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장(名匠)

한국의 명장(名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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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匠들…
기사입력 2010.09.20 08:51:50 | 최종수정 2010.09.20 08:58:58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한국의 명장들◆

금형(金型) 명장

고재규 소닉스 상무
경기도 화성에금형박물관 만들겠다

“70년대 국내 금형 기술은 걸음마 수준이었습니다. 지난 40여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죠. 그래도 갈 길이 여전히 멉니다. 저는 금형 40년의 변천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건립하는 꿈을 여전히 꾸고 있어요. 그 박물관에서 금형전시와 함께 금형 컨설팅도 할 계획입니다.”

국내 금형 명장 1호 고재규 소닉스 상무(55)는 올해 삼성전기에서 정년퇴임했다. 그는 30여년간 삼성을 대표하는 기술자였다. 1996년 국가산업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수상했다. 삼성전자는 고 상무의 금형 기술을 바탕으로 오디오, VTR, 모니터,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많은 부품의 국산화를 이뤄냈다.

“금형은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형태가 있는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반 기술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모든 물건이 형태가 있어요. 노트북, 휴대폰, 볼펜과 심지어 종이컵 생산에까지 모두 금형 기술이 적용됩니다.”

고 명장은 도면대로 형태를 만드는 것이 금형 기술자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첨단제품을 제조할 때는 고도의 금형 기술이 필요하다. 휴대폰의 카메라 화소를 높이거나, 얇은 LED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도 금형 기술은 필수다.

“처음엔 금형 기술자가 되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17세에 중소기업에서 금형 일을 시작했는데, 세상에! 이게 제 취미였던 거예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습니다. 철사를 갖고 스케이트를 만들기도 했고, 대장간에서 송곳과 호미를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전자제품을 보면 부품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어요. 한번은 3개월 월급을 모아서 산 전축을 모두 분해해 아내가 크게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중소기업에서 금형 일을 시작했다가, 81년 20 대 1 경쟁을 뚫고 삼성전기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뛰어난 기술력 앞에선 중졸 학력도 문제되지 않았다.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일에 매달렸다. 일하는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 검정고시를 보고, 서울산업대를 다녀 2007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올해 초 정년퇴직하고 삼성에서는 5년간 기술고문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중소기업을 선택했다.

“이제 대기업 금형 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어요. 중소기업은 상황이 다르죠. 이웃 나라 일본과도 차이가 큽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소닉스는 지난해 설립된 신생회사예요. 휴대폰의 마이크, 스피커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죠. 40여년간 갈고닦은 기술로 중소기업을 키워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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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 명장

배명직 기양금속공업 사장
도금이 3D 업종? 편견 버리세요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만난 배명직 기양금속공업 사장(49)은 국내 최고의 도금 명장이다.

경북 예천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한 배 사장은 애초 기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주종합고교 화공과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공부는 뒷전이고 사고만 치고 다니는 ‘문제아’였다. 영주종합고교 화공과 시절 따낸 화학분석기능사 2급 자격증이 이력의 전부다. 고교 졸업 후 방황하다 어느 날 맘을 고쳐먹고 무일푼으로 상경한다. 화학분석기능사 자격증 덕에 도금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영업, 관리, 기술부 등을 고루 거치며 입사 3년 만에 품질, 공정관리 책임자인 기술부 계장 자리까지 올랐다.

“배경도 돈도 없었지만 기술만 키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덕분에 초고속 승진했습니다.”

24세 되던 해 일하던 공장이 불황을 못 이기고 부도가 났다. 그는 100㎡(30평)짜리 공장 부지를 거의 공짜로 얻다시피 했고 일하던 직원까지 그대로 승계했다. 차츰 빚을 갚아나가면서 도금기술을 더 연마했다. 노력 끝에 화학분석기능사 1급, 특수도금기능사, 전기도금기능사 등 자격증을 줄줄이 땄다. 2001년에는 도금 분야 최고 자격증인 기능장을 취득하고 2007년에는 금속표면처리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최근에는 도금할 때 인체에 해로운 크롬을 사용하지 않는 세계 최초 ‘크롬 프리 도금법’ 기술도 개발했다. 이를 통해 무조건 몸에 좋지 않다고 여겼던 도금도 친환경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도금은 그동안 3D 업종으로 무시당해왔지만 완제품 부가가치를 높이는 모든 산업에 꼭 필요한 기초핵심과정입니다. 술잔, 숟가락에서 자동차, 항공, 우주산업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산업을 받쳐주고 있지요. 뿌리산업이 살아야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정부도 인식해야 합니다. 말로만 지원을 외칠 게 아니라 산업 수요와 연계한 마이스터고를 집중 육성하고 명장들 자부심을 높여야 비로소 뿌리산업이 살 수 있습니다.”

