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역 아브라함 카이퍼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역
1. 출생에서 김나지움 재학기까지(1827-1855)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8월 29일 주일 오후 1시에 얀 프레드릭 카이퍼(1801-82) 목사의 장남으로 마아스슬롸이스(maassluis)에서 태어났다. 그는 같은 해 12월 3일에 아버지의 집전하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서 1841년에는 제이란트(zeeland)주의 항구 도시 미덜부르크(middelburg)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장래에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꾸곤 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학교 교육 대신에 어머니의 홈스쿨링을 받았다. 그의 공식적인 학교 교육은 아버지의 목회지인 레이던(leiden)시에서 김나지움에 입학함으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849년에서 1855년까지 인문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김나지움 시절에 그는 역사선생인 로버트 프롸인(robert fruin)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롸인 박사는 많은 저술들을 남긴 자유주의적 학자인데, 특히 칼빈주의가 네덜란드 역사에 미친 긍정적인 공헌을 카이퍼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2. 레이던 대학교 재학 시절(1855-1862)
레이던 대학에 등록하여 처음에는 고전어문학을 공부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문학사를 받고(그의 부모들은 현대어에 대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어에 대한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신학부의 학생으로 등록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레이던 대학은 독일의 근대주의적인 신학을 그대로 수입하여 가르치는 자유주의의 상아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교회사 교수인 라우벤호프(rauwenhoff)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공연히 부인하였으며, 교의학 교수인 스콜턴(j. h. scholten, 1811-85)은 자칭 개혁신학자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화란의 슐라이어막허로 불리우던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이와같은 근대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그는 점차로 부모님들에서 물려 받은 전통적인 신앙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카이퍼를 재능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길러지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셨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개혁신학과 신앙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일련의 계기들이 청년 카이퍼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859년 네덜란드 북쪽에 위치한 흐로닝헌(groningen)대학 신학부에서 칼빈과 개혁자 아 라스코의 교회관을 비교하는 주제로 현상논문을 모집하였는데 카이퍼는 기왕에도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었고, 또한 그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던 교수들의 추천에 의해서 이것에 응모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계기로 칼빈을 연구하게 되었고,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란 종교 개혁사에 중요한 기여를 한 폴란드 출신의 종교개혁자 요한 아 라스코(j. a lasco, 1499-1560)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아 라스코의 주저들을 유럽의 어느 도서관이나 중고 서적방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하여 처음부터 그로 절망적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자신의 문학교수인 드 프리스(m. de vries)의 부친이요, 하알렘의 목사였던 드 프리스 목사의 개인 서재에서 유럽의 모든 대학에서도 구할수 없었던 아 라스코 전집을 발견하고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적을 체험한 그는 손쉽게 현상 논문의 저술을 마칠 수가 있었고 최우수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다. 카이퍼는 현상 논문을 손질하여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고, 1862년 9월 20일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빠트릴수 없는 한 가지는 그의 약혼녀에게서 선물로 받은 한 권의 소설책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다. 영국의 여류 소설가인 샤를로테 메리 용어(charlotte mary yonge 1823-1901)가 쓴 the heir of redclyffe(1853)라는 책인데 그 책은 내용에 있어서 소설의 형태로 된 경건 서적이었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생 역정을 비교함을 통하여서, 어머니된 교회(mother church)가 한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감동적으로 그린 이 소설을 통하여서 카이퍼는 이와 같은 교회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the motherchurch, the mother who had guided each of his steps in his orphaned life." 카이퍼는 또한 여기서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 제 4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묘사한 것을 회상한다. 그가 감명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례, 가정 및 공적 예배의 확실한 형식, 감동적인 예배 프로그램, 그리고 영국 교회가 "기도서"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는 점이었다.이러한 체험은 카이퍼의 이상적인 성경적 교회관의 기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3. 목회 시절(1863-1874)
3.1. 첫 목회지 베이스트 교회
카이퍼는 학위를 취득한 후 원래 학자와 교수의 길로 가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목회 임지를 찾던중, 1863년에 헬더란드주 에 속한 베이스트(beesd in betuwe)라는 작은 마을 교회에서 초빙을 받고 목 회를 시작하게 된다. 목회 초년기에 그는 아직도 레이던 대학에서 배운 자유주 의와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접하게 된 개혁주의 사이의 중간 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카이퍼가 부임한 교회 회중의 대다수는 철저한 개혁주의 노선과는 거 리가 멀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열정이 없었다. 다만 그 교회내에는 옛 개혁주의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소수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 중에 특히 방앗간 주인의 딸로서 노처녀였던 삐쳐 발투스(pietje baltus 1830-1914)는 새로이 부임한 젊은 목사 카이퍼를 반겨 맞아 주지 않았 다. 하지만 심방을 통하여 삐쳐와 가진 많은 대화들을 통하여서 카이퍼는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는 이때에 비로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계명성(morning star)이 떠올랐다고 고백하였다.
