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지난 4월 중순,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란 책을 펴냈다.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북핵 문제의 유일하고 궁극적 해결책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임을 논증한다. 마치 올해 초부터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등 남북미 지도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작업을 예견한 듯하다.
이삼성 교수는 이 책에서 북한은 이미 핵무장국가이며 이라크, 리비아와 같은 좀비국가가 아니라면서 한미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참수작전, 또는 남한의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는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핵확산 금지조약(NPT)이라는 국제 규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백인정권 시절의 남아공, 인도와 파키스탄이 미국 등 서방의 묵인과 은밀한 방조 하에 핵무기를 개발‧보유한 사실을 들어 NPT 체제는 미국 등 강대국의 국가이익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따라서 국제법적 원칙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정치화된 권력정치의 영역이라고 비판한다. 4반세기에 걸친 북한의 핵무장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위선적 비확산정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법은 남북, 북미 간의 군사적 대립을 해소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미일 동맹 간의 군사 대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에서 핵무기의 배치는 물론 사용까지 금지하는 동북아비핵무기지대의 창설, 그리고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 등 미일동맹과 중국 간 잠재적 대결지역을 비군사화하는 평화벨트 구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교수는 최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이 다소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사용하던 '전략적 인내'보다는 훨씬 전향적인 안을 들고 북한을 만났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에서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였다는 식으로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최근의 한반도 국면에 한국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진보 정권이 미국 정부 안팎의 협상론에 힘을 실어주면 강경파도 협상을 받아들일 명분을 얻게 된다면서 어떤 한국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미국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1편 보러 가기 : 북한 내부 엘리트 vs. 미국 내부 강경파, 그 내막은?)
▲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비핵화에 대해 미국이 북한에 요구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입장에서도 미국에 요구사항이 있을 것이다. 우선 '북한 비핵화가'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금지를 요구하지 않을까?
이삼성 : 2016년 7월 북한은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조선반도 전역의 비핵화"라고 밝혔다. 그것은 북한뿐 아니라 "남핵 폐기와 남조선 주변의 비핵화"를 포함한다는 얘기였다. 이는 군사훈련 내지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미국이 수시로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는 전략자산들과 그것들이 탑재할 수 있는 핵무기들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을 염두에 두면서 순환 배치하는 전략핵과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등 한반도 주변에 배치 가능한 전술핵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지난 2010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NPR(핵태세검토 보고서)에서 전술핵 장착용으로 쓰이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폐기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NPR에서는 이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이 계획을 포함해 자신들에 대한 재래식 공격을 금지하고 핵 선제사용 옵션을 폐기하며 한반도 주변에서 북한을 염두에 둔 전략 전술핵 배치를 배제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안심하고 비핵화 조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가 북한의 비핵화 완료 후가 아니라 평화협정 이행의 초기 내지 중간 단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2015년 7월에 타결된 이란 핵협정의 경우, 유엔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심 시설들이 협정에서 정한 일정에 따라 해체되었다고 확인한 2016년 1월 16일이었다. 북한은 이란과 달리 동아태 미일동맹 군사력을 위협하는 각종 중거리급 미사일과 미국본토까지 사정권에 둔 ICBM과 결합한 핵무장을 완성한 상태에서, 그리고, 중국이라는 강력한 군사동맹을 배후에 두고 협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핵화를 내포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북한은 핵무기 완전 폐기가 아닌 모종의 중간 단계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할 것이다.
비핵화 조치는 진실하게 이행될 경우 일단 진행하고 나면 불가역적이다. 그렇지만 외교 관계 정상화나 경제 제재는 가역적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불가역적인 사항을 가역적인 것과 맞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동시적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든지, 아니면 경제제재 해제와 외교 관계 정상화를 적어도 비핵화 중간단계에서는 이행하기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볼턴 보좌관과는 다르게 체제 안전 보장, 경제 지원 등을 약속했다. 지난 9일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을 때 체제 안전 보장과 관련한 합의도 나왔을까?
이삼성 : 북한에서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인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아마도 북한이 납득하고 마음 놓고 비핵화를 할 수 있는 제안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간 협상이 성사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폼페이오는 평화체제와 관련해 '전략적 인내'보다 훨씬 전향적인 안을 가지고 북한을 만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를 완전히 이행하기 전에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을 받을 만한 제안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북한은 국가안보보과관 자리를 차지한 볼턴이 주도하는 선핵폐기 후보상의 논리가 언제라도 유력해질 수 있어 불안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북한은 김정은의 두 차례 방중에 따른 중국과의 관계 복원을 통해 나름의 지렛대를 확보한 상황이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체제 보장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완전한 비핵화의 길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한에 균형외교 의지를 가진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권이 평화협정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이 정권을 다리로 삼아 비핵화를 전제로 한 북미 정상회담까지 가도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어도 맥스선더 군사훈련과 B-52 이슈가 불거지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을 긴장시켰다. 북한이 미국과 대타협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중국을 긴장시킨 것이다. 2017년 12월 유엔에 의한 실질적 대북 제재에 동참한 중국을 지켜보면서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균형외교를 징검다리 삼아 대담한 대미외교를 펼침으로써 일종의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의 미국을 건드려 서쪽의 중국을 자극함—를 행한 꼴이다. 이로써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복원을 이끌어냈다. 이 복원된 관계를 통해 북한은 미국과 협상에서 비교적 안전한 비핵화를 추구할 수 있는 협상의 지렛대를 얻었다. 성동격서가 성서격동(聲西擊東)--서쪽의 중국을 건드려 동쪽의 미국을 자극함—으로 이어진 모양새다.
