행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믿는 것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두 번째 교리인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이 두 번째 교리는 첫 번째 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알미니안들은 무조건적인 선택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곧 그들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음에 응답하리라고 알고 계신 자, 즉 복음을 믿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미리 예지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고자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택하시는 것은 조건적인 선택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조건적인 구원이 됩니다. 이런 알미니안들의 주장에 대해 칼빈주의 자들은 무조건적인 선택을 믿고 받아드립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은 피택자 곧 선택을 받는 자의 어떤 행위를 미리 보시고 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절대주권에 의해 특정한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조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의 구원과 직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안들의 주장과 같이 만약 우리가 믿을 것을 아시고 선택하셨다면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형편과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들과 같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과 절대주권 가운데 무조건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변개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알미니안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칼빈의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증거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 2: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1:4절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처음부터 구원할 자를 택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9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이루어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로마서 8:30절에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9:11절에서는 “그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행을 행할 것을 아시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곧 선행이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나 기초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기도 전에, 무슨 선행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절대 주권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48절은 말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받고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행은 예정의 결과이지 선택의 근거나 기초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6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하나님의 선택은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선택의 결과요, 선택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선행을 보아서 그가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특수한 자비의 기초입니다. 로마서 9:21절은 말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 또 로마서 9:15절은 말합니다.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절대 주권 가운데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사 당신의 백성 삼아 주신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우리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절대 주권적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 선택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변개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벧후 1:10). 그리하여 흔들림이 없이 부르심과 택하심 위에 굳게 서서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히 맺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택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로운 영원한 결정이다 하나님은 이에 의해 타락한 인류 중에서 누가 천국의 후사가 될것인지를 결정한다 택정에 참여치 못하는자는 그 타락과 죄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받아야 할 당연한 벌을 받을뿐이다. 그들은 결코 부당하게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선택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실시된다.
2) 택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신 7:6-8, 마 20:23,엡 1:4,11, 3:11,롬 8:28-30, 9:11,12,19-23, 11:7,요 15:16,살전 1:2,4, 살후 2:13,마 24:24,31,딛 1:1, 살전 5:9,행 13: 48,요 17:9,6:37,65)
민족의 택정(암 3:2,신 7:6-8,벧전 2:9
천사의 선발 (딤전 5:21,마 25:34,41,벧후 2:4,유 6,계 12:7)
3) 택정은 선택된자의 신앙이나 선행에 선행하는 은혜이다.(롬 9:11-12,16) 신앙도,선행도 택함을 입음 열매(엡 2:9-10)이며,증거이지만 택함을 입음 근거는 아니다. 신앙이나 선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는 그러한 것을 미리 제정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선행 된다(엡 1:4,요 15:16,딛 3:5,딛후 1:9,2:19,렘 1:5,시 139:14-16,욥 23:13-14,암 3:7)
롬마서8장 27,30절에 있는 안다는 말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데 롬 11:2-5 같은 것, 실지로 신앙은 하나님의 은사이다.(엡 2:10, 행 18:27,11:18,13:48, 롬2:4,디ㅣㄷ 3:5,빌2:12,13,갈 5:22,23)
4) 택함을 입지 못한자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중에 남겨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를 멸하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떤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의 당연한 값어치대로의 그들의 죄의 필연적인 결과에 맡겨 두신다(요 3:18,롬 1:28,2:5,살후 2:11,요 12:39,13:8,9:39, 마13:10-15,사 6:9-10,롬9:17, 출8:15,8:32,9:34)
하나님은 구원을 원하는자 모두를 구원하신다. 그렇지만 그 성질에 전적으로 변화를 보이지 않는 한 결코 구원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아담에 있어서 죄에 항쟁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아담으로서도 이기지 못하고 또 이길수 없었다면 하물며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같다.
5) 이교도가 잃은 바 될 것은 명백하다(행4:12,요15:5,14:6,3:36, 17:3, 히 11:6,롬 10:13-14,겔 33:8)
하나님은 은총의 이적에 의해 어떤 자를 구원하신다.
