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식목사 구속사시리즈 비판(1)
바른 평가 도전장에 분석결과 비성경적인 금서
기독교이단대책협의회
본지는 기독교이단대책협회 정관 목적 제2조에 따라 한국교회가 공유해야 할 정보를 제공하여 객관적인 판단과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시리즈에 대한 최초 한창덕 목사(호 로고스 성경연구원장 / 전주시기독교연합회이단대책위원장 역임) 가 분석 비판한 글<이단연구논문집 : 제1집>5-27쪽)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이 글을 통하여 추천과 축사, 서평이 이단의 규정을 받은 분임에도 구속사 시리즈에 문제가 없는 듯 극찬에 글들은 보수성에 편승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를 살핌에 심각한 자성의 기회를 제공함에 유익하리라 여기는 것은, 한창덕 목사는 분석 비판에서, 박윤식 목사의 저술은 성경의 왜곡과 방향착오 / 성경과 정반대의 해석 / 문맥의 조합과 조작 / 구속사적 해석과 상관이 없는 책 / 추천해서는 안 될 금서와 같은 책으로 결론을 짓는다. 이 글은 박윤식 목사와 비호자측에서 사실 분석과 비판을 촉발하는 원인을 스스로 자초한 바에 따른 결과임을 밝힌다<편집자 주>.
Ⅰ. 박윤식 목사 저술 분석과 비판 자초 원인 제공.
1. 김남식 목사는 서평에서.
“...서평자는 이 책을 읽은 후에 머릿속에 많은 ‘의문부호’가 생겼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첫째, 본서의 저자가 왜 논란에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서평자 역시 저자에 대한 일방적 정보의 전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본서를 정독한 이후에, 왜 본서의 저자가 논란에 대상이 되어야하는지에 혼란과 안타까움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노아의 방주가 120년간 지은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본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120년이 아니라는 것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애쓰는 저자의 진실이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둘째, 저자의 비판자들은 왜 가만히 있는가?.
본서의 첫판이 2007년10월27일 간행되었으니 2개월이 지났다. 이 책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저자의 사상적 문제를 제시해야 하는데, 왜 다들 조용할까?
셋째, 바른 평가를 내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의 1차 자료를 가지고 평가해야지, 비평가의 비평을 근본 자료로 하는 것은 학문적 비평 방법이 아니다. 비평가들 중에는 공정한 사람도 있지만 악의적 비평, 또는 직업적 비평가들도 많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족보를 읽고 서평자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는 바, 한국의 교계가 하나의 사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실체 접근에 너무 인색하다는 것과 모든 것에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입간이나 인간관계, 정치적 논리에 두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화해의 길을 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후5:18-19, 살전5:13, 골1:20), 밝힐 것은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여 우리 모두가 그‘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박윤식 저, 창세기의 족보, 도서출판 휘선, 서울, 3판 1쇄, 2009.4.12.)
2. 박윤식 목사의 글에서.
“작금에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다한 종교들도 자기 교파를 중상모략하고 헐뜯는 일이 없는데, 유독히 우리 기독교에서 종교 연구가임을 자처하는 몇몇 분들이 거짓말을 지어내며 사실을 왜곡한 말과 글로 신실한 사람들을 이단시하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며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 역사의 황혼기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니시는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마18:14, 눅15:4, 요6:39),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뜨거운 열심히 전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거짓말과 중상모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실족시키고 괴롭힌다면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큰 화가 있을 뿐입니다(마23:13).
요한계시록 21장 8에서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둘째 사망에 참예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22:15에서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다고 준엄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길입니다(대상29:15, 벧전2:11). 인생은 마치 석양의 그림자같이 신속히 지나가며, 반드시 한 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에 지나온 모든 삶의 진실들이 그대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거짓과 불경건한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롬13:12),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여 영혼의 등불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환히 밝혀야 합니다(마25:1~13, 잠20:27, 시119:105). 그때 세상은 평강이 강같이, 의(義)가 바다 물결같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사48:17~18).”(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pp. 394~395)
Ⅱ. 한창덕 목사의 분석과 비판.