북한이 중국에 완전히 종속돼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 것은 한국의 균형외교다. 그것이 북한의 자주외교를 이끌어내고 가능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남북 간의 공조로 한반도의 새로운 진로를 뚫어냈다고 볼 수 있다. 즉 핵무기를 들고 있는 북한의 자주외교와 민주화된 남한의 균형외교가 만나면서 현재 국면까지 일이 진행된 것이다.
프레시안 :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어떤 요구가 있을까? 북한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 있을 텐데?
이삼성 :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지난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했던 기록이 있다. 당시 6월 14일 오후에 열린 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에서 주한미군의 균형자 역할을 인정했다고 한다.
▲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이삼성 지음, 한길사 펴냄)
주한미군이 남한의 북침을 막아주는, 한반도 전쟁억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이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이 입장을 일종의 '선대의 유훈'이라고 생각하고 향후 평화협정 협상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못박으려고 고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주한미군 존재 근거는 희박해진다.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을 현재 수준으로 정당화 할 명분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축소되고 심지어 철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를 평화협정에 못박겠다고 고집해서 평화체제 구축을 지연시키느니, 그 부분에서 유연성을 발휘해서 평화협정을 앞당기고 그 결과로 주한미군 철수를 자연스럽게 기대하려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주한미군의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는 배제될 것이다. 또 북한을 염두에 둔 한미 합동 군사 훈련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은 계속 견지할 것이다.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서 상호 신뢰 구축을 위한 기본적인 조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군사 훈련 중지다. 실제 북한은 중국과 군사훈련을 하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훈련을 수시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특히 북한이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무기체계와 공세적 작전개념이 개입된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해서는 계속 중단 요구를 할 것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한국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종료 시점인 2020년까지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 체결 등이 가능할까?
이삼성 : 프로세스를 바짝 앞당긴다면, 단계적으로 실천하되 간격을 짧게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제네바 합의처럼 행정협정 수준이라면 대통령인 트럼프가 본인의 의사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상원의 인준을 받는 구속력 있는 조약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이삼성 : 트럼프 행정부가 미 의회에서 초당적 합의를 얼마나 구축해내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트럼프가 미 의회와 긴밀한 소통을 해서 프로세스를 앞당긴다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2020년 대선 전에 북한의 비핵화 과정을 완전히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일단 평화협정 체제를 구축해서 북한 비핵화가 예정대로 잘 진행돼서 적어도 중간 단계까지 간다면 다소 프로세스가 늦어진다고 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크게 나쁠 것은 없다.
프레시안 : 미국 사회 내에 북한에 대한 불신이 깊은데, 비핵화도 달성하지 못했으면서 관계정상화를 할 수 있냐는 반론이 나오지는 않을까?
이삼성 : 이 문제 역시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정치권과 언론을 설득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본다. 지난 1972년 공화당 출신인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뤄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여론의 흐름에 대해서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올해 말에 치러지는 미국 중간 선거 결과가 바로미터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두고 공화당을 포함해 민주당까지 확장하는 정치적 컨센서스를 이뤄낼 수 있을지는 중간선거에 달렸다.
프레시안 : 이번 책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목표가 네 가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가 미국 주도의 동맹 네트워크유지다. 그런데 네트워크의 핵심은 미일 동맹이며 미일 동맹이 유지되려면 한국이 남아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위협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 △미국 해상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핵전력에 대항(사드 등 MD 구축) △미국 군산복합체의 무기 시장 유지 등을 꼽았다. 그런데 한반도가 정말 비핵화된다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만 이루게 되는 것이고, 오히려 나머지 세 개의 목표와는 배치되는 것 아닌가?
이삼성 :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비핵화를 이뤄내는 것 자체로 미국 행정부에는 정치적 자산이 된다. 또 미국의 중요한 목표인 핵무기와 미사일 비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는 장거리 미사일들과 결합한 핵무장을 완성한 상태에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트럼프 행정부에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 9일 평양을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왼쪽)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노동신문
그리고 북한의 비핵화 방법론에서 결정적인 변수는 한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 하는 점이다. 위의 네 가지의 목표는 미국의 강경파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적 압박으로 일관하는 과정을 통해서 미국은 기득권을 누린다는 차원에서 분석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평화적 해법을 강력하게 추구하지 않는 한 군사적 압박 노선을 견지하는 관성을 유지하게 되고 그로부터 각종의 '국익'을 챙긴다는 얘기다.