그는 요즘 각 분야 명장들의 제품을 묶은 브랜드 ‘골드스퀘어’까지 내놓았다. 명장과 일반인의 통로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 경기도 안산 산업기술대 1층 로비에 ‘명장의 전당’ 전시장 개설, 김포공항 명품관 입점 등의 업무도 도맡아 했다.

“대개 구찌, 루이비통만 명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명품이 많습니다. 명장들이 정성 들여 만든 제품이 바로 명품이지요. 하지만 명장들이 기술에만 신경쓰다 보니 판매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분야별 명장들 제품을 한데 묶어 브랜드화했습니다. 많이 관심 가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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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 명장

주용부 용호공업사 대표
건강한 칼이 건강한 음식 만들죠

60년 가까이 칼을 다룬 주용부 용호공업사 대표(73)의 손과 팔은 온통 불꽃에 덴 화상 자국으로 덮여 있다.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엄청 굵다. 손과 팔만 보고도 얼마나 많은 칼을 다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4살 때 고향인 청주에서 처음 망치를 잡았다. 전쟁통에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6남매 중 장남이었던 주 대표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버지가 일하던 병원에서 잡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 월급으로는 남은 가족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다.

대장간에서 쟁기, 호미, 도끼 등 농기구를 되는 대로 만들었다. 당시 모든 대장간에서 칼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했던 대장간 주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회칼까지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유심히 칼 만드는 일을 어깨 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일을 배우면서 혼자 실험도 많이 했다. 군부대에서 버려진 체인이나 전쟁 중 비행기에서 떨어진 폭탄 파편을 녹여 부엌칼 재료로 썼다. 이 철을 녹이고 두드려 기존의 무른 쇠와 덧붙이면 칼이 휘어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로에 쓰였던 철로 소 발 편자를 만들면 일반 쇠로 만든 것보다 3개월 이상 오래간다는 점을 유심히 본 때문이다. 기술도 끊임없이 연마했다.

칼 만들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서울로 왔다. 종로 뒷골목에서 놋그릇 닦는 일을 하면서 칼을 만들었다. 스테인리스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 그는 미군들이 쓰고 버린 식기를 고물상에서 구해 이를 녹여 주물을 떠서 칼을 만들어봤다. 이것이 최초의 한국산 스테인리스 칼이다. 종잣돈을 모아 65년 남가좌동 산꼭대기에 무허가 공장을 차린 것이 칼 전문업체 용호공업사의 시초가 됐다. 공장을 차린 뒤에도 기술개발은 계속됐다. 날카로운 칼 끝을 안전하게 ‘붕어 입 모양’으로 둥글린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고, 칼에 눈금자를 새겨 음식 양을 조절할 수도 있게 했다. 오랜 칼질에도 어깨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구멍도 뚫었다. 모두 특허를 받았거나, 특허신청을 낸 상태다.

“좋은 칼은 우리의 식습관을 바꿀 수 있어요. 영양을 파괴하지 않고 음식을 낭비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중요한 칼을 만들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어요. 대형 부엌용품 제조사들도 전통방식으로 회칼을 만들어보겠다고 찾아왔다가는 일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며 그냥 돌아가더라고요. 아쉬운 부분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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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명장

권영진 봉산칠기 대표
무형문화재 사사한 칠기 장인

중요무형문화재 113호인 정수화 선생 전수자이기도 한 칠기 명장 권영진 봉산칠기 대표(51)는 71년 고향 원주에서 상경해 처음 옻칠을 접했다. 답십리에 있는 큰집에 머물며 이웃의 나전칠기 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80년대 들어 칠기 공예인들이 모여 있는 남양주에 자리를 잡았고, 85년에는 정수화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전통 칠 기법을 사사하며 칠기에 눈을 뜬다.