얼마 전 한기총에서 이단 해제를 시도하다 거부된 박윤식 목사는 1991년 통합 측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고, 1996년에는 합동 측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으며, 2005년에는 합동 측에서 다시 한 번 더 이단으로 확인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공식적으로 분명히 이단자이다.
박윤식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총신대 교수들이 밝힌 것과 같이 통일교와 관련된 사상 때문이다. 통일교에서는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뱀과 하와와의 성관계로 보고, 그 결과 인류에게는 더러운 피가 흐르게 되었으며, 그 더러워진 피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에 피가 생명이라 하며, 생명이 피에 있다 하는데 피가 더러워졌으므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더러워진 피를 제거하고 깨끗한 피로 교체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통일교에서 ‘피가름의 원리’를 주장하는 배경이다.
통일교의 핵심 사상은 다르게 표현 하면 섹스를 모티브로 한 ‘혈통 유전설’이라 할 수가 있다. 죄가 피 속에 있으며, 그 죄는 성관계를 통하여 피가 유전됨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박윤식 목사의 ‘씨앗 속임’과 ‘월경에서 탈출하자’라는 설교가 통일교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또한 피를 통하여 죄가 유전된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혈통 유전설이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물질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아담과의 관계 속에서 이어지거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피라는 물질을 통하여 이어진다는 혈통 유전설은 성경과 다르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모두가 다 죄인으로써 그 죄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할 때(롬5:12, 고전15:22), 그것을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다 성경에는 ‘피에 생명이 있다’혹은 ‘피가 곧 생명이다’(창9:4, 9:5, 레17:11, 14, 신12:23)라는 구절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성경을 조금만 주의해서 읽어보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항이나 소요리문답 21문과 22문 정도만 읽어보아도 알 수가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통일교의 ‘피가름의 원리’에 의한 ‘혈통 유전설’은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명백하게 이단이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동일한 맥락의 박윤식 목사의 사상은 오히려 정통적인 목회자들을 공격하는데 사용되는 이상한 현상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피 속에 죄가 있다는 통일교와 같은 사상을 가진 그의 대변자들은 떼거리로 자신들의 이단적 주장을 가지고 정통적인 가르침을 ‘월경 잉태설’이라 하며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가슴 아픈 문제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박윤식 목사가 이단적 사상을 가졌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하는 문제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윤식 목사의 최근 동향.
박윤식 목사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엇갈려 왔다. 과거에는 ‘통일교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단이다’라고 정죄 되었으며 그것이 대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사상을 가지고 정통이 공격을 당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정환 목사, 예영수 목사, 구생수 목사, 이광호 목사 등이 최삼경 목사를 공격한 사건이다. 어떻게 보면 수적으로도 그쪽이 오히려 대세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또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윤식 목사는 최근에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는 그 책의 출판 배경을 보여주는 동영상에서 1960년대 초에 지리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하며, 지금까지 가르쳐온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 의도는 분명하다. 과거부터의 자기가 가르쳐 온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들어있으니 ‘이것을 보고 판단 해라’혹은 ‘이래도 내가 이단이냐?’라는 암시가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들을 서평 하거나 추천한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민경배, 임태득, 조영엽, 차영배, 주재용, 강택현, 강정진, 예영수, 장광영, 성기호, 도한호, 홍경표, 손석태, 원용국, 김호환, 황의춘, 임승안, 나채운, 이일호, 이학재 박사 등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거의 거기에 버금갈만한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평하거나 추천한 내용을 보면 어안이 벙벙하다.