6) 우리들은 이 일에 포함 되어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얼마쯤 알 수 있을찌도 모른다(잠 16:4,롬 9:22-23,11:11) 그러나 그것에 관하여 모든 신비르 다 알 수는 절대로 없다(마 11:26,눅10:21,롬 9:19)
7) 택함 받은자는 어느정도일까 (계 7:9)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엡 5:25
특별 속죄라고도 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직 택함을 입은 자녀의 죄만을 제한하여 대속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에서 오직 예수 님은 자신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도 로마서 8:33절에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와 로마서 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송사를 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에서 세 번째 교리인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속죄론은 기독교 체제의 가장 중요한 중심문제이다. 우리가 오늘 이 교리 즉 “제한적 속죄”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란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잠재적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긴 했어도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여” 그로 인해 구원받을 때까지는 효력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으로 죽으셨지만 그것에 동의하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구원받을 것인지 않을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면, 일부 사람들이 생명으로 선택되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어 멸망 받게 된다는 그러한 영원한 작정이란 있을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알미니안들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속죄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일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택하신 자들의 빚을 갚아 주시고, 아버지의 공의에 맞도록 그들을 속량해 주시고, 자신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견해 곧 보편속죄에 반대하여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는가? 아니면 선택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는가? 속죄의 범위에 대한 이 고전적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는지 아니면 선택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는지 그 속죄 범위에 대한 우리의 고백서의 결정은 다음과 같다: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선택함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정한 때에 활동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해 결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가 되고 거룩해지고 그분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오직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가 되고 거룩해지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에베소서 1: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6절에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28절에 보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를 흘려주었다고 친히 말씀하셨던 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셨다. 이처럼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우리의 주장이다.
마태복음 1:21절 말씀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자기 백성이라는 말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한 민족으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에베소서 5:25절에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했다. 또한 로마서 4:25절에서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성령이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뜻하는 것인가? 세상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세상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이 되기 때문에 보편주의자들의 말이 옳다. 그렇지만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세상이란 말의 사용이 세상의 남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 세상이 그를 좇았느니라”라고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좇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 하지 않고 오직 택한 자들만 구원하시려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요한복음 6:37절은 말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그렇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 곧 우리가 주님께로 오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우리를 당신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주권 가운데 예정하시고 택하심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변개함이 없는 것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택함 받은 자만이 구원된다(요 3:16,7:37,롬 3:24,계22:17)
.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으심의 가치라든가 힘에는 아무런 제한도 가 할 수없다 (고전 2:8,요1:29,행3:15,20:28)
. 속죄의 효과는 무한하다. 그것은 택함받지 못한자들에게까지도 커다란 축복을 가져온다(요 3:8,3:16,고후 5:14-15)
.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업의 공로를 우리에게 돌리고 속죄는 우리들의 구원을 완전히 공고히 한 것이 되게 한다( 마 5:48,약 2:23,몬17-18)
2) 속죄구원이 실제로는 택함을 입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즉,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택함을 입는자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마 20:28,요17:6,9,10, 10:14-16, 행 20:28,엡5:25,요 15:13,마13:24-30)
택함을 받지 못한자들은 실제에 있어서 속죄의 효과를 특별 은혜로써 받을 수 없다(요 6:70,8:44,17:9,마 13:28-30)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딛 3:5
효과적인 부름’이라고도 부르는 데, 디모데후서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오.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와 디도서 3: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부르사 구원하심은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하신 은혜의 섭리만이 요구되어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셔서 구원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아니하며, 오직 그분의 전능하심만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교리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네 번째 교리 역시 앞서 우리가 살핀 세 가지 항목의 논리적 결과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셨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위해 성취해 놓으신 그 구원의 은총에로 그들을 부르실 수단을 강구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불가항력적 은혜는 도르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작성한 사람들이 궁리해 낸 것이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계시인 것이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느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쁘게 선택한 그들을 부르셨던 것이다.
그러면 불가항력적 은혜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이 다 그 부르심에 유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르심에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외적인 부르심이 있고,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말이다. 외적인 부르심은 “전도자의 말씀”으로 기술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부르심은 여러 가지 다른 심령에게서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외적인 부르심이 죄인의 영혼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르심에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인 부르심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의 은혜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것은 꺾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표시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속에서 거듭거듭 입증되고 있는 예를 다음의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6:3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 “올 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올 때는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6: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사람이 저들 스스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고 간단히 말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6:45절에 보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했다. 인간은 외적인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응답하여 올 자는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이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로마서 8:14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1:15절에서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2:9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또한 베드로전서 5:10절에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효과적인 부르심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뛰어난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한 강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때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다. 전도자 바울이 루디아의 귀에 전한 것은 외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에 하신 말씀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내적인 부르심이었던 것이다. 알미니안 파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거역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그런 교리는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곧 우리들은 앞에서 살펴본 성경 말씀들에 기초해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믿는다.
