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외친 윤복희와 최태민- 박근혜

'빨갱이' 외친 윤복희와 최태민- 박근혜

복음제일교회 0 1,750 2021.01.28 19:41
'빨갱이' 외친 윤복희와 최태민-박근혜와 
[민교협의 정치시평] 최태민 교주와 박근혜의 '사이비 반공' 집중 분석
'빨갱이' 외친 윤복희와 최태민-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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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2일 문화방송(MBC)의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에 빛났던 가수 윤복희. 그날 그녀가 불렀던 '여러분'은 오랫동안 독재와 산업화에 지친 수많은 국민을 힐링시킨 가요로 기억되었다. 2011년 5월에 임재범이 다시 '여러분'을 불러 그 노래의 힘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풍기문란의 원흉으로 지목했던 미니스커트 선풍을 몰고 온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1967년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선보이면서 한국 패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랬던 그녀가 2016년 전 국민의 염원을 담은 촛불 시민들에게 낡은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는 글로 상처를 줬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억울한 분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빨갱이들이 날뛰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주소서"라고 썼던 글이 문제가 되자 "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논란이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자, 그녀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말았다.

반공적 기독교와 최태민

그녀의 글이 촛불 시민들을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 글을 통하여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과 트라우마까지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반공주의의 긴 인연을 발견하게 된다. 윤복희 씨의 전성시대였던 1970년대 반공주의적 기독교를 주도해왔던 한 가운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영적 지도자 최태민 목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윤복희 씨가 최태민과 어떠한 인연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으므로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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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복희 씨 SNS 화면 갈무리,


지금까지 최태민과 관련된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1975년 이전까지 최태민과 관련된 가장 확실해 보이는 정보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원과 한국복음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신흥 이단 종교를 연구했던 탁명환 신흥종교문제연구소장의 진술이다. 1973년, 탁 소장이 최태민(당시 이름 원자경)을 대전에서 만났을 때, 최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혼합한 '영세계 원리'교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5년 원자경에서 최태민으로 변신한 그는 대한구국선교단의 총재가 되었다. 박근혜가 명예총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4월 23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하여 "김일성의 중공 방문은 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노골적인 행위이니 일부 정치인, 재야 인사, 종교인, 학생들은 극한 투쟁이나 정치 혼란만을 피할 것이 아니라 반공 기치 아래 뭉치자"고 호소했다. 물론 이 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는 23살의 박근혜였다.

곧 이어 5월 4일에는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 주최한 구국 기도회가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날 목사는 당시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대표하던 박장원 목사였다. 그는 "북괴는 남한을 적화 통일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땅굴을 파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국론을 통일하고 총화 단결을 이룩하자"고 설교했다. 당시 박장원 목사는 부흥회 전문 목사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목사 집안 출신으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이 박용익 목사이고, 동생이 박신원 목사이다. 박장원 목사의 아들은 현재 인천의 대형 교회라고 하는 인천방주교회의 박보영 담임목사이다.

유신십자군과 구국십자군

곧 이어 대한구국선교단 산하에 '구국십자군'이 설립되었다. 1975년 6월 21일 설립된 구국십자군의 초대 사령관으로는 박장원 목사가 임명되었다. 최태민은 구국십자군을 20만 명의 세례교인으로 구성되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구국을 전제로 전국 복음화 운동을 펼치고 사이비 종교를 일소하며 퇴폐 풍조 등 사회 부조리를 제거하여 조국 통일 성업의 초석이 되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배재고등학교 교정에서 진행된 구국십자군 창군식에는 박근혜 구국선교단 명예총재가 격려사를 통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와 민족, 자유세계를 지키는 초석'이 달라고 늙은 목사들을 포함한 소위 '창군대원' 1000여 명 앞에서 당부를 했다고 <동아일보>(1975년 6월 23일자)는 전했다. 이 구국십자군은 목사와 평신도로 구성되었고, 각 시도단위, 군단, 각 개체 회 단위로 분단을 조직하고, 매주 토요일 정기 기본 군사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최태민이 구국십자군을 착안했던 것은 몇 가지 상황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 출범 과정에서 저항 운동을 벌여왔던 한국 기독교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KCC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진보 세력를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그는 정통 기독교계와의 대항하는 카드로서 반공을 전면에 거는 전투적 기독교 단체로서 구국십자군을 착안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 운동은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구국십자군은 박정희를 직접 찬양하는 맥락에 있었다. 물론 십자군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걸친 서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교회 목사들이 반공 전선에서 자주 사용하였다. 한 예로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에 한경직 목사가 지리산 일대에서 구국 전도 운동을 펼치면서 '구국전도대가'를 지어, 국경, 토벌대를 '십자가 정병'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 전쟁은 '의로운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르며, 공산군의 대항 개념으로 십자군을 불렀다. 이들은 기독교의 맥락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알려진 대로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박정희 역시 십자군을 좋아했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대를 '구국의 십자군'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5.16 쿠데타 1주년 기념행사에서 군사 혁명 정부 내각수반 송요찬이 '1년 전 군사 혁명을 가리켜 구국의 십자군'이라 하였다. 또한 1973년 3월 20일에 있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 장병 환영 대회에서 박정희는 "어제의 평화십자군이 오늘의 유신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어 달라"고 얘기했다.

