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역사 바로 세우자-(11) 저평가되는 건국 공로] 대한민국 건국 주역은 기독교였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한민국의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의 건국은 특히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었기에 훗날 산업화와 민주화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초중고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광복 후 한국 기독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우익의 3영수로 불렸던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비롯해 민족 지도자 다수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백범 김구는 광복 후 민족의 당면 과제로 건국(建國)과 건교(建敎)를 제시하면서 “경찰서 열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건국 헌법은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삼균주의를 기조로 삼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나라가 근대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수용했던 기독교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다수 민족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통해 그러한 사상에 눈을 떴으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그 꿈의 실현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좌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고, 광복 후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으로 그대로 채택됐다. 대한민국의 건국 헌법이 그 정통성을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3·1운동의 계승은 바로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광복 후 3·1운동을 계승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그룹이 바로 한국 기독교였다. 실제로 기독교는 3·1운동의 정당한 계승자였다. 민족 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실 외에도 기독교는 3·1운동의 전국화 대중화 거족화의 주역이었다. 기독교는 우익 진영과 함께 3·1절 기념 행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물론 일부 좌익 진영에서도 3·1절 기념 행사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자기들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했다. 따라서 좌익 진영의 3·1절 기념 행사는 기독교를 비롯한 우익 진영의 3·1절 행사에 대한 맞불 지르기 성격이 강했고, 조직 동원을 통한 선동적인 군중 집회와 폭력이 수반됐다. 그것은 민족 정통성 계승이라는 차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이유로 북한 공산당은 1946년 3·1절 이후에는 관련 기념 행사 자체를 갖지 않았다. 광복 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이상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기독교가 서구의 오랜 역사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정신적 기반으로 실험되었던 불교와 유교가 실패했다는 점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은 한반도에선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지만 서구에서 이미 성공한 기독교적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새로운 국가는 개인이나 사회나 도덕적으로 고상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외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도덕성은 국가 건강의 척도와 직결되는데, 기독교가 바로 그 비결이었다. 셋째, 기독교가 민주주의 이념을 가장 잘 대변한다는 점이었다. 기독교가 아니면 참된 자유 민주 평등의 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란 꽃은 기독교 문화의 밭에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도들이 기독교의 국교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기독교가 추구했던 것은 정교분리(政敎分離)였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 건설이었다. 이는 초기부터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도 그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것을 미국에서 몸소 체득해 새로운 건국의 좌표로 삼고자 했다. 그가 꿈꾸었던 국가는 바로 그런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승만이 일당독재로 규정되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력히 대항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거기에 있었다. 기독교의 반공주의도 그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로의 노정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광복 후 한국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건국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공산주의 자체는 생산과 분배의 수단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포장에 불과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정치체제였다. 공산주의는 일당독재 체제였다. 숙청은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축출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공산주의에는 자유나 다름 혹은 다양성이 존재할 여백이 전혀 없었다. 광복 이전부터 기독교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종교(혹은 종교의 자유) 또한 그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광복 후 들풀처럼 번지던 공산주의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열정에 함몰되지 않고,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다. 허명섭 목사 (시흥제일교회·서울신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