옻은 상처 난 옻나무에서 나오는 진액. 나무의 부패를 막아주고, 항균, 방수, 내열성이 뛰어나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천연도료다. 합성도료와 달리 인체에 무해하기 때문에 가구뿐 아니라 식기 등 생활용품부터 문화재 보존 작업에까지 두루 활용된다. 요즘에는 옻을 원료로 아토피 치료제나 탈모 치료제도 만든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한 게, 칠한 물건이 쓰는 사람의 건강에는 좋지만 칠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작업이라는 점이다. 가끔씩 옻독이 오를라치면 몸이 붓고 가려움증도 생긴다. 반복 작업으로 양쪽 어깨에 견비통이 와서 붓을 잡기조차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다. 말리는 작업도 까다롭다. 옻칠은 주로 습기로 말린다. 똑같이 맑은 날씨에도 습도에 따라 마르는 정도가 다르다. 몇 번을 칠하고 말려야 한다는 기준도 없다. 마음에 들 때까지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문화재수리기능인 자격증을 가진 권 대표는 굵직한 문화재 복원사업에도 참여했다. 대표적인 게 조계사 본존불. 불상에 금박을 입히기 전 옻칠을 꼼꼼하게 해야 금이 잘 붙고 나중에 닦아도 잘 벗어지지 않는다. 명동성당 십자가, 종묘제상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올해 명장이 된 것은 단순히 이런 기능적인 면만 고려돼서가 아니다. 권 대표는 최근 안료혼합기를 개발해 ‘공정개선’을 이뤄냈다. 진득한 옻과 색을 내는 가루가 골고루 섞이려면 얇고 탄성 있는 주걱으로 뭉치지 않게 두 재료를 꼼꼼하게 문질러줘야 한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팔이 아파 귀찮은 작업이다. 그는 비스듬하게 기운 큰 원통 안에서 작은 원통이 구르면서 색을 섞이게 하는 안료혼합기계를 만들었다.

막상 명장에 선정되고 나니 어깨가 무겁다는 권 대표는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많다고 한다.

“명장은 기술자, 기능인이잖아요. 지금까지 기술만 연구하다가 이제 시장에 제품을 내놓으려고 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공예 명장들의 공동 전시 및 판매장이나 작업장이 부족한 실정이거든요. 이런 부분에 대해 정부가 좀 더 실질적인 지원을 했으면 좋겠어요.”



도자기 명장

김옥수 무안요 대표
4대째 가업승계 최초 분청사기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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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수 무안요 대표(55)는 국내 유일의 분청사기 명장이다. ‘분청’은 ‘청색을 분칠한다’는 의미. 조선시대 서민 생활용품으로 사랑받은 분청사기는 일본에도 전해져 그 품질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김 명장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무안의 사기장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도예 기술을 익혔다. 고등학생 때 본격적으로 도예작업을 시작해 작품활동을 한 지 어느덧 37년째다. 지금은 명장 반열에 올랐지만, 도예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미대까지 나온 제가 도예가가 되는 걸 못마땅해 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도예가는 그저 천시받는 공인일 뿐이었으니까요.”

김 명장의 고집은 도예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남들이 대량으로 도자기를 찍어낼 때도 그는 손수 제작하는 전통방식을 고수한다. 물레로 도자기 형태를 만들고, 무늬를 새겨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굽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계 없이 손수 한다. 그래서 하루에 많은 작품을 만들어낼 순 없지만, 대신 땀과 열정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뿐 아니다. 그의 연구실은 인근 도요지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무안분청사기 조각으로 가득하다. 김 명장은 이 조각들을 연구해 전통 문양과 색을 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안분청사기의 전통적인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무안분청사기 재현연구소와 전수관을 설립했어요. 강진이 고려청자의 본산이라면, 무안은 분청사기의 주요 도요지입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전국으로 흩어진 도예가 중 일부가 무안에서 ‘분청’이라는 독특한 도예문화를 만들어냈거든요. 15세기 후반 조정에서 경기 광주에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를 조성했음에도 무안에서는 분청사기의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발굴만 하면 분청사기 유물이 출토되지만, 인근 도요지들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습니다. 옛 도요지들이 농경지, 택지, 묘지로 사용되면서 분청사기 관련 유물들이 훼손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김 명장의 꿈은 무안에 도예 단과대학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것. 지금까지도 개인적으로 20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귀금속가공 명장

이두영 영보주얼리 대표
세공 외길 33년 ‘다중반지’로 특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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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식앵글 판매업체, 맨홀 제작업체, 신발공장을 전전하다 구로구에 있던 주얼리세공공장에 취직했다. 순전히 기숙사가 있다는 소리에 솔깃해서다.