청년 목회자 카이퍼는 평범한 회중들이나 서민들(kleine luyden 끌레이너 롸이던=little people)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베이스트 교회에서 재직 당시 교회내 선거권이 문제되었을 때에도 그는 서민의 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도 계속해서 교회사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그의 학위논문 서문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요한 아 라스코 전집을 간행하는 일을 마침내 성취하였다. 또한 카이퍼는 칼빈과 동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면서 본의 아니게 정치 분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그는 흐룬 판 프린스떠러와 밀착하게 된다. 카이퍼나 그의 부인은 도시풍의 사람들이었다. 그의 첫 목회는 4년여의 기간으로 끝맺음하게 된다.그는 1867년에 다음의 목회지로 떠나게 되었을 때는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부임 초기에 행한 비복음적인 설교에 대해서 공적인 회개를 하였다.
3. 2. 우트레흐트 돔 교회 목회시절(1867-1870)
카이퍼는 1867년(30세)에 네덜란드의 중부에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 우트레흐트(utrecht)의 돔교회(domkerk)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곳에는 세 개의 국립 대학중 하나가 소재하고 있었고, 보수적인 오스터르제이(oosterzee) 교수가 활동하고 있었다. 카이퍼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교회 개혁의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우트레흐트 교회 재직시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교단총회에서 시행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kerkvistatie) 문제 였다. 영적인 실체를 빼놓고 일상적인 설문조사로 방관하는 총회를 비판했다. (제직회는 교회시찰을 위해 총회에서 보내온 설문조사에 응하지 않고 설문지를 돌려보냈다.) 이러한 반항은 교회언론, 신문 등에 대서특필 되어 급속도로 전국을 술렁이게 했고, 찬반 양론이 펼쳐지면서 국가교회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1867년 3월 1일 발표된 23조에 의해 시행된 1868년 교회선거의 결과는 카이퍼를 비롯한 정통주의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전국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장로, 집사들이 아니라 정통주의자들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는 최종적인 승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전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승리는 투표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많아서였지 결코 정통주의자들이 우세해서가 아니었다. 또한 보수적이고 낙관적인 많은 정통주의자들은 카이퍼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견제하였다. (그들은 "심각한" 싸움을 원치 않았다.)
우트레흐트 시절에 카이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 또 하나의 공적 활동은 소위 ‘학교 투쟁(de scholenstrijd)" 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교육제도, 국공립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교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그 때 그 협회의 명예회장이었던 흐룬 판 프린스떠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젊은 카이퍼는 67세의 흐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흐룬은 그런 카이퍼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흐룬은 카이퍼 박사를 반혁명당(anti-revolutionaire partij)의 장래 지도자로 지목하였고, 카이퍼는 반혁명당을 지지하여 1869년 국민 선거를 치렀다. (그 국민선거의 주관심사는 학교문제였다.
