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gettyimages/멀티비츠 |
힘든 대회가 될 것이란 전망은 있었지만 이건 일러도 너무 이른 패퇴다. 무너진 제국, 무적함대 스페인 이야기다.
스페인이 무너졌다. 그것도 지독히 무너졌다. 2패로 조별리그 탈락이 일찌감치 확정했다. 네덜란드에 1-5 대패에 이은 칠레에 0-2 완패다. 1골 넣고 7골을 내준 참패 수준의 몰락이다. 디펜딩 챔피언이 1차리그에서 탈락한 것은 월드컵 80년 역사 통틀어 5번째 일이다. 1950년과 2010년 이탈리아, 1966년 브라질, 2002년 프랑스에 이은 디펜딩 챔피언의 붕괴다.
스페인이 최근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뿐 만이 아니다. 유로2008과 2012 등 최근 유럽과 지구촌 메이저 대회를 석권한 스페인대표팀이다. 이번 조기 탈락의 충격이 더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한 번이 아닌 한 시대를 지배한 스페인이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 몰락에 가까운 수순을 밟게 된 것일까?
스페인 축구가 무너진 7가지 이유를 정리했다.
① 티키타카의 종말인가?
티키타카란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다. 축구에서 짧은 패스로 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말한다. 티키타카의 대명사는 바르셀로나와 그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스페인대표팀이다. 짧은 패스, 높은 볼 점유로 티키타카 축구의 한 시대를 호령한 바르셀로나와 스페인대표팀이다. 티키타카의 스페인대표팀은 유로2008, 2010월드컵, 유로2012 연속 우승으로 이 시대가 자신들의 시대임을 증명해 보였다. 헌데 무너졌다.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 조별리그조차 통과 못하고 철저하게 무너졌다. 스페인대표팀의 이번 몰락은 티키타카 축구의 종말과 연결되면서 시선을 더욱 주목시키고 있다. 과연 티키타카 축구의 종말일까? 결론부터 보자면 너무 빠른 단정이다.
티키타카 축구의 대명사 스페인대표팀은 무너졌지만 티키타카의 철학을 가미한 독일대표팀 등은 여전히 건재하다. 독일대표팀 축구를 완전한 티키타카라 하긴 어렵지만 과거의 직선적인 긴 볼 축구에서 짧은 연결이 중심이 된 티키타카식의 축구를 접목한 스타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티키타카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스페인대표팀의 몰락이 티키타카 축구의 종말론의 근거로 쓰이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곧장 티키타카 축구의 종말을 선언하기엔 독일의 사례 등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또 세계 축구 전술 역사의 흐름을 보면 하나의 사조가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고,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닌 모방과 창조라는 방식을 통해 돌고 도는 사이클을 보여 왔다는 점에서 티키타카라는 하나의 사조가 완전한 종말을 고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티키타카 자체의 종말이 아닌 티키타카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는 표현이 합당하다.
② 한 시대의 종언
한 시대의 종언인 것이다. 티키타카 흐름은 이어지겠지만 이의 상징인 스페인축구의 시대는 일단락되는 흐름이다. 훗날 그들의 시대가 다시 올 수는 있겠지만 이어진 시대는 여기서 마무리라 할 수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스페인축구 전성시대의 마지막인 것이다.
삶의 권세가 그렇듯 축구 역사의 권력 지도 역시도 권세가 10년 넘게 지속된 경우는 드물었다. 1950년대 레알 마드리드, 1970년대 아약스, 1980년대 분데스리가, 1990년대 세리에A의 시대도 10년을 넘긴 경우가 없었다. 권불십년이었다.
이는 세대교체 흐름과 맞물리는 일이다. 특정한 팀이 아무리 강했다 하더라도 10년이면 주축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떨어지고 팀을 떠나고 하면서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세대교체 과정을 밟는 것인데 시대를 호령하는 막강한 팀이 연속해서 만들어지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 전환기에 겪는 혼란과 어려움이다.
또 한 시대를 호령하다 보면 우승과 정상에 대한 목마름 즉 동기부여 측면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꺾이는 대세 하락장에 놓일 가망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스페인의 16강 진출 실패 직후 샤비 알론소는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동기부여의 굶주림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③ 집중 타깃과 전술 대응
스페인축구의 전성시대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상대팀들은 스페인축구를 잡기 위해 집중적으로 분석, 연구해 왔다. 스페인식 패싱과 점유 축구에 대한 대응과 공략법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난 시즌 유럽 프로축구계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이 강력한 수비 블록과 높은 압박 위치, 공을 끊어낸 뒤 단시간에 상대 골문 쪽으로 접근해 마무리하는 형태 등으로 바르셀로나 등 점유 축구를 괴롭혔고 또 무너뜨렸다.
대표팀 축구가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스페인대표팀을 무너뜨린 네덜란드와 칠레는 매우 닮아 있었다. 스리백을 바탕으로 높은 위치의 압박(하이 프레싱 전술)과 빠른 공격 전환 등으로 스페인대표팀을 무너뜨렸다. 지난 시즌 프로무대에서 바르셀로나 등이 무너진 상대 공략법과 닮아 있는 형태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대표팀은 최근 몇 년간 집중적인 공략 타깃이 됐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한 고리가 하나 둘 드러나면서 절대 1인자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 브라질월드컵은 그 흔들림의 최후를 확인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은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다.