충청남도 부여 출신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찾아다녔으니 기숙사가 절실했다. 말이 기숙사지 33㎡(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낮에는 세공하고 밤에는 소파에 이불 깔고 자는 게 전부였다. 여기서 꼬박 4년 동안 일을 배웠다. 하루 종일 앉아서 금과 은을 늘이고 두드리고 알을 박아넣고 하는 일이 힘들 법도 하지만 소년은 그저 재미있었다. 군대에 가서 했던 유일한 소일거리는 주얼리 디자인이었다.

원래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터였다. 하얀 공책에 각종 반지, 브로치 등 이런저런 주얼리를 그리고 또 그렸다. 올해 8월 귀금속가공 명장이 된 이두영 영보주얼리 대표(50) 스토리다.

군대를 제대하고 명동 주얼리세공업체에 취직했다. 세련된 고급주얼리 세공기술을 배우고 싶어서다. 사장은 경력이 너무 일천하다며 취직은 시켜주겠지만 월급을 적게 주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일자리를 구한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고 사장은 “구로구에서 배운 실력 치곤 대단하다”며 점차 이 대표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87년, 사장이 한국 매장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이 대표가 매장을 인수했다. 영보주얼리는 그렇게 설립됐다.

당시 명동 매장은 고급백화점 몇 곳만 거래했다. 고급백화점 주얼리숍에서 ‘이런 이런 스타일의 주얼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해오면 그에 맞춰 가공해 보내주는 수준이었다. 이 대표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군대에서 그렸던 도안을 바탕으로 주얼리를 만들어 거래처에 보냈다.

거래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영보주얼리는 한국 최고급 주얼리 매장 대부분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단순히 디자인만 한 게 아니다. 이 대표는 수많은 특허등록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2007년에 특허등록된 ‘다중반지’다. 여러 개의 얇은 반지를 함께 낄 경우 각 반지가 돌아가 모양이 이상해진다는 점에 착안해 반지를 연결시켜 돌아가지 않게 만들었다.

한 개도 끼고, 여러 개 겹쳐서도 낄 수 있으면서, 겹쳐 낄 때도 원래 반지 한 개처럼 고정된 모양이 나오는 다중반지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디자인 작업도 꾸준히 한 결과, 국제귀금속장신구대전 대상, 국제주얼리디자인공모전 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현재 10여명의 귀금속가공 기술자를 거느리고 있는 이두영 대표는 “귀금속세공 일이 어렵다며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많지 않은데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컴퓨터로 디자인하면 그 디자인에 맞춰 주얼리 틀이 자동으로 제작된다. 젊은이들이 귀금속가공업에 더욱 관심을 갖고 도전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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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인 명장

장일남 장일남컬렉션 대표
‘춤복’에 날개 달다

장일남 장일남컬렉션 대표(56)의 옷 욕심은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다. 남과 똑같은 일자 교복바지가 싫어 당시 유행했던 나팔바지 모양으로 수선해 입었다. 옷에 관심을 가질수록 화려한 여성복에 매력을 느꼈다.

장 대표가 패션계에 입문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의상전문학교도 없었을뿐더러 남자가 여자의상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장남이었기에 부모님 반대가 무척 심했지만 이를 외면하고 이화여대 앞에 있는 양장점에 서 일을 배웠다.

89년 처음 자신의 의상실을 연 그는 이브닝드레스를 만들었다.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염정아, 당시 최고의 모델이었던 박영선이 그의 드레스를 입었다. 이브닝드레스는 많이 팔리는 옷은 아니지만 재고가 없어 기성복보다 매출이 쏠쏠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브닝드레스 시장이 죽자 새로운 틈새시장을 찾아나섰다.

“우연히 댄스스포츠 대회를 참관했는데 의상이 참 신기하더라고요. 드레스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격렬한 동작에도 옷이 뒤틀리지 않고. ‘이거다’ 싶었지요.”

댄스스포츠 의상에 ‘꽂힌’ 장 대표는 사교댄스 본고장인 영국 블랙풀로 세계대회를 보러 떠났다. 열흘 동안 견학하면서 수영복같이 신축성 있는 소재가 활동하기도 편하고, 춤 출 때도 예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수영복 소재로 댄스스포츠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드레스를 디자인했던 감각이 덧붙여지면서 바로 유명세를 얻었다.