3. 3. 암스테르담에서의 목회시절(1870-1874)
카이퍼는 1870년(33세)에는 네덜란드 국가 교회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게 된다. 이로서 카이퍼의 본격적인 활동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에 카이퍼는 이미 완전히 복음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목회자요 사상가가 되어 있었다. 부임하던 이듬해에 그는 주간지 de heraut의 편집장이 되었고, 1872년에는 일간지 de standaard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카이퍼는 이 두 개의 신문을 편집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고, 이 매체들을 통하여서 그의 명상록들과 방대한 신학연구물들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이 두 신문의 편집일과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의 개혁신학과 사회개혁을 위한 그의 정치 사회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또한 그의 대중적인 필치의 글들은 수많은 화란 기독교인들의 영의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1874년 까지 지속된 그의 암스테르담 목회는 그의 목회 사역으로서는 마지막 기간이 되었다. 왜나하면 1874년에 선거를 통하여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헌법에 따라서 목사직을 사직하고, 장로가 되게 되기 때문이다.
4. 국회의원으로서 학교 투쟁과 자유대학교 설립(1874-1880)
1874년 봄에 치루어진 선거를 통하여 카이퍼는 하우다(gouda)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이 되었다. 이와같이 그가 목사직을 은퇴하면서 까지 정치가가 되고자 한데에는 반혁명당의 당수였던 흐룬 판 프린스떠러와의 사귐이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제한된 목회사역 보다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된 카이퍼는 이제 막 정당 정치가 활성화될려는 시기인 1878년 1월 1일에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arp)을 창당하여서 오랫동안 당수가 되어서 정책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서 반혁명당이라는 당명은 카이퍼의 정신적인 멘토이었던 후룬 판 프린스떠러가 이전에 주장해왔던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의 인본주의적인 정신에 반하는 신본적인 정치 이념을 당의 이념으로 받아드린다는 카이퍼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여정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부닺친 중요한 현안은 바로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진 학교 설립을 국가가 법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공립학교들 처럼 재정을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위 학교투쟁(de scholenstrijd)이라 일컬어지는 이 장기간의 투쟁을 통하여서 마침내는 어떤 종교적인 이념을 표방하는 학교이든지 국가의 법적인 인정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서 카이퍼는 세속화된 국립대학들에 반하여 성경적이고 개혁 신학적인 토대에 근거한 학문을 수행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할려고 몸부림쳤으며 그 결과가 바로 1880년에 암스테르담에 설립한 자유대학교(free university)였다. 개혁신학자 카이퍼는 단순히 개혁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신학교 설립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원했던 것은 개혁신학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모든 학문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종합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설립 이념을 카이퍼는 대학의 설립을 즈음하여 행한 강연에서 명시적으로 대내외에 알렸다. 이 강의의 제목은 영역주권론(sovereignty in the distinctive spheres of human life)이었는데, 그의 주요 논지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1)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홀로 주권적이시며, 2)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으며, 3)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모든 삶의 개별 영역들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9) 그의 개교 강연은 특히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치도 없다”. 그러나 자유대학은 공식적으로는 비합법적인 교육기관이었다. 헌신된 소수의 교수들과 소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교실 창문에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구절인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가 끌적여졌다. 그들은 졸업한다고 해도 학력을 인정받을수도 없었다. 하지만 카이퍼는 열성을 가지고 다양한 과목들을 교수하였다:교의학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설교학,미학등.
