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순전한 기고자의 주장으로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고신 신앙’을 밝히자 애양원은 폭발했다.
1. 손양원의 장례식
아버지는 1950.9.28.에 순교했고 장례식은 10월 13일이었다. 15일이 걸린 이유는 부산에서 고신측이 와야 했기 때문이다. 선교부는 순천노회와 애양원이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신측이 진행해야 한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렇게 장례 기간 내내 외부적으로는 눈물과 존경이 넘쳤으나 내적으로는 애양원의 운영권을 쥔 보이열 원장과 어머니가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2. 장례식의 주도권 분쟁
선교부는 아버지가 생전에 고신측을 반대하는 순천노회로 소속을 옮겼으니 순천노회와 애양원이 장례를 주관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어머니는 고신의 운동이 교권 투쟁으로 나가기 때문에 노회를 옮긴 것이지 신앙은 변한 적이 없고 남편의 순교도 고신 신앙에서 순교했으니 장례 주관만은 고신측에게 맡기겠다고 버텼다. 순천노회는 일제 말에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애양원은 가족을 핍박했다. 또 해방 후에는 고신을 제거하던 배후가 선교부였다. 그런 이들에게 남편의 장례식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 어머니 입장이었다.
그러자, 선교부는 어머니가 원한다 해도 아직 패잔병과 빨치산이 준동하여 여수로 오는 교통편이 문제라고 막았다. 이에 어머니는 가매장을 해놓고 무기한 기다린다며 버텼다. 이 소식을 들은 보이열 원장은 격분했다. 당시 보이열 원장은 WCC 입장을 분명히 했다.1) 당시의 WCC란 교회 이름이면 무조건 형제라고 주장하면서 향후 천주교와 다른 종교까지 넓혀 가던 초기였다. 원장은 매사에 단호한 분이지만 장례식은 어머니 입장을 이길 수 없었다. 그 대신 장례를 마친 후에 애양원에서 고신을 완전히 척결하고 WCC로 방향을 잡으면서 어머니는 일제 때보다 더 혹독한 환란을 겪어야 했다.2) 천사처럼 떠받들다가 천하 죄인으로 취급하던 급변이 몇 번이었던가. 그렇지만 어머니는 강한 분이었다.
남편이 타협 없이 걸어 간 길, 이제 홀로 가야 한다. 애양원과 교계의 변심은 일제 때 겪어 봤다. 남편 장례에 멋모르고 결심하는 과부들과는 다르다. 겪어 본 환란을 다시 각오하는 투사다. 아버지 순교 직후 출생한 사진 속의 아이야 무엇을 알겠는가? 지금은 그 각오를 잇고 있다.
3. 결국 장례식은 고신측이 주도했다.
장례의 사회자는 오종덕 목사님이었다.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거치는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이다. 설교는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님이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가?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부가 선교하고 길러 놓은 호남지역이다. 여수 순천은 모든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선교부의 자녀이며 양떼라고 할 만한 곳이다. 애양원은 그 중에서도 제일 중심부이고, 법적으로도 시설 전부가 선교부 재산이었다. 특히 보이열 원장의 운영 방침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다.3) 그런 그가 해방 후 고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고신측이 주도했다. 애양원과 노회 인물은 보조하는 순서를 맡았으나 그마저도 아버지와 신앙이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 그런데 고신의 명단이 이상했다.
1. 성의는 표시했으나 냉랭했다.
박윤선 오종덕은 고려신학교의 주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신의 출발과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보면 고신이 성의를 표시할 정도였지 마음을 기울였다고 보기 어려웠다. 당시 1950년의 전쟁을 전후하여 장로교 내부는 고신 측과 이에 맞선 총회측이 생사를 걸고 싸우고 있었다. 고신 내에서 오종덕은 성경에 대한 권위자였고 박윤선은 학자였을 뿐이다. 총회와 맞서던 고신의 실제 지도부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모두가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순교와 장례식을 둔 대치, 그리고 앞날에 애양원 안에서 고신 신앙으로 선교부와 싸울 상황을 두고 고신의 속마음이 차가워 진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순교 직후 고신을 이끄는 지도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고신 출발의 실세는 한상동이다. 설립 때는 주남선을. 1회 때는 이약신을 앞에 세웠으나 실세는 ‘한상동’이다. 그리고 한상동의 손발이 되어 온갖 행정적 처리를 도맡은 인물이 그 동생 한명동이다. 10회까지의 총회장을 보면 더욱 고신의 실세는 명확해진다. 윤봉기, 오병세는 훗날 총회장이 된다. 내부적으로 실세거나 중요한 측근들이다. 고신 내부의 인물사에 대하여 나는 사실 잘 모른다. 그렇다고 주요 인물들을 알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2. 손양원의 소속과 입장: 고신과 순천노회
1948년, 고려신학교가 출발할 때 아버지는 소장파로서 총무를 맡았다. 그 말은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를 회개하고 교회를 정화한다는 운동에 작정하고 나섰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상동이 주도하는 고신측의 방향이 교권 투쟁으로 흐르자 아버지는 자신의 노회 소속을 경남노회에서 순천노회로 옮긴다. 누가 봐도 여수에서 부산까지 오가는 교통편이 너무 멀었고 전국에 이어지는 사경회 인도의 일정이 많았으며, 애양원 교회와 담임 목사의 노회 소속을 일치 시키려는 행정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노회의 소속을 옮기자 순천노회는 경남노회의 고신 운동을 청산하고 순천노회의 WCC 입장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라며 환영을 했다. 오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