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빈배’는 지난 3일 밤 8시쯤 다음의 아고라 게시판에 ‘반지하에서 꿈을 이뤘습니다.’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이 글에는 20여년전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들과 남겨진 뒤 삶이 어려워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가 어엿한 집을 장만하기까지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부모를 여읜 뒤 친척집 등을 전전하다가 지하도에서 노숙생활도 했다.당시에 대해 이 네티즌은 “편히 쉴 방 한 칸조차 없는 설움과 개뼈다귀 마냥 세상에 내버려진 것같은 절망,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부모없는 고아들이라는 슬픔 등이 가슴속에서 울부짖기 시작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생활정보지를 통해 직장을 구한 뒤 회사 지하창고에 스티로폼을 깔고 숙식을 해결하게 되면서 생활은 안정되는 듯했다.하지만 그는 “동생들과 함께 잘 수 있는 작은 행복조차도 신이 질투를 한 것 같다.”며 회사가 부도가 나 그곳에서 쫓겨나와야 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그동안 모은 약간의 돈으로 8평(약 26m²) 반지하 원룸에 들어갈 수 있었다.작긴 하지만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창문도 있는 천국같은 곳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집의 소중함을 깨닫고 집 장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구체적인 목표액은 1억원.
동생들에게 빈병·폐품 등을 주워 팔라고 교육시켰고 그 역시 어떤 일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다했다.이 때를 두고 이 네티즌은 “꿈에서 조차도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고 말했다.하루 서너시간씩만 자면서 일을 했다.그는 “모질게 사느라 영화 한편 보지않았다.마지막으로 본 게 ‘영웅본색’”이라고 전했다.결국 그는 10년이 채 안 돼 8000만원을 마련해 다가구 주택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그는 집주인의 입장이 돼 세입자들과 실랑이를 벌인 일,세입자에게 오히려 은혜를 입고 눈물을 흘렸던 일 등을 거론하며 글을 풀어갔다.다음 주 일요일 이사를 앞두고 있는 그는 “부끄럽게도 내 최종 학력은 중졸”이라며 “이사하면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글은 올라간지 이틀 정도가 지난 5일 오후 5시 현재 6만 4000건이 넘는 조회수와 470개의 댓글이 달리며 관심을 받고 있다.
대부분 네티즌들은 “너무나 가슴아픈 얘기에 눈물이 났다.”며 감동을 표했다.일부 “소설같다.”는 의견도 있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눈물이 핑돌만큼 감동적”이라는 반론이 많다.
’빈배’는 부모님들을 향한 메시지로 글을 끝냈다.
마지막에 새겨진 몇 개의 말줄임표에 고통의 세월을 인내한 그의 삶이 녹아있는 것 같다.
“엄마….어느새 내가 서른네살 청년이 됐지만 여전히 난 엄마의 철없는 아들이고 싶어.먼훗날 내가 그 곳에 가게 되면 엄마 품에서 맘껏 울고 싶고 그때가 되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들려줄게. 엄마….보고 싶어….”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요....
저에게는 부모가 안계십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듯이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끝내 눈을 감으셨지요. 부모의 죽음이 어린 두 동생을 길러야 하는 열다섯 소년에게는 얼마나 큰 슬픔이고 공포스러운지 알턱이 없는 막내 녀석이 장례식장에서 저를 보며 자동차 장남감 사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비 때문에 빚까지 있었던 탓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우리들의 보금자리마저 경매로 넘어가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고 떠돌이 난민처럼 이모집, 고모집등 친척집들을 돌아다니며 간간히 버티어나갔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친척들과 사촌들의 상처주는 말때문에 밤마다 눈물짓는 어린동생들을 보자 “우리 힘으로 살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친척집에서 나왔습니다.
며칠동안 길거리를 전전하며 지하도에서 노숙까지 해야했습니다.
편히 쉴수 있는 방한칸 조차 없는자의 설움과 개뼈다귀마냥 세상에 내버려진것 같은 절망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우리들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부모없는 고아들이라는 슬픔......... 같은것들이 가슴속에서 울부짖기 시작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달리는 차에 치여 죽으면 고통이 덜할까?” “수면제를 먹으면 편히 눈감을수 있을까?”