나아가 구국십자군이 출범한 1975년에 부활했던 학도호국단과도 맞물리는 것으로 보인다. 학도호국단은 원래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49년 생겼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일시 폐지되었던 것을 군국주의자 박정희가 그 가치를 재평가하여 1975년 5월 21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설치령'을 심의·의결하였고 남녀 학생 모두 학생 군사 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1985년에서야 호국단이 폐지되고 총학생회가 부활할 수 있었다. 유신 정국은 군국주의의 부활로 공포 정치를 했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 발맞춰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과 구국십자군을 창조한 것이다.

구국선교단은 복합적인 사회단체로서 일종의 정부 조직이자, 헤드쿼터였다. 여기에는 종교와 선교, 연구회, 병원, 사회복지 기관 등이 있었다. 또 일종의 군사 조직 개념으로서 구국십자군이 있었다면, 이데올로기 생산 기지로서 조국통일문제연구원이 있었다. 최태민은 이 연구소는 형식적으로는 교수들에게 맡긴 것처럼 보인다. 조국통일문제연구원의 원장으로는 국민윤리를 주도한 한태수 한양대학교 교수와 부원장에 권윤혁 동국대학교 교수가 있었다.

또 연구원은 정치, 경제, 사회, 조사, 문화 분과로 구성되었다. 놀라운 점은 사회 분과 위원장으로는 변시민 교수, 조사 분과에는 김점곤 교수, 문화 분과에는 조연현 씨 등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 연구원은 세계 교수단 평화 대회, 민간 외교 사절단 파견, 국난 타개 대책 연구, 학술지 발간을 하겠다고 계획되었으나 그대로 추진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대 쟁쟁한 학자까지 동원할 수 있었던 최태민의 권력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가 박정희의 영애 박근혜를 등에 업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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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목사들을 동원한 반공 군사 훈련

구국십자군이 정식으로 창군된 것은 1975년 6월 21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5월 22일부터 24일간 10개 교단을 망라한 목사 100명(여자 권사 6명 포함)이 제식 훈련, M16 소총 사격 훈련 등의 군사 훈련을 받으며 승공 정신을 함양했어야 했다. 물론 퇴소식에 박근혜는 격려사를 통해 "한국 선교 90년 사상 처음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구국 일념으로 모인 결단"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목사들의 자발적으로 참여했겠는가?

구국선교단의 단장이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1909~1985년)였다. 강신명 목사는 경상북도 영주 사람이지만 해방 직전에 평북 선천북교회에 있다가 분단 이후 월남하여 한경직 목사와 함께 영락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1955년 새문안교회로 옮겨와 25년간 목회를 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측)의 리더이자, 한국기독교지도자협회 회장이자, 서울장로회신학교 설립자였다. 그의 경력에는 최태민과의 인연은 빠져 있으나, 지우고 싶은 경력일 것이다. 사이비 목사 최태민에게 새문안교회의 목사가 이러할 지경이라면 군소 교회 목사들이 구국십자군, 구국선교단을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1975년 7월에는 경주 화랑의 집에서 '제1회 화랑 수련 대회'를 가졌는데, 남녀 1000명의 구국십자군이 참여하였고, 예의 최태민 총재가 '1000여 년 전 신라 구국의 선봉이었던 화랑처럼 우리 기독교도들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를 건지는 구국의 선봉'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구국십자군은 강화도에 '강화특수군단'을 설립했다. 군단에서는 멸공대, 기동대, 전도대 등 500명씩 1500명으로 구성된, 순교적 신앙으로 총궐기하겠다고 선서했다.