그러면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진리가 왜 중요한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거역할 수 있다. 실제 거역한다. 부패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복음을 거역할 수밖에 없다. 그런고로 불가항력적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자신들을 한번 보라. 나의 의지로, 나의 노력으로, 나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죄악 된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거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지로는 복음을 깨닫고 믿을 수 없다. 이것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보다 더 강한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본성보다 더 큰 곧 우리의 거역보다 더 큰 어떤 영향력이 우리의 영혼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을 당신의 절대주권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하시고 그 택하신 자들을 당신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을 찬양한다. 우리가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며, 그 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자.
1)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의 순서에 유의 한다(딤전 1:2,딛 1:4)
2) 효력이 있는 부르심은 성격의 역사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우리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의 의미를 밝게 하며 우리들의 의지를 새로이 함을 입는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있어서 자유롭게 우리들에게 제공 된 예수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게끔 하신다
3) 거듭나는 것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우리안에 행해진다(딛3:5,엡 1:19-20,벧전 2:9,요3:3-5,5:24,골 2:13,겔 11:19,고후5:17) 우리들은 이 몸이 태어남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중새의 때를 의식하지 못한다(요 3:-8,11:39-44,롬 9:16,18,고전 3:5-9,행 16:14
4) 중생은 새로운 것(성질)을 낳는다(겔 36:26,엡 1:17-21,요5:21,17:1,행 13:48)
5) 예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고 또 실제로 구원하시며 또 온전히 구워ㄴ하신다. 그는 다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을 뿐 아니라,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엡 2:8-10,고전 1:30,딤전1:15)
6) 성령은 우리들의 의지의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또 온화하게 우리들의 의지에 역사하시며우리들을 설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게끔하신다(요3:7-8)
7) 제한적인은혜외에 보통 은혜가 있다 그것은 풍족하게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모든 질서, 문학,고공의 덕, 예의의 원천이며 때때로 사람들을 어떤 악습에서 변혁케 한다.사람들은 때로는 이 보통의 은혜만으로 만족하나 보통은혜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롬 8:30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에 그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6:17-18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너무도 확실한 말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1-22절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도의 보증과 인이 되어 주심으로, 이러한 약속들을 굳게 확립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틀림없는 보호를 입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마지막 교리인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배우고자 한다. 알미니안 주의 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도 중간에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 반박해서 칼빈주의 자들은 ‘성도의 견인’을 주장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 안에서 영접해 들였던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혀 또한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없고,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될 것이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8:29-3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결코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고 영원한 구원으로 견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첫째 교리에서 넷째 교리까지 살펴본 대로 만일 인간이 전적부패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주권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구원할 자를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속량하셨다. 그런고로 만일 도저히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죽으시고,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고 하면 주께서는 또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견인하여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효과적인 부르심 뒤에 성도의 견인이 오게 된다.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고 영원한 구원으로 견인되는 것이다. 빌립보서 1:6절은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축복된 진리에 관한 구절들이 풍성히 나타난다. 요한복음 6:39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또 요한복음 10: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한 로마서 5: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8:1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렇다. 이것이 믿는 자의 보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더욱 힘써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우리가 특히 로마서 8장28-39절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진리 곧 성도의 견인 진리 위에 굳게 서길 바란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 떨어진다 할지라도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서며, 좌절 없이 하나님의 뜻을 섬겨갈 수 있길 바란다.
1) 부름심을 받아 성도로 된자는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보증되어 있다(요 10:28,30, 4:14, 5:24, 6:47,51,빌 1:6,시 138:6, 요 5:13,히 10:14,롬 8:29=30,34, 마 24:24,요 14:19,히 7:25, 딤후 1:12)
2) 우리들의 견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롬6:14,11:6,계4:11,7:4,갈 5:1,요4:10,롬6:8-10,6:14,렘33:3)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안에 있다(사 54장,롬 11:29-,5:8-9)
롬 8:32=비교 28
3) 그리스도의 성도가 일시적으로 타락하는 일이 있어도(고후 4:7,롬 7:19-25) 그는 그 신앙적인 타락에 항거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히 6:6,삼하12:14,고전 3:1-15)
탕자의 비유(눅 15:17-20,갈3:1,계2:4,5:3,고전 10:13)
4) 외면적인 고백은 꼭 참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고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