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생들의 ‘직설화법’
“선생님, 머리 묶으면 얼굴이 커 보여요!”서울의 한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인 김모 교사(31·여)는 얼마 전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출근했다가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학급의 한 남학생이 김 교사에게 “청바지는 어울리지 않아요. 내일부터는 꼭 치마를 입고 오세요”라며 ‘충고’를 한 것.
이 학생의 말에 신경이 쓰였던 김 교사. 평소 수업하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주 입지 않던 검은색 정장 원피스를 입고 다음 날 출근했다. 이 모습을 본 그 남학생의 한마디는 이랬다. “선생님, 오늘은 정말 예뻐요.”
김 교사는 “요즘 초등 2, 3학년들은 교사의 그날그날 옷차림, 헤어스타일, 화장에 대해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기까지 한다”면서 “요즘엔 아침이면 외모를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무리 거침없고 솔직하게 말하는 요즘 신세대라지만, 초등 저학년마저 ‘직설화법’을 날리며 부모나 교사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특히 초등 저학년 담임교사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우도 많다”고 털어놓는다. 수업이 재미없으면 “선생님, 수업이 완전 재미없어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건 기본. 어렵고 복잡한 수업내용이 등장하면 “어려워요. 공부하기 힘들어요”라고 말하기까지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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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젊은 여교사의 외모나 옷차림을 평가할 때는 ‘독설’에 가까운 한마디를 날리는 저학년들도 많다는 것.
경기의 한 초등학교 3학년 담임 홍모 교사(28·여).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긴 생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다니는 홍 교사에게 어느 날 학급 여학생 한 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곤 갑자기 머리에 묶었던 고무줄을 확 당겨 빼버리는 것 아닌가. 당황한 홍 교사. “왜 그러느냐”고 묻자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은 얼굴이 동그래서 머리를 묶으면 얼굴이 더 커 보여요.”
홍 교사는 “전날과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나왔는데, 학생들이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느냐’며 집단으로 ‘구박’을 한 적도 있다”면서 “선생님에 대한 관심 때문인 걸 알지만 표현이 너무 직설적인 탓에 당혹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초등 저학년들이 이렇듯 거침없는 직설법을 지나 때로는 ‘싸가지 없게’ 느껴질 만큼 독설을 날리는 현상에는 세태의 변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요즘 부쩍 늘어난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많은 초등학교 교사들의 주장이다. 초등 저학년 때부터 아이돌 가수를 꿈꾸면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이 참가자에게 독설을 퍼붓는 모습을 ‘쿨’하게 생각하게 된 초등생들이 이런 화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는 것.
초등 저학년들의 이런 직설화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하다 보니 아이들의 성격을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다”면서 “수업 중에도 ‘재미있다’ ‘재미없다’면서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곧바로 해주므로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수업 방식을 금방 알 수 있어 수업 준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