5. 교회 개혁 시기(1880-1892)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강의하던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1880년과 1883년의 총회 결의안으로 인하여 다시금 교회내적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즉 총회는 결정하기를 각각의 지교회들은 신임목회자의 개인적인 신앙이 복음적인지 아닌지를 시험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는 커다란 위기로 받아들여졌고, 교회내적 저항운동이 불가피하게 여겨졌다. 당시 암스테르담 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카이퍼는 이와 같은 총회의 결정이 반영하는바 개혁교회의 교리적 탈선을 애통해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애통해 하다는 라틴어 dolore에서 비롯된 돌레안치(doleantie)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내적 개혁운동이기를 원했으나 총회파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교회 분열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가 교회 총회는 1886년에 카이퍼를 비롯하여 암스테르담 교회에 속한 개혁인사들 78명을 정직시켰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200교회, 76명의 목회자와 18만명의 교인들이 국가교회를 이탈하여 카이퍼의 대의명분에 동참하였다. 카이퍼와 지도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미 1834년에 국가교회에서 분리하여(afscheiding) 소규모의 교단을 이루고 있던 화란 기독교 개혁교회측과 연합 운동을 전개하여 성공을 하여 1892년에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새로이 분리되고 연합된 교단은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과 캄펜(kampen) 신학교를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 때에 캄펜신학교에는 h. 바빙크가 교의학 교수로 시무하고 있었다.
6. 생애의 최정상에 선 카이퍼(1890-1905)
영향력있는 신학자요 저널리스이며 다방면에 걸친 맹활약과 저술활동에도 불구하고 화란내의 어떠한 대학도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898년 그의 나이 61세일 때에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수여와 stone-lectures의 강의를 의뢰해왔다. 이에 응하여 그의 생애 처음으로 증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항해하여 미국내에서 여러 모로 환대를 받았다. 그가 행한 강의의 제목은 그가 그토록 사모하는바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이었다. 이 책은 6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1)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2)칼빈주의와 종교, 3)칼빈주의와 정치, 4)칼빈주의와 학문, 5)칼빈주의와 예술, 6)칼빈주의와 미래등의 제목으로 되어있다.26) 카이퍼는 강의 초두에 자신은 칼빈주의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칼빈주의가 어떤 교파의 이름이나 신학 체계의 이름으로만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칼빈주의는 당당한 세계관임을 천명함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 강연에 대한 보더 더 구체적인 분석과 소개는 아래의 v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901년(67세) 카이퍼는 생애에 있어서 최정상에 서게 된다. 카톨릭당과 연합 전선을 편 반혁명당이 선거전에서 승리하여 카이퍼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된 것이다. 1905년 까지 그의 수상 재임 기간 동안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남아프리카 문제등이 일어나서 적지않은 곤욕을 치루었지만, 그와 반혁명당원들에게는 기독교적인 정치를 시험대에 올려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카이퍼가 수상 재임 기간 동안에 이루어 놓은 입법상의 업적 가운데 가장 의미있고 유명한 것은 1905년의 고등고육법안이다. 이 법안이 통과됨으로 비공립학교의 법적인 지위가 처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그가 수상직을 맡게 됨에 따라서 자유대학의 교수직은 헤르만 바빙크에게 이임되었다.
7. 만년의 생애(1905-1920)
1905년도 선거에서 약소한 차이로 패배한 반혁명당은 이후에도 여러번 정권을 잡을수 있었지만, 카이퍼가 수상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다시금 주어지지 않았다. 은퇴를 시점으로 그의 지도권에 대한 다양한 반발들이 자기 당안에서 일어났고, 카이퍼는 대내외적으로 온갖 비난과 비판의 화살을 받았다. 이에 그는 장기간에 걸쳐 지중해의 여러 지역들과 성지순례를 하였으며, 1908년 다시금 정계에 복귀하였지만, 이미 그의 전성시대는 지나간 과거지사가 되었다. 오히려 그의 생애 후반에 그는 예배의식에 대한 중요한 책을 우리에게 남겼으며, 반혁명당의 오랜 지도자로서 전략가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원용하고 정리하여 『반혁명적인 정치학(antirevolutionaire staatkunde)』이라는 두권의 방대한 정치학 관련 저술을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성경책 중의 한 권에 대한 주석을 쓰고자 희구했었던 자신의 소원을 종말론에 대해서 방대하게 기사를 쓰는 중에 그 일부분을 요한계시록 주석을 함으로써 성취하였다.