즉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 동맹 네트워크인 미일 동맹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들의 무기를 팔 수 있으며 미사일 방어체계(MD)를 확장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북한이 붕괴할 수도 있다. 북한 붕괴론과 연결돼서 기득권을 누리는 구조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에 진보적 정권이 들어서 평화적 해법을 강력하게 요구하면 미국내 강경파의 입지가 좁아지고 협상파가 힘을 얻는다. 어차피 강경파가 구상하는 '안전한 첨단전쟁'이라는 군사적 해법은 좀비국가가 아닌 북한에는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강경파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서 헤어날 수 없다.
이 때 한국의 진보 정권이 미국 정부 안팎의 협상론에 힘을 실어주면 강경파도 협상을 받아들일 명분을 얻게 된다. 그들에게 한국이 출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한국의 진보정권이 중국과 발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떤 한국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미국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오해를 피하고 싶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나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강경파들이 주도할 때도 북한은 이라크, 유고,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리비와와 달리 좀비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한미동맹의 선제타격에 의한 첨단전쟁은 현실적 선택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미국은 매파 정권이라도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결국은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전쟁의 위험은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로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오해다. 대북 군사적 압박으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반드시 미국이 실제로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미국도 북한도 통제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위기가 여실하게 보여주었듯이 고도화된 군사적 긴장 상태에서는 불완전 정보 상태로 인한 상호 오인과 오판에 의해 어느 쪽도 선제타격의 유혹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 그 군사행동은 곧바로 전면전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은 오늘의 한반도의 경우 핵무기의 교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경우 남북의 공멸은 예정된 일이다. 내가 한반도에서 가능성과 현실성이 없다고 한 것은 북한만 괴멸시키고 한미동맹은 실질적 피해가 없는 '안전한 첨단전쟁'은 성립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환타지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참혹한 전쟁의 위험이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프레시안 : 한반도 평화체제가 달성되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도 일정하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삼성 :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 내에 있는 권력 엘리트들의 계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부시 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냈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2011년 출간한 자서전 <최고의 영예>를 읽어보면 한반도 정책에 관한 부시 정부 사람들의 계산법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2005년 라이스가 한반도 평화협정을 제안했을 때 의외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부시 대통령도 반대하지 않았다. 럼스펠드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이뤄지면 주한미군을 빼내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신속기동군으로 활용할 절호의 기회가 된다고 계산했고, 라이스와 부시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나서게 하면 북한의 정권과 체제는 "스스로 녹아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압박과 제재가 아닌 개방에 의한 체제 전환 가능성을 자신들의 대북 정책 변화의 명분으로 거론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 권력 엘리트는 다각적인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대단히 많은 정책 선택지가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보수 정권과 남한의 진보정권이 궁극적 목표는 다를 수 있어도 방법론은 서로 합치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타협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과 미국이 궁극적 목표는 달라도 잠정적 합의를 이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미국은 항상 핵 비확산을 최우선 정책과제라고 말해왔는데 이번에 이란 핵 협정에서 탈퇴한 것은 사실 좀 이해하기 힘들다.
이삼성 : 이란의 상황은 한반도의 경우와는 구조적으로 많이 다른 것 같다. 일단 북한의 경우 미일 동맹과 중국의 긴장 구조 틈바구니에서 핵 무장을 완성했다. 반면 이란에는 중국과 같은 긴밀한 배후 국가가 없다. 또 협상 타결 당시 오바마 행정부와 이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2015년 중동지역에서 최대 문제는 IS(이슬람 국가)였다. 2014년부터 이라크 등을 유린했던 IS에 대처하기 위해서 오바마 정부는 이란과 협력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IS를 견제하는 실질적 군사행동을 하던 집단이 시리아 민병대였는데 이들은 이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오바마 정부와 이란이 IS를 매개로 이해관계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IS가 거의 궤멸한 상태다. 2015년과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과 굉장히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 14일 국제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스라엘은 이란 핵협정이 이란에게 저농축 우라늄 시설을 허용했다며 파기를 주장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핵 협정이 파기된 것이다.
즉 이란 문제의 경우 매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내 유대인 로비가 미국 강경파를 뒷받침해서 폐기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북미 대화를 촉진하는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중동에는 이란을 배후에서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지정학적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편들기는 하지만 이해관계가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다.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이익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정책을 보면, 미국이 내세우는 이른바 '핵 비확산 금지'는 보편적이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정치적 목표가 더 우선한다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다.