“저는 이 책이 성서신학(聖書神學), 특히 창세기 곧 구약성서에 관한 것이라 역사신학자(歷史神學者)로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평(評)한다는 것이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서, 전에 결례(缺禮)를 하면서까지 평하기를 고사(固辭)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이 저서가 실제로는 역사신학의 대헌장(大憲章)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성서 주석의 묘미와 통찰의 깊이는 그것이 실상은 역사적 해석의 손길 때문에 의연(毅然)히 빛을 내고 있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역사학(歷史學)에 대한 연구의 전제와 그 방법론 그리고 역사 서술(敍述)에 대한 예리한 판별력과 그 틀(구도-構圖)이 여기 남모르게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 연구의 새 계시입니다. 향후 역사 연구의 새 지표입니다.”(창세기의 족보 중 민경배 교수의 서평 중에서)
민경배 교수는 신학자인 자기도 감히 평하기가 주제넘다 할 정도로 그 책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신학의 대헌장이라 할 만하며, 역사 연구의 새 계시이고, 향후 역사 연구의 새 지표라 하며 극찬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그들의 서평과 추천들은 이제 누구도 감히 다시는 박윤식 목사에게 이단 시비를 벌이지 못하게 하도록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그의 이단 시비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책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그들이 그렇게 극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찬사를 받을 만한 책일까? 그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박윤식 목사의 이름으로 최근에 출판된 책은 모두 다섯 권이다.
첫 번째 책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창세기의 족보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횃불 언약과 그 성취 잊어버렸던 만남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이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언약의 등불,
네 번째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한 언약 속의 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다섯 번째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담긴 영원한 언약의 약속 등이다. 그러므로 이 책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이라는 말이나 혹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이라는 말이 대부분 들어 있기 때문에 모두 다 구속사적 입장에서 써놓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적으로 그 책들은 구속사 시리즈 1, 2, 3, 4, 5. 이런 식으로 되어있어서 이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그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 책들이 비록 하나님의 언약이나 은혜, 전적타락, 구속사, 구속사적 경륜,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단어 등 구속사와 관련된 표현들을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놓았기 때문에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써놓은 책이라 생각하기 쉽다. 더구나 유명한 신학교의 전 현직 총장들과 다수의 교수들이 그와 같이 평하거나 추천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방향에 있어서는 구속사와 관계가 먼 책일 뿐만 아니라 아예 반구속사적인 책이라는 사실이다.
박윤식 목사는 아직 이단에서 해제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분이 아직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통에 속한 목회자라면 당연히 그분을 향하여 고무, 찬양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사수하고 계승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신학교의 교수들은 더욱 더 그래야 한다.
그것은 이단자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현직을 막론하고 일부 유명한 신학대학의 총장들과 교수들은 왜, 무엇 때문에 그에게 그와 같이 극찬을 하며 추천서를 써 주게 되었을까? 더구나 전혀 구속사 적이지도 않고, 성경도 심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서라기보다는 악서이기 때문에 옥석을 구분하여 성도들이 읽는 것에 대해 경고의 나팔을 불어주어야할 그분들이 왜 그랬을까?
물론, 그 책들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좋은 내용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만 하는 것보다 진실을 적당히 섞으면 더욱 치명적이 되는 것과 같이 그 책은 그렇게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책들을 읽고 느낀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면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필자만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책들은 유명인들의 추천 때문이었는지,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30만권 이상이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영향력 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들에 대해서는 누군가 분명히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평이나 구체적인 분석의 결과물을 내어놓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아레오바고 사람들의 멤버 중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번 아레오바고 사람들이 마련한 소중한 발표의 장에 대해 감사하며,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결과물을 내어 놓는다. 오직 주께만 영광 돌려지기를 간절히 소망 한다.
1. 성경의 왜곡과 방향착오.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전부 다 성경의 족보를 다룬 책이다. 그런데 그는 성경의 족보를 다루게 된 이유에 대해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족보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우주의 기원과 인류의 창조, 그리고 타락과 구원에 관한 ‘기원’이 창세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시작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성경 전체의 서론이면서 구속사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사46:10, 48:3).
그러므로 창세기의 핵심인 ‘족보’를 살펴보는 것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족보’는 단순히 한 세대의 나고 죽었던 명단을 나열한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족보 속에 있는 인물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거기 부가되어 설명된 중요한 사건들을 자세히 연구하고 살피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구속사적 경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32:7),“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렘6:16)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 역대의 연대가 기록된 창세기의 족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참된 의미를 알고자 성경을 읽고 여러 책자들을 참고하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습니다.