1918년 11월은 1차 대전의 종결이라는 기쁜 소식과 더불어서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화란의 전국을 긴장케 하였던 달이었다. 당시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p. j. 트룰스트라(troelstra)는 11월 11일 로테르담에서 노동자 계급의 궐기와 혁명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다음날에는 국회에서 같은 내용으로 연설하면서 혁명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화란 국민들의 안정과 보수성 희구열은 강력한 것이어서 오히려 트룰스트라는 삼일만에 자신의 발언이 실수였다고 고백을 하고 말았다.32) 11월 18일 왕궁이 있는 헤이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오란녀 왕가를 지지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동일한 날에 수많은 젊은 군인들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저앞으로 몰려와서 여러곡의 국민노래들과 시편을 찬송하면서 노년의 카이퍼에게 존경을 표하였다. 이와같이 카이퍼는 자신의 일생의 정치적인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자기 고국이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과 1914년에서 1918년 까지 유럽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1차 대전에도 유린되지 않고 보호되는 것을 보았다. 카이퍼는 82세 생일을 넘기면서 그는 중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고, 불과 얼마뒤인 1920년 11월 8일에 서거하였다.
출처 : [이상웅님의 미니홈피]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 이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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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칼빈주의 지도자
자유주의 물결이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갈 때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카이퍼(1837.10.29.-1920.11.8.)는 신학자, 정치가, 목회자, 그리고 사상가로서 현대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부모는 목사인 헨드릭 카이퍼와 헨리에트 여사였다. 그의 출생지는 마술루이스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라이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학생시절에 정통신앙을 받아들였다.
1863년에 그는 라이덴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서 일하였고 한 일간신문의 집필로, 그리고 기독교 주간지의 편집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874년 카이퍼는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877년까지 일하였다. 1880년 그는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교를 창립하였다. 그후 20여년긴 대학의 내외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으며 이 기간중에 화란의 교회사 및 정치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그의 뚜렷한 발자취는 그의 능력과 고결한 인격, 그리고 초인에 가까운 그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1907년 그의 70회 생일은 국경일로 선포되었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스토운 강의는 칼빈주의에 관한 강의였으며 이것은 책으로 출판되었고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다. 82세에 그는 메시야라는 대작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고 있었으나 1920년 11월 8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카이퍼의 관심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지식의 어떤 부문도 생소한 것이 없었다. 그와 견해를 달리했던 많은 사람들도 그를 가르켜 열개의 머리와 백개의 손을 가진 적수라고 말하며 존경했다. 카이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우리시대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예찬하며 사랑했다.
카이퍼의 이러한 힘의 비결은 무엇인가? 1897년 카이퍼는 다음과 같은 그의 열망을 고백했다. '하나의 소원이 나의 생애를 지배하는 열정이 되어왔다. 하나의 높은 정신이 나의 마음과 영혼을 가시처럼 자극하여 왔다. 나에게 부과된 그 거룩한 임무로부터 도피하기 보다는 차라리 생명의 숨결을 나에게 거두어 가라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다시 가정과 학교와 국가에서 재건될 것이며 성경과 자연이 증거하는 주님의 계명을 국민의 양심속에 되새기고 국민들은 다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심오한 신학자가 뜨거운 마음을 가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매주 경건의 명상을 저술하는 시간을 가졌고 2천여 개에 이르는 명상을 기록했다. 그 글의 성격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이퍼는 말하기를 칼빈주의의 영역이 좁은 의미의 신앙 고백적 해석으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루터는 칭의에서 출발하였으나 칼빈은 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 즉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우주론적 원리에서 출발했다.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교회의 제도에 그치지 않고 생활의 원리로 발전했으며 교리의 구성을 위하여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세계관을 창조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문화적 사명을 찾는다. 이 문화적 사명이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다고 본다.
그는 일반 은총이론을 근거로 하여 타락이전의 문화적 사명이 타락 이후에는 일반은총으로 나가 불신자들에 의한 문화창달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카이퍼의 생애를 보게 되고, 그 가운데 역사 하신 하나님도 만나게 될 것이다.
글쓴이 : Gene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