대한구국선교단은 광복 30주년을 맞아 4개항 특별 성명을 발표했는데, 제1항이 "멸공만이 구국의 길임을 다시 천명하며, 멸공의 제1선에서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고 하여 멸공을 앞세웠다. 그의 종교는 반공멸공교라 할 만했다.

1976년 4월 29일엔 구국선교단 부설로 구국여성봉사단이 이화여자고등학교 류관순기념관에서 발족했다. 그날 행사엔 박근혜와 유상근 통일원장관, 구자춘 서울시장, 박순천, 모윤숙, 양순담, 송금선 등 여성계 인사와 단원이 3000명 모였다. 1978년 총재엔 박근혜, 사무국장엔 문제의 인물인 최필녀, 즉 최순실이 취임했다.

아무튼 구국선교단은 박정희 대통령이나 정치계에서 최태민의 기금 유용이나 박근혜에 대한 '지배' 문제가 얘기되면서 견제를 받게 되었다. 최태민은 새마음기운동본부와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을 합쳐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을 탄생시켰다. 새마음봉사단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2016년 11월 20일 JTBC 프로그램, <스포트라이트>를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최태민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와 반공주의를 십분 살리며 박근혜의 비선실세로서 독점적 권력을 누렸다.

1970년대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최태민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국민일보>(2016년 11월 9일자)에 따르면 1975년 7월 예수교장로회(통합) 측에서는 총회 임원회를 열어 '통일교나 구국선교단 등 교단이 인정하지 않은 집단에 가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해 12월 임원회에서도 '구국선교단은 교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단 선언을 했다. 그럼에도 구국선교단에 동참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1970년대 개신교계는 구국선교단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멸공,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은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저항적 개신교 지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력한 반공주의자임을 끊임없이 입증하거나 고백해야 했다. 강인철 교수가 말하는 "승공을 위한 민주화와 인권 보장 요구"였다. 다시 말해 "한국이 사탄적인 (북한) 공산 세력과 최전선에서 대적할 세계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면 한국이야말로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모범적 국가"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한구국선교단이나 구국십자군뿐만 아니라 대한기독교연합회, 기독교지도자협의회, 기독교반공연합회 등 수많은 단체들이 반공 활동을 계속했고, 반공을 기초로 한 목회자가 계속 탄생하였다.

반공 무의식, 반공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다시 윤복희로 돌아가자. 윤복희 씨는 촛불 시민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녀 자신도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촛불 시위가 아니라, 박근혜 게이트이다. 박근혜 게이트가 없었다면 이러한 촛불 시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복희의 빨갱이 언급은 그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나와는 다른 사람을 호명하거나 타자화시키는 1970년대를 살았던 많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자, 무의식의 문제이다. 이는 가수 윤복희 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 깊숙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평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꿈이나 본능적 상황, 이성 조절을 잃은 감정의 표출 과정에서야 어떤 계기를 통해 복합적으로 무의식은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은 한국 전쟁과 그 후 수십 년 동안 반공에 의해 지배당해 온 사회이다. 최근 색깔론이 많이 옅어지고, '빨갱이'나 '종북 좌빨'이 대중적 담론으로 수용되었다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빨갱이나 종북 좌빨은 차별과 배제, 감금과 죽음의 기표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1970~80년대 반공은 곧 공포를 의미했고, 간첩이나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당사자는 말할 것 없고, 그러한 가족으로 낙인찍히는 것만으로도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 사회엔 1990년대까지도 연좌제가 있어서 그 자손들마저 사회경제적 활동에 제약을 당해야 했다.

2000년대 초·중반 남북 관계가 한창 좋았을 때에도 많은 국민들은 남북 관계가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 함부로 진보인양 나서지 말라 등과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빨갱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수상한 사람을 빨갱이로 호명하거나 신고해야 했던 시대가 너무 길었다. 공포와 의심, 불안과 자기 검열 등의 증세를 가진 한국인들의 반공 무의식과 반공 트라우마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깊숙이 잔존해 있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냉전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한국인, 한국 사회의 깊숙이 내면화된 반공적 무의식이 아니다. 객관적인 남북의 냉전적 상황이 해소되어야 집단 무의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 그러한 과정에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런데 시민 개인만의 노력으로는 이러한 현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헌법 제66조 3항은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평화 통일을 원하면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할 정부를 만들어야 하고, 행복과 복지를 원하면 복지를 실현시켜줄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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