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급증하였다. 또한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결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구성되고 1906년 노동당이라고 개칭하였다. 노동당은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위협을 느껴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정책을 입법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실현시켰다.
독일의 팽창정책으로 열강의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으로 타격을 받고 러시아혁명에 휩싸인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해외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영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의 승인은 대영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노동 양대 정당의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구성하였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 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실패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다.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성과 여성의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개발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집권하여 독일의 팽창정책이 또 다시 노골되었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영국은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 처칠 총리가 거국일치 내각 구성으로 전쟁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전쟁 초기 프랑스가 항복하게 됨으로써 전황은 영국에게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 등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바뀌었다. 미영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를, 1945년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 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처칠 대신 새 총리로 임명된 애틀리가 전후 강화회담인 포츠담회담에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 민간항공· 탄광· 철도· 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집권한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비약적인 발전에 눌려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과 이에 소극적이었던 입장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유럽 내에서 그동안 누렸던 상대적 높은 지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노동당 정부에 이은 E.히스 보수당 정부가 유럽공동체(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여, 마침내 영국은 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내부적으로 안고 있으면서도 유럽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국가로서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연합군 수뇌부 제2차 세계대전시 북아프리카에서 가진 정상회담으로 앞줄의 왼쪽무터 미국 작전대장 킹, 영국 수상 처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보이고 그 뒤로 이스메이 장군, 모운배튼경 등의 참모들이 서 있다. 출처: 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