장 대표는 의상에 ‘입체패턴’을 적용했다. 옷감을 평면에 두고 그려서 패턴을 만드는 평면제도와 달리, 직접 마네킹이나 피팅모델 몸에 대고 그려 패턴을 만드는 게 입체패턴이다. 패션 선진국인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입체패턴이 일반적이지만 손도 많이 가고 기술을 요하는 번거로운 작업이라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기피한다. 입체패턴의 장점은 선수의 체형에 맞춰 같은 디자인이라도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 몸의 움직임도 더 자유롭다.

최고의 댄스스포츠 의상을 만들기 위해 직접 댄스스포츠를 배운 그는 매년 댄스스포츠 의상 패션쇼도 연다. 벌써 8년째다. 처음에는 전문 모델을 썼지만 요즘은 진짜 선수들이 옷을 입고 등장해 간단하게 춤도 선보이고 포즈도 취한다. 외피는 패션쇼지만 실제로는 댄스스포츠를 알린다는 측면이 강하다.

대전, 분당, 부산 등에 매장을 두고 있는 장일남컬렉션은 가족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패션을 하면서 만난 부인과 계속 의상실을 꾸려왔고, 몇 년 전부터는 미대를 나온 아들도 일을 배우고 있다.



한복 명장

김영재 김영재혼수방 대표
대통령 한복으로 이름 떨쳐

2005년 APEC이 부산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진 당시, 김영재 김영재혼수방 대표(74)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세계 각국 정상들이 입을 두루마기를 부산에서 유명한 장인 9명이 나눠서 3벌씩 하는데 여기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마’ 했지만 사실 누구 걸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영재 대표에게는 홍콩, 파푸아뉴기니 대표와 더불어 고 노무현 대통령이 배정됐다.

김 대표가 주빈국 수장의 옷을 맡게 됐다는 소식에 언론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당시 노 대통령이 입은 두루마기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97년 여성 1호 명장에 오른 김영재 대표의 저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김 명장이 지금껏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배경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바느질 솜씨가 있다. 그는 조모 서딸막, 어머니 변또남 씨에게 사사했다고 당당히 밝힌다. 당시 먼 지역에서도 찾아올 만큼 바느질 분야에서는 이름난 집안이었다.

김 대표 자신도 지역에서 조금 알려질 줄 알았지 지금처럼 유명해질 줄 몰랐다고 했다. 다만 김 대표가 다른 점이 있었다. 언론에서 옛 유적과 함께 의복이 발견됐다고 하면 열 일 제치고 찾아다녔다. 옛 의복을 보면서 당시 의상을 재현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복이 꾸준히 변해왔지만 분명 그 원형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박물관도 가보고 대학도 가보고 했는데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문화재 복원현장이나 미라나 선조들 사료가 나왔다고 하면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죠.”

이런 과정을 거쳐 김 대표가 복원하거나 새로 만든 한복은 총 12벌로 국내외 박물관에 영구전시되고 있다(국내전시 9벌, 국외전시 3벌). 대표적인 작품은 조선 초 원주 변씨 출토유물인 요선철릭을 복원한 것.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500년의 침묵 그리고 환생’이란 제목으로 전시됐다. 그 밖에 고려복식, 고구려 고분벽화 복식 등을 차례차례 재현했다. 이들 작품은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전통공예관, 원광대 박물관, 단국대 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다.

김 대표는 요즘 천연염색과 개량한복에 푹 빠졌다.

“천연염색, 개량한복을 통해 한복이 우리 실생활에 훨씬 가까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단순히 우리 것이라고 전통한복만 고집할 게 아니라 개량한복을 통해 한복이 친숙한 일상복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다섯째 딸 황성화 씨가 대를 이어 한복 제작을 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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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 명장

양창선 국정사 대표
도제식 교육 벗어나 노하우 시스템化

제주도 태생 양창선 씨가 찢어지는 가난을 뒤로하고 잘 살아보겠다며 배를 타고 처음 닿은 곳이 부산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먹고살기 위해 날품팔이를 했다. 그러면서 당시 최고의 멋쟁이들이 양장점을 드나드는 것을 봤다. 가게 안에서 양복을 재단하는 재단공들 손놀림에 눈길이 갔다.

‘양복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쉽게 일을 내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가게에서 잡부부터 해보라며 받아줬다.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기 시작하던 게 벌써 40여년 전 일이다. 양복 명장인 양창선 국정사 대표(62)는 그렇게 양복 일을 시작했다.