“물에 빠져 죽다가 불쌍한 내 동생들까지 뛰어들면 안되는데.......”
시팔....사는것도, 죽는것도 내 마음대로 할수 없는 어떻게 된게 이놈의 세상일은 쉬운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 너무 추워”
이까지 부딪히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막내를 보니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때 죽더라도 내 동생들 따듯한 집 한칸은 마련해주고 죽자!” 결심하였고 생활정보지를 통해 가까스로 일을 얻었습니다.
사장님께 사정을 하여 지하창고를 방으로 쓸수 있도록 개조했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난방이 전혀 안 되어 공사장에서 버려진 스티로폴을 깔고서 잠을 청해야 했고 온종일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갈정도로 어두웠지만 동생들과 함께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잘수 있다는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신은 질투를 느꼈나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났고 저희들은 또다시 지하창고에서 쫓겨나와야만 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모은 약간의 돈이 있어서 그것으로 집을 구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을 보자 집주인들은 하나같이 계약하기를 거절하였고 부동산 사장님이 사정이야기를 해도 냉담한 반응뿐이었죠. 마귀할멈처럼 생긴 어떤 아주머니는 아쉬워 발걸음을 돌리던 저희들의 등뒤에 대고 들으라는듯이 “부모없는놈들 살게 했다가 손이라도 타면 어쩔건데....”란 말로서 저를 서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사무소 같은곳에 가서 영세민등의 사회보장제도 같은걸 활용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 당시 저는 그럴 능력도 요령도 몰랐고 어린 저를 이끌어줄 주변의 관심있는 어른들도 없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음씨 고운 주인 할머니를 만나서 반지하 원룸 여덟평즘 되는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하창고 방에 비하면 창문도 있고 비록 반쪽이긴 하지만 바깥 세상도 볼수 있어서 우리들에겐 천국 같은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집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었고 오직 집을 사기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동생들에게는 빈병, 폐품등 돈이될만한것이면 뭐든지 주워 팔아 돈을 만들라고 교육시켰고 저역시 돈되는 일이라면 어떤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다했습니다.
간혹 동생들이 창피해하거나 과자등을 사달라는 철모르는 말을 하면 지하창고방에서 춥게 살던 경험을 일깨워주고 인근의 마당 있는 근사한 목조주택을 보여주며 “동생들아!!! 돈을 모으게 되면 훗날 우리도 이런집에서 살게될것”이라며 설득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돈없이 큰병을 앓으면 집까지 순식간에 없어질수 있다는걸 체험으로 알게된 저는 영양가있는 음식을 먹여주지 못하지만 튼튼하게는 만들어주고 싶어서 새벽마다 동생들 깨워서 운동시키고 학교 운동장을 돌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공장에 가서 돌아올때까지 직접 돌봐줄수 없는 시간에 혹여 동생들이 못된짓이라도 할까봐 인형눈알 붙이기, 마늘까기등 부업을 시켰고 예습, 학교 숙제등을 검사하여 해내지 않으면 가차없이 매를 들어 혼냈습니다.
“1억을 모으자.”
그때엔 1억만 있으면 원하는 집뿐만 아니라 뭐든지 얻을수 있을것만 같아서 투잡, 쓰리잡은 기본이고 서너시간 이상은 자본기억이 없습니다. 꿈에서조차도 일을 하며 돈을 모았었죠.
십년도 안되어 1억은 아니지만 8천만원이라는 큰돈이 모아졌습니다.
그땐 IMF 때문에 전국이 몸살을 앓았고 대형마트에 쌓여있는 흔하디 흔한 과자봉지처럼
“제발 좀 사주세요~”하는 집들이 사방에서 넘쳐나는 상황이어서 집을 마련하는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아파트보다는 마당이 있는 집을 원했는데 신문값을 받으러 부동산에 들렀다가 급매물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준공된지 5년도 안된 대지 90평, 건평187평, 총 12가구가 입주해있는 마당은 아니지만 조그만 화단이 있는 다가구 주택을 구입했습니다.