창세기의 족보 속에는 경건한 역대 족장들의 신앙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고,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선명한 자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여자의 후손(창3:15)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달려온 숨가쁜 심장의 고동 소리, 맥박 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창세기의 족보를 통하여 역대의 연대 속에 감추인 뜻을 깨닫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의 감격 속에서 밤을 지새우곤 하였습니다.”
⑴ 책을 쓰게 된 이유와 목적.
박윤식 목사가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알려주는 동영상을 보면, 그는 한 젊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느냐?’고 질문 했을 때 거기에 대해 답변하지 못한 뒤 입산을 결심하고, 1960년대 초 지리산에 들어가 목숨을 건 기도를 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깨달은 말씀을 칡잎에다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겼는데, 그것을 책으로 내겠다고 약속한 뒤 50년이 지나서 이제야 책으로 내게 된 것이라 하고, 여기에는 ‘타락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그 언약의 맥을 이어온 그 애타는 사랑과 안타까운 심정이 여기에 녹아 있다’라고 하며, ‘한 줄 한 줄마다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노 목회자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그의 책 서문에 있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보통 어떤 책이든지 서문에는 그 책을 쓰게 된 이유나 목적 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박윤식 목사의 책에도 그와 같은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32:7),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렘6:16)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 창세기의 족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족보란 단순히 한 세대의 나고 죽었던 명단이 아니라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이 담겨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의 족보 또한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을 통하여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족보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족보 속에서 경건한 역대 족장들의 살아 꿈틀대는 신앙과 그들의 발자취를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한국 교회에도 더 큰 은혜의 파동으로 퍼져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책 겉표지에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한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32:7)라는 구절을 써 두었다. 그 구절이 바로 족보를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책이 시작부터 잘못되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⑵ 성경 왜곡과 조작.
박윤식 목사가 쓴 모든 책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신명기 32장 7절에 있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는 말씀과 예레미야 6장 16절에 있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들에 근거해서 족보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하면서 족보 속의 경건한 족장들의 신앙으로 인해 감격하고, 그 은혜의 감격을 전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예레미야 6장 16절에 있는 말씀이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말씀인 것과 같이 역대의 연대, 즉 성경의 족보 속에는 경건한 족장들의 신앙이 선한 길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먼저 신명기 32장 7절부터 살펴보자.
① 신명기 32장 7절.
신명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지난날의 광야의 삶을 회고하는 모세의 세 편의 설교로 되어 있다.
박윤식 목사는 신명기에 대해 제 1차 모세의 설교는 신1:1~4:43절, 2차는 신4:44~26:19절, 3차는 27장부터 30장으로 나누고, 그 후는 모세의 죽음과 새 지도자 여호수아의 등장(신31-34장)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첫 번째 설교는 같지만 두 번째 설교는 28장 마지막 절까지로, 그리고 세 번째 설교는 29장 1절에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 하니라”는 말씀과 함께 또 다른 설교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을 때 29장 이후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세의 첫 번째 설교는 신1:1~ 4:43절까지로, 두 번째 설교를 신4:44~28:68절까지, 세 번째 설교는 신29:1~30:20까지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게 보이며, 나머지 또한 새로운 후계자 여호수아와 모세의 노래(신31-32장), 모세의 축복과 죽음(신33-34장)으로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에 비해 사소한 것이며,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신명기 32장 7절의 본래의 의미와, 그 신명기 32장 7절을 통해 바라보는 성경의 전체적인 시각이다.
박윤식 목사 - 성경과 정반대의 해석.
박윤식 목사는 신명기 32장 7절에 있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말씀을 제 1권을 짚을 때 자세하게 밝히겠지만 위대한 족장들의 신앙이라는 측면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아비와 어미에게 물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지, 그들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았는지,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들이었는지를 설명해 줄테니까 그것을 듣고 그들처럼 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심각한 해석상의 오류이다.