양 대표는 최근 부산 최고 호텔이라는 파라다이스호텔과 부산롯데호텔에 차례로 매장을 열었다. 이곳에 걸린 양복들은 한 벌에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국정사는 원래 양 대표가 창업한 곳이 아니다. 올해로 62년째를 맞는 유서 깊은 곳으로, 양 대표가 3대 사장이다. 창업자는 부산양복협회 초대 조합장을 지낸 고(故) 김필곤 씨. 창업자 작고 이후 2대 김영곤 사장(84)이 이어오다 81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 대표에게 물려줬다. 76년 신사복사진콘테스트에 입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낸 덕분이다.

회사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실력을 기르기 위해 꾸준히 각종 대회에 참가했다. 85년 제19회 전국주문신사복 기술경진대회 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이듬해 제1회 한국남성복 기술경진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실력을 검증받으면서 전직 대통령도 찾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양복명장 칭호를 수여받기에 이르렀다.

양 대표가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요인은 주먹구구식 도제학습법을 버리고 노하우를 시스템화할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일급비밀이 아니라, 노하우를 공개해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을 양성해왔다.

그 결과 양 대표 제자 중 양복 부문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이가 다섯 명, 은메달도 다섯 명이다.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교도소 복역자들을 위한 강의에도 꾸준히 나간다. 복역자들이 만든 양복 100여벌을 판 돈 1000만원을 모두 교도소에 기부하기도 했다.

“명장이란 결국 기능인을 넘어 존경받을 수 있는 인격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올해 목표는 장애인 기능올림픽 선발전에 제 두 제자를 입상시키는 거예요. 남들은 ‘그냥 돈이나 벌지’라고 얘기하는데 전 이게 더 좋아요.”

양 대표는 맞춤양복 학교를 만들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여기에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삼성디자인학교(SADI) 출신 아들 양필석 씨가 든든한 우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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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 명장

장용석 미스터장미용실 대표
‘국내 최초’ 기록 多 미용박물관 개관 꿈

장용석 미스터장미용실 대표(63)가 미용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66년이다. 당시 20대던 그는 ‘왜 남자 미용사와 전문 브랜드를 가진 미용실은 없을까’란 생각을 했다. 그 길로 고향 김해를 등지고 상경해 중앙고등기술학교 미용과에 입학한다. 남자는 장 대표를 포함, 3명이 전부였다.

그는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잘린 머리카락을 주워 또 연습했다. 덕분에 학교 졸업 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손님들의 머리를 다듬을 수 있는 미용사로 자리 잡았다. 당시에 흔치 않던 ‘남성 미용사’라 명동, 충무로 일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명동에서 명성을 얻은 후 ‘독립하자’란 생각으로 당시 패션의 중심지인 부산 광복동에 내려갔다. 당시 부산은 일본과 인접해 신문물의 전파를 가장 빠르게 흡수할 수 있던 곳.

당연히 헤어스타일 유행 역시 서울보다 이곳이 먼저였다. 73년 사촌 형수에게 100만원을 빌려 의자 3개가 달린 미용실을 낸다. 한국 최초 남성 미용사가 낸 ‘Mr. 장 미용실’이다.

미용실은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들이닥쳐 1년 만에 확장 개업을 할 정도로 잘됐다. 장 대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을 다니며 세계 미용 트렌드를 배우고 한국에 소개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통해 그가 만들어낸 ‘최초’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한국인 최초 프랑스 포르밀라국제미용학교 전 과정 수료, 한국 최초 공개 헤어쇼, 석고파마, 물파마 특허, 제네바 국제특허발명전 가발 부문(모빅공법) 금상, 파마 부문 은상 수상 등이 그것.

직접 개발해 전국적으로 유행시킨 머리스타일만 해도 보이커트, 석고파마, 언밸런스단발 등 부지기수다. 이런 공로로 그는 올해 남성 미용사로서는 처음으로 명장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장 대표는 부산 동대신동에 6층짜리 ‘미스터장 미용토탈’ 사옥을 세우고 미용, 메이크업, 가발전문스튜디오 등을 원스톱으로 운영한다.

“80년 프랑스 유학 때 세계 미용황제로 꼽히는 알렉산더 회장이란 분을 만났는데 미용박물관을 갖고 있더군요. 박물관을 보니 세계 유명 배우, 명사들의 머리카락이며 헤어디자인이 집대성돼 있었어요. 저도 제 인생을 집대성한 미용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건물 6층에 공간을 조성 중인데 조만간 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종자 명장

박동복 제일종묘농산 대표
항암기능 갖춘 쌈배추 개발

충청북도 증평군의 제일종묘농산 사무실. 흙 묻은 반팔 셔츠에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꺾어 신은 채,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연신 닦아내며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저 농부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지난해 대한민국 명장으로 뽑힌 박동복 제일종묘농산 대표(56)다.