당시 등록세, 취득세, 부동산중개 수수료등 포함해서 약 8700만원을 주고 구입을 했고
22000만은 전세 보증금이었습니다.
잔금 치루는날 세상을 모두 얻는 기분이었고 동생들에게 집을 보여주며
“훗날 이집 허물고 삼층집 지어서 일층은 형이 살고
둘째는 이층,
하늘을 좋아하는 막내는 삼층에서 살자꾸나....“
“애들아! 마당에는 뭐를 심지?“ 라는 질문에
둘째 동생은 과일나무를 막내는 목련을 심자고 했습니다.
유난히 먹을것에 집착을 보이는 둘째가 막내를 보며
“야 임마, 먹을걸 심어야지 쓸모없는 목련 같은걸 심어서 어디에 쓰냐?”고 핀잔을 주자
막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엄마가 좋아하는 나무였으니까.....”라는 대답에
둘째는 눈물을 글썽이고 저는 별도, 달도 없는 하늘만 바라봐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요리를 할때나 가끔씩 산책을 하면 항상
“하얀목련이 필때면 생각나는사람....”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앨범에도 목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엄마 장례식때 장난감 안사준다고 생떼를 쓰던 막내가 벌써 이렇게 컷구나....
뿌듯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집이 생겼다,라는 큰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주인세대에 사는 세입자로부터 “방을 빼달라”는 전화가 와서 부동산에 내놓으니 전세매물만 쌓여있고 찾는 사람은 없다 길래 그 내용을 세입자에게 알렸더니 태도가 돌변하면서 한달뒤 이사갈때까지 돈을 빼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것이라고 화를 내는것이었습니다.
며칠후,
이번에는 또 다른 집에서 방을 빼달라고 하고, 또다른 집에서 연락이 오고...........세입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방 빼달라는 전화가 빗발치는겁니다.
그 무렵 건국이후 주택과 관련해 최초라는 말과 함께 세입자의 반란, 벌벌떠는 집주인들, 역전세난등의 뉴스가 흘러나왔고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빼주지 못해 경매로 넘어간 집주인이 자살을 하거나 밤에 도주를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고민 끝에 내사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분들도 이해를 해주실것이란 순진한 생각을 하며 이사가겠다는 집에 들러 사정을 말하니, 어떤 집은 욕을 퍼붓고, 주인세대의 남자는 저의 멱살을 잡고 “부모없고 쥐뿔도 없는놈이 주인행세하려고 이집을 샀느냐, 안빼주면 경매로 넘기고 너를 감옥에 쳐집어넣을것”이라고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남자는 자기의 말이 허언이 아니란듯이 며칠후 내용증명까지 보내주셨지요.
내용증명서에 쓰인 법적인 책임이니, 경매니하는 단어에 충격을 받고 2800만원이었던 전세를 2500만원으로 낮추어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고 이사하는날 손해배상 운운하여 행패를 부려 이사비용에 부동산비까지 모두 부담하고서 그 사람을 내보낼수 있었습니다.
제가 임대경험이 전혀 없다는것을 알아차린 부동산 사장님이 “집도 넓고 구조도 좋은데 기름보일러라서 안나가는것이다. 도시가스 놓으면 좋을텐데...“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주변주택을 보니 거의가 도시가스로 바꾸던 상황이라 부랴부랴 문의를 해보니 1300만원가량 비용이 소요된다는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세입자들과 십시일반하면 될것 같다는 또다시 순진한 생각으로 집집마다 들러 설명을 했는데 기다렸다는듯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세상돌아가는 상황만을 놓고 볼때 돈을 내려줘도 시원찮을판에 도시가스를 놓는조건이라 할지라도 돈을 올려달라고 하니 세입자들도 화가 났을겁니다. 정말로 그분들이 돈이 없었을수도 있었을테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겪고 있는 위기에 서로에게 윈윈이 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인데 매몰차게 거절들을 해버리니 갈수록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그와중에 가전제품도 멋져보이고 좋은차도 몰고다니는 비록 전세를 살고 있지만 형편이 나을것 같은 집에 들어가 무릎까지 꿇어가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이사가실때까지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사실수 있도록 각서라도 써드리겠습니다. 부모잃고 어린동생들 데리고 한번 살아보겠다고..... 방한칸없는 설움에 한이 맺혀서 이집을 샀습니다. 그 돈을 모으느라 여덟살도 안된 막내조차 폐품을 모았습니다.......부탁입니다. 여기서 주저앉을수 없으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빌고 또 빌었는데 단돈 십원도 내줄수 없다는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침 중국집 배달이 왔는데 짜장면 불어터진다고 저를 내쫓듯이 밀어내더군요.