스페인의 칠레전 라인업 |
④ 자존심 혹은 고집, B플랜이 없다
바르셀로나가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대표팀도 상대의 집중 분석과 대응에 막힐 때 티키타카의 A플랜 외 B플랜이 없다는 게 치명적 약점이었다. 티키타카는 필시 공간을 필요로 한다. 공간이 있어야 패스하고 움직이는 티키타카의 기본 형태가 가동된다. 하지만 티키타카를 상대하는 팀들은 이러한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해, 특히 슈팅을 때릴 수 있는 위험지역을 강력하게 틀어막는 중앙 밀집 수비를 펼쳤다. 이럴 때 좌우 측면으로의 넓고 빠른 전환과 이은 골문 정면으로의 높은 볼 승부 등의 플랜B로 상대를 흔들 필요가 있었지만 바르셀로나도, 스페인대표팀도 고집스럽게 하나의 플랜과 옵션만을 고집하며 스스로를 고립이란 함정에 가두는 패착에 빠지고 말았다.
부상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점유 축구와는 다른 옵션이라 할 수 있는, 터치라인 돌파 유형의 나바스 카드를 비롯해 포스트플레이와 높은 볼 싸움을 펼쳐줄 전방 공격수 네그레도와 요렌테 카드 등을 뽑지 않은 것과 연결된 아쉬움이다. 상대는 몰아넣고 공략하는데 스페인대표팀은 벗어나 다른 곳을 쳐들어가는데 부족했고 인색했다. 무너지고 막힌 건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일종의 자기도취와 함정에 빠진 스페인대표팀이었다.
⑤ 맞지 않는 옷 디에고 코스타
브라질에서 귀화시킨 디에고 코스타는 완벽히 실패한 카드다. 라리가와 유럽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검증된 디에고 코스타의 개인 기량을 뭐라 하려는 게 아니다. 바르셀로나를 깨기 위한 전술로 재미를 봤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마지막 피니셔 디에고 코스타와 그 상대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주축이 된 스페인대표팀의 허리 아래 라인은 맞지 않는 옷처럼 부자연스러웠고 거추장스러웠다.
디에고 코스타는 바르셀로나 특유의 리듬감에 자꾸만 머뭇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우는 공을 끊거나 잡게 되면 곧장 빠른 직선 연결로 디에고 코스타에게 전달하고 코스타가 이를 마무리하는 형태지만 스페인대표팀에선 계속해서 짧은 연결로 썰어 나오다 보니 동료가 공만 잡으면 배후로 뛰어 들어가려는 디에고 코스타의 움직임이 오프사이드에 빠지거나 오프사이드 포지션에 들어갔다 나오는 통에 역동작에 걸려 타이밍을 놓쳐 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델 보스케 감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반 디에고 코스타와 같은 팀에서 뛰는 코케를 투입해 코스타의 움직임을 살려주려고 했지만 선수 한 명 교체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스타일과 호흡의 문제와 함께 디에고 코스타가 시즌 막판 햄스트링을 다친 것도 특유의 저돌적인 돌파와 침투 능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연결됐다.
⑥ 괴멸을 부른 카시야스 중용의 고집
최악의 선택 중 하나였다. 카시야스 골키퍼의 중용은 이번 대회 델 보스케 감독의 패착 중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네덜란드전까지는 그렇다 쳐도 네덜란드전에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카시야스 골키퍼를 칠레전에 다시 선발 기용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사실 카시야스 골키퍼의 이번 대회 중용 자체가 무리수였다. 폼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최근 2시즌 동안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전 키퍼로 뛰지 못한 카시야스다. 디에고 로페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았던 카시야스다. 지난 시즌엔 라리가 2경기 출전에 그쳤다. 물론 델 보스케 감독으로선 A매치 150회를 넘긴, 메이저대회를 석권할 때마다 골문을 지켰던 카시야스의 경험적 경쟁력에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전에서 큰 실수 등 수비진 전체에게 불안감을 확장시킨 카시야스를 칠레전에 또다시 중용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카시야스는 칠레의 두 번째 골 장면에서 산체스 프리킥 펀칭 미스로 또 다시 실점을 내주며 스페인 몰락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데헤아가 부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나폴리에서 좋은 시즌을 보낸 레이나 키퍼가 있었다. 최악의 폼임에도 카시야스를 중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카시야스 커리어 최악의 월드컵 무대다 ⓒgettyimages/멀티비츠 |
안 되고 망할 때는 주위에서 볼 때 상식과도 같은 일과 선택을 엉뚱하게 내리곤 한다.
⑦ 또 다시 드러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불협화음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스페인대표팀의 고민 중 하나는 중앙 수비라인의 조합 문제였다. 세르히오 라모스와 헤라르드 피케의 콤비네이션이다. 두 선수의 재능은 공히 라리가 최강이지만 나란히 공격적 성향을 갖고 있는 등 밸런스적인 측면에서 불안 요소를 드러냈었다. 때문에 델 보스케 감독은 하비 마르티네스를 중앙 수비로 내려 또 다른 조합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고민을 매듭짓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피케와 라모스 조합 문제는 두 선수 스타일의 조합 고민이었지만 오래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선수들 간의 원활한 팀워크 구성의 어려움이 끼친 불편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잘 될 때는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는 서로를 믿거나 독려하는 모습이 사라진 가운데 팀으로서 강하게 수비하는 조직력이 사라져버리고 만 스페인대표팀의 모래알 조직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