해 뜨자마자 농원으로 달려가 종자 연구에 매달리다 인터뷰 때문에 잠깐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이란다.

종자로 명장 타이틀을 받은 이는 대한민국에 단 2명. 먹을거리 종자는 박 대표가 유일하다. 그의 주된 업적은 항암쌈배추다.

‘항암’이란 제목을 단 상품은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세상에 수많은 항암상품이 나왔지만, 눈에 띄는 효능이 없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대표가 개발한 쌈배추에는 항암물질로 공인된 베타카로틴이 보통 배추보다 30배 이상 많다. 정부는 물론 많은 대학연구소가 인정한 사실이다.

종자업에 뛰어든 배경이 재미있다. 경영학을 공부한 뒤 81년 국제그룹 회계부에 입사했는데 일이 재미없었다. 또 월급쟁이보단 사업가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영의 처음과 끝을 배울 수 있는 중소기업이 낫다고 판단하고 종묘회사였던 서울종묘로 옮겼다. 이때 경영은 물론 농업에도 눈을 떴다.

“종자는 농업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종자 하나만 제대로 개발해도 거대 기업이 될 수 있겠다고 확신했죠. 몬산토나 신젠타 같은 기업이 그렇잖아요?”

91년 증평에 땅을 사 회사를 차렸다. 경영학 책을 다 버리고 종자 공부만 파고들었다. 2005~2006년엔 그 어렵다는 종자기술사를 포함, 관련 자격증 다섯 가지를 모두 땄다. “경영을 공부한 당신이 무슨 종자 전문가냐”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이후 파고든 화두가 ‘항암’이었다.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암 예방에 좋다고 현지인이 즐겨먹던 순무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습니다. 생존을 위한 농산물을 생산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지금은 품질을 따지는 때인데 앞으론 특정 기능을 담은 농산물이 각광받을 겁니다.”

박 대표는 항암쌈배추는 물론 일반 고추에 비해 5~6배나 큰 임꺽정 고추 등 300여종의 종자를 선보였다. 그의 최종 꿈은 항암배추를 만드는 것이다. 항암성분이 많은 순무와 배추를 교잡하는 방식인데, 10년 넘게 매달렸다.

“농업은 연구가 매우 더딜 수밖에 없어요. 하나의 실험을 위해 1년을 꼬박 보내야 하니까요. 이제 최종 상품이 내년 10~11월에 나옵니다. 전 세계인이 항암배추로 만든 김치를 먹을 날을 꿈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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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조율 명장

유구영 숙명여대 전속 조율사
조율은 악기에 음을 불어넣는 예술

서양에서는 음의 높낮이를 구분해 12개 음으로 분류한다. 이른바 12음계다. 한 음 안에서도 음의 높낮이가 있고, 때로는 피아노로 누르는 음이 정해진 음역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조율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의 기준음을 맞춰주고, 또 아이들이 처음 음에 대한 감각을 키우게 되는 악기입니다. 그만큼 정기적인 조율이 필요하죠. 적어도 6개월~1년에 한 번씩은 조율을 해줘야 합니다.”

올해로 조율 경력 48년째인 유구영 씨(70)는 지난해 피아노조율 부문 두 번째 명장으로 선정됐다.

유 명장은 피아노조율사가 20명도 채 되지 않던 60년대부터 독학으로 조율을 익힌 베테랑으로 78년부터 숙명여대 전속 피아노조율사를 맡고 있다. 국립중앙극장의 조율사를 겸임 중.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이 내한했을 때도 그가 조율을 맡았다.

“피아노조율은 드러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연주를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죠. 공연을 앞둔 피아니스트들은 음의 미세한 차이와 소리톤, 건반의 무게까지 신경을 씁니다. 저는 끊임없이 연주자와 논의해 원하는 음을 만들어줍니다. 피아니스트는 연주에만 신경 써서 훌륭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유 명장이 조율을 처음 접한 건 61년. 당시 유 명장은 정음피아노에 입사해 피아노조율 보조 업무를 배당받았다. 그는 이내 피아노의 음을 바로잡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피아노 공장에서 목공부, 건반부를 거치면서 꾸준히 조율을 익혔고, 3년 뒤에는 아예 조율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가르쳐주는 스승이나 교본도 없어서 직접 부딪치며 조율을 익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접 조율에 필요한 12종의 공구를 새로 만들었어요.”