박윤식 목사의 모든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그가 모든 책의 표지에 기록해 놓고 있는 신명기 32장 7절은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너희 조상들이 믿음생활 잘 했으니 그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신명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이라는 그 큰 은혜를 잊어버리고 끝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망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뜻으로 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패역을 기억하라.
박윤식 목사는 신명기 32장 7절을 근거로 하여 온갖 원어들을 다 동원해 가며 제1권에서, 그리고 나머지 4권까지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다해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본 받자’라는 식으로 썼다. 그러나 신명기 32장 7절이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은 신명기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누구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할 유명한 신학자란 분들이 그런 엉터리 해석에 근거해서 쓴 책, 그것도 아직 공식적으로 이단자인 그분이 쓴 책에 대해서 그렇게 온갖 찬사를 다해가며 평하고 추천 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 신명기 32장 7절이 나오기까지 신명기서의 내용을 중간 중간 살펴보자.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럽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4:9)
신명기 4장 9절에서는 32장 7절에 있는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말을 거꾸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아비와 어른들에게 물으라’가 아니라 반대로 부모와 어른들을 향하여 자식과 손자들, 즉 ‘후손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의 형태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내용은 같다. 그렇다면 신명기 32장 7절과 같은 이 내용이 박윤식 목사의 주장과 같이 자기들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이 내용은 그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타락하고 불순종했던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9:6~7)
이 내용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이다. 박윤식 목사의 책은 ‘기억하라’는 말을 믿음의 발자취를 기억하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뜻의 말씀은 모세의 설교 속에 계속 된다.
그리고 그 설교들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타락하고 부패할 것을 알려 주시고(31:16절) 모세로 하여금 그것을 노래로 미리 가르치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31:27)
이 말씀은 박윤식 목사가 인용하면서 그의 모든 책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신명기 32장 7절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말씀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런 말을 한 다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장차 불신할 것에 대해 노래를 가르치게 되는데 그 노래 가운데 나오고 있는 것이 바로 신명기 32장 7절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그의 주장과 같이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② 렘6:16.
박윤식 목사가 그의 책에서 또 하나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 예레미야 6장 16절에 있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렘6:16)는 말씀이다. 그는 「창세기의 족보」의 서문에서 신명기 32장 7절에 있는 말씀 중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32:7)는 말씀만을 인용한 뒤 바로 이어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예레미야 6장 16절을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신명기 32장 7절과 예레미야 6장 16절이 서로 같은 뜻이며, 예레미야 6장 16절이 신명기 32장 7절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조합해놓고 있다.
문맥의 조합과 조작.
신명기 32장 7절의 일부와 예레미야 6장 16절의 조합에는 교묘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란 말 중 ‘옛적 길’이란 말은 바로 앞에 있는 신명기 32장 7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앞서 간 믿음의 조상들의 옛 길’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고, 뒤에 있는 ‘선한 길’이란 말은 그 길이 바로 믿음의 길로써 선한 길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구절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두 말씀을 문맥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뚝 떼어놓은 다음, 그것을 다시 연결하여 자신이 원하는 뜻으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며, 사이비들이 주로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6장 16절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아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6:16~19)
예레미야 6장은 예루살렘의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하며, 하나님께서 ‘옛적 길 곧 선한 길’인 당신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돌아오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박윤식 목사와 같이 16절중에서도 일부만 떼어서 보지 말고 17절까지 계속해서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분명히 17절 하반절에는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율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아가페 열린 노트성경」에서는 아예 옆에다 16절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해 오신 참된 길”이라고 주석을 해놓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6장 16절은 박윤식 목사의 주장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하게 살았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선하고 착하게 산 길, 그 믿음의 길을 보고 그리로 행하라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선하고 참된 그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박윤식 목사가 쓴 구속사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으로써 그 책의 모든 전제와 근거가 되는 두 구절이 이 모양이니 나머지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 전주시 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장
호 로고스 성경연구원
한 창 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