모두 거절당하고 이제 딱 한집 남았는데 얼마전 주인세대로 이사한 신혼부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감히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나이인 그 부부에게 부탁을 한다는것 자체가 자존심상하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세대를 외면하고 두계단을 더 올라가서 옥상으로 갔습니다..
반지하 사는 주제에 이렇게 큰집은 사치였는지도 몰라....이러다가 결국엔 경매로 넘어가겠지. 십년동안 피눈물 나도록 모은 재산 모두 없어지고 모든게 물거품이 될거야..............
4층에서 떨어지면 숨이 끈어질까? 머리부터 떨어질까? 다리부터 떨어질까.......“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어린동생들의 폐품 줍는 모습, 마늘까면서 생긴 주부습진까지....고생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정말이지 “이젠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주인세대를 들어갔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금액을 말하기도 전에
“없어지는 돈도 아니고 결국엔 세입자 좋은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요”라며 삼백만원을 선뜻 내놓겠다는겁니다. 그런데 안방에서 친정어머니란 분이 나오셔서 “딸내미가 전세를 엄청 싸게 들어왔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집주인 피눈물 빼고 들어온거였구먼. 그러면 나중에 벌 받지. 나도 이백만원 보탤테니 도시가스 놓도록 해요. 젊은사람이 그동안 어린것들 데리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누...”하시면서 제 두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시는데.....저는 그 친정어머니란 분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통곡하다시피 울고야 말았습니다.
신혼부부의 도움과 대출을 받고서 도시가스를 놓았습니다.
놀랍게도 도시가스를 놓자마자 그간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세입자들의 전화가 거의 오질 않는겁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실대로 말한 내 형편을 오히려 악용했고 임대차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를 길들이려 했구나.” 몹시도 씁쓸했습니다.
두어달간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번엔 수도관리국에서 수도세가 50만원이 넘게 나왔으니 누수가 있는지 확인해보라는것이었습니다. 평균 10만정도를 사용하는데 50만원이라니.....너무나 화들짝 놀라서 누수탐지 검사를 해봤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다가구 주택이라서 미터기가 하나밖에 없는 관계로 요금을 세대원 머리수대로 나눌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50만원은 너무 많이 나온거였습니다. 당연히 세입자들은 평균보다 초과된 금액은 낼수 없다고 버티었고 40만원의 쌩돈을 물어주게 될 판이었는데 신혼부부가 들려준 이야기는 황당했습니다.
어느집은 밤에도 공장에서 나는듯한 소음이 들리고 또한 주말만 되면 이집들은 목욕탕이 되는데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아서인지 세입자들이 아예 물을 폭포수처럼 틀어놓고 사용한다는것이었습니다.
확인을 해보니 문제의 그집은 발디딜틈도 없는 공간에 공장처럼 해놓고 대충 세어봐도 열명은 넘는 인원이 부업같은 일을 하고 있었고 다른집은 주말만 되면 사돈팔촌까지 부르는지 몇십명이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것이었습니다.
할수없이 신혼부부에게 부탁하여 집관리를 맡겼는데 세댁이 며칠동안 매시간 계량기 옆에 서서 확인을 하고 집집마다 체크를 하니......다음달 요금이 8만원 나왔는데 그것은 그집 구입하고 난후 최저 금액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수도가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203호에서는 수도꼭지가 고장났으니 고쳐달라, 101호는 변기의 물이 잘 안빠지니 아예 양변기 자체를 교체해달라, 302호는 세면대 연결부속이 녹슬어서 보기 싫고 위생상 문제가 있으니 바꾸어달라.....어느집은 형광등에 불이 안들어오니 새것으로 교체해달라는 세입자도 있었습니다. 세입자가 원하는데로 모두 해줬습니다. 안그러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세입자느 방문 손잡이와 방문을 바꿔달라는 분이었는데 가서보니 아이가 방문손잡이에 매달려서 그네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이 난겁니다.