유 명장은 올해 만 70세지만 요즘도 학교, 공연장, 가정집 등 조율이 필요한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찾는다.

“조율사는 평균 수준 음감과 손이 떨리지만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조율사가 비전이 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피아노는 음을 표현할 수 있지만 아날로그처럼 섬세하지는 않아요. 미세한 음의 차이, 소리톤과 피아노를 누르는 느낌 이 모든 게 음악을 좌우합니다. 한때 전자피아노가 각광을 받았지만 요즘 다시 아날로그 피아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데는 다 이유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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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수리 명장

남재원 골드&해시계 사장
40년 익힌 기술 후배에게 전수 중

남재원 골드&해시계 사장(60)은 우리나라 시계 수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운 형편 탓에 시계수리를 시작했다. 17세였던 66년 친척 소개로 전남 순천의 작은 시계점에서 3년 동안 기술을 익혔다. 이후 상경해 70년 당시 시대백화점에 시계수리기사로 취직했다.

솜씨가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외국 명품 시계 소유자들도 본사 수리센터보다 그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81년에는 롯데백화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여세를 몰아 92년 시계수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시계수리 명장에 등극했다.

남 명장은 시계수리에 필요한 공구도 직접 개발했다. ‘마스터 펀치’와 ‘휴대용 시계의 압착식 조립공구’는 특허까지 받았다. 마스터펀치는 시계밴드 핀을 뽑거나 각종 부속을 조일 때 쓰는 공구로, 혼자 작업할 때 유용하다. 압착식 조립공구는 휴대용 시계의 뒷면 케이스나 베젤(테두리)을 닫을 때 사용한다.

지금은 시계수리와 판매를 함께 한다. 92년 신촌 그레이스백화점(현 현대백화점)에 1호 점포를 열었고, 지난해 현대백화점 미아점에 2호 점포를 개설했다.

“신촌 점포는 큰아들이, 미아점 점포는 저와 작은아들이 맡고 있어요. 작은아들은 대학 졸업 후 보석 공부를 해서 지금 귀금속도 함께 판매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름이 골드&해시계입니다.”

어느새 환갑이 넘었지만 아직도 욕심이 많다. 40년 동안 익힌 전문기술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단다.

지난해부터 동서울대 시계주얼리학과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국내 최고의 시계전문 수리센터를 열고 싶은 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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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검사 명장

송영배전 교통안전공단 검사원
이집트 가서 기술봉사합니다

자동차 검사 명장 송영배 전 교통안전공단 검사원(58)은 지금 이집트에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추진하고 있는 국외원조개발사업에 지원해 자동차 정비 교육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자동차 검사는 운행 중인 자동차가 도로 운행에 적합한지 평가하는 일이다. 엔진, 전장부터 타이어까지 자동차의 거의 전 부분을 능수능란하게 검사해야 자동차 검사 명장이 될 수 있다.

현재 그가 자원봉사를 펼치고 있는 이집트는 자동차 검사 관련 시스템이 열악하다. 그래서 KOICA는 이집트에 한국식 자동차 검사 시스템을 도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KOICA는 자동차 검사에 관한 한 국내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평가받는 송영배 명장을 적임자라고 평가하고 초청했다. 송 명장은 올해 말까지 이집트 현지에서 기술을 전수할 계획이다.

그가 이집트에서 하는 일은 이집트 현지인 강사를 교육시키는 것이다. 이론적인 부분은 해당 교수들이 담당하고, 송 명장은 실제로 어떻게 자동차를 검사해야 하는지 실무를 교육한다.

지난해 자원봉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고민이 많았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동료가 형제이고, 형제는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중에 잘한다고 칭찬을 하거나 인센티브를 주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경쟁 개념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자동차 검사 수업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이끌어내기가 힘들었다. 어려움을 견뎌가며 가르치기를 계속한 요즘엔 ‘이집트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됐다’며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실타래처럼 풀어낸다. 송 명장은 자신이 이집트를 떠난 뒤에도 현지 강사들이 자동차 검사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도록 자동차 검사 종합 매뉴얼을 만들 계획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74호(10.09.22 - 29일자 추석합본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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