이삼성 : 과거 비핵국가들의 핵무장 과정에서 미국과 국제사회가 보인 반응을 보면 오늘날 세계의 핵무기 비확산 문제는 지정학적인 권력정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를 원한다면 프레시안 : 남북미 간에 한반도 평화체제가 타결된다 해도 그것이 끝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항구적이고 지속가능하려면 주변국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중요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이 교수는 독일은 자신들의 통일이 유럽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주변국에 설득해서 통일이 가능했다고 진단했다.
이를 우리 상황에 대입해보면 한반도의 평화협정만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이 한반도가 비핵화된 통합 국가로 되는 것이 자국의 국익에 유익하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게 중요해 보인다.
한국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상한 결말로 끝난 것은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 때문이었다. 즉 미국도 중국도 자신의 의지를 한반도 전체에 관철시킬 방법이 없었다.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안은 한반도 분단 유지였다. 그것이 그들의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민족에게 분단 그 자체가 고통이요 질곡이다. 한반도 분단을 자신의 국익이라 생각하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한반도 통합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한반도 주변, 그러니까 동아시아 질서 자체의 변화 필요성과 연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이 교수는 '동북아 비핵지대화', '동아시아 평화벨트'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삼성 :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은 동아시아 차원에서 공동안보를 추구하는 노력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안보를 연결하는 일차적인 고리는 6자회담을 활용하여 동북아에 비핵무기지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와 일본을 비핵무기지대로 만들고 주변 핵보유국들은 그 비핵지대를 존중하면서 핵무기의 군사적 역할을 줄여나가게 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동남아에는 아세안 10개국이 맺은 '동남아 비핵지대 조약'(방콕조약)이 있다. 이 조약 가입국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고 반입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 국가 사이에서는 핵무기 경쟁이 없다. 또 다른 국가, 예를 들어 미국의 핵잠수함이 그 비핵지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각국의 개별적 결정에 맡긴다.
이 조약과 함께 동북아 비핵무기지대가 구성되면 동아시아 전체에 비핵무기지대가 성립할 것이다. 그러한 발전은 동아시아 전반의 군사적 긴장을 더욱 해소시킬 공동안보를 확장할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벨트' 구상은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과잉군사화된 타이완해협과 오키나와, 그리고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해상패권 경쟁의 중심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동중국해에 속하는 제주도와 그 주변을 비군사화시킴으로써 이 지역들을 동아시아의 현재적·잠재적 발칸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상징하는 평화벨트로 만들어내는 비전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남북이 추구하는 서해평화지대의 동아시아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벨트를 더 연장해서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중국해까지 연계한다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 구조를 형상화했던 대분단선 전체가 평화벨트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게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발판으로 장차 추구해야 할 동아시아 미래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을 언급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도 포함해 다 같이 핵무기를 없애자는 것이냐, 황당하다 이런 반응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비핵무기지대는 비핵국가들인 남북한과 일본이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반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 핵무기 보유 국가들도 핵무기를 이 지역에 반입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고 통과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약속하는 것이다. 각국의 국가안보전략 차원에서 동북아 지역에서의 핵무기 역할을 크게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내지 협정 등의 방식으로 그 약속 이행을 보증하는 국제법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다.
프레시안 : 비핵무기지대 구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힘든 상대는 일본 아닐까?
이삼성 :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성에 가장 적극적인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미일 동맹 해체까지도 비핵지대 조약에 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명시적으로 '미일 동맹 해체'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조약에 담고자 한다. 미일동맹의 핵심축의 하나가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 제공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같은 얘기가 된다.
그런데 동맹 문제와 비핵무기지대 구상은 분리해야 한다고 본다. 미일 동맹의 문제가 비핵무기지대와 얽히면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은 가까운 장래에는 제로에 가깝다.
그러므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를 백일몽이 아닌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미일 동맹과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 이슈로부터 전략적으로 분리시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제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이 발동될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일본을 핵으로 공격할 때다. 그런데 거기에 대항해서 미국이 공격할 대상은 한반도나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다. 따라서 비핵무기지대는 미일 동맹 및 핵우산 문제와 이론적‧현실적으로 분리 가능하다고 본다.
비핵무기지대가 구성되어 공동 안보 질서가 구축되면 미일 동맹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은 역할이 축
소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이라는 당위는 우리에게 눈앞의 현실로 닥쳐왔다.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 질서의 공동안보 구축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안정화시키면서 그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안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다. 그 둘을 연결하는 고리가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건설인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지렛대 삼아 어떤 동아시아상을 그릴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 우리는 서 있다. 주변 4대 강국은 저마다 지정학적 게임에 골몰하고 있고, 우리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럴수록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비전으로 그 관성에 맞서 부단히 대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 동아시아 질서의 중간자이자 지적·외교적 균형자로서의 한반도 국가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