“이것은 아이의 잘못이니 세입자님이 고쳐야 한다”고 하니,
“아이가 매달리고 놀아도 부서지지 않는 튼튼한 문을 달았어야지, 이따위 싸구려 문을 단 집주인이 잘못이며, 아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큰일이었겠느냐...”는 정말이지 황당한 주장을 했는데 싸우기도 싫고 안 고쳐주면 나가겠다고 할것이 뻔하므로 울며겨자먹기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년여가 지난후 뉴스에 “전세가 심상찮다.” 소식이 간간히 흘러나왔고 기다렸다는듯이 이번에는 집주인에게 유리한 전세대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모르는지 방문손잡이의 그 세입자가 이번에는 현관문이 고장났다며 고쳐달라는겁니다. 돌잔치때도 돈이니, 책이니 하는것들은 내팽개치고 분명히 문고리를 잡았을 그집 아이가, 문고리잡고 노는것의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난 아이란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아이는 현관문의 손잡이에 매달려 놀았고 철제문의 경첩이 떨어져나가 고장이 난겁니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아이의 잘못으로 발생된일이고 당신이 직접 고쳐야 한다고 하니, “안 고쳐주시겠다면 이사갈테니 방빼주세요”하는겁니다.
“방빼세요. 돈드리겠습니다.”
“내일 당장 이사갈테니 바로 전세금 주세요.”
“내일 당장 이사가세요. 전세금 바로 드릴게요”
“....................”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세입자처럼 그토록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직 못봤습니다.
결국 하룻만에 그 세입자는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간 집은 투룸이었고 집을 수리하려하는데 도배장판페인트 해서 200만원가량의 견적이 나왔습니다. 싸게 잡은게 그정도....예전에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한적이 있는데 인테리어는 거의가 인건비라는걸 알았고 겁도없이 직접해보기로 했습니다.
인테리어 순서를 몰라서 도배를 두 번하기도 했고 색상을 잘못 골라서 페인트도 여러번 칠했습니다. 퇴근후에는 곧장 그집으로 달려가서 일을 했고 동생들까지 도움을 줘서 한달만에 수리를 마치고 집을 내놨는데 월세로 나갔습니다.
그때 집구경을 하던 주인세대 신혼부부 새댁이 “벽지를 소프트 그레이 칼라로 하고 바닥재를 환하게 했으면 거실이 좀더 넒어 보였을텐데...”라는 전문가다운 말을 하길래 물어봤더니 미술을 전공했다더군요.
그때부터는 신혼부부와 손을 잡고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들어갔고 몇 년만에 신혼부부집을 제외한 나머지 11가구를 월세로 돌렸고 세입자들도 모두 바꾸었습니다.
주변시세보다 십퍼센트정도 저렴하게 내놓으니 공실률도 거의없고 월세임에도 대기자까지 생길정도였습니다.
몇 년전이었습니다.
저의 통장에 천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주인아저씨! 전세금 올려드렸어요. 재계약해요”
그집에서 유일하게 전세에 살고 있는 신혼부부에게서 온 연락이었습니다.
“전세금을 올린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당신들이 평생 산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해드릴것”이라며 돌려드렸는데 며칠후에 이번에는 이천만원이 입금된겁니다
“생각해보니 요즘 시세가 얼마인데 너무 적게 올렸 드렸네요. 이번엔 꼭 받아주세요”
쓰리룸에 화장실 두 개인 주인세대가 9천만원까지 올랐는데 원룸가격인 삼천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으니 세입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미안할수도 있었을겁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인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려받으세요“
”못올립니다“
”올려주세요”
“자꾸 이러시면 전세금을 확 내려버릴겁니다.“
이렇게 기분좋은 실랑이를 벌이며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할수없이 그돈을 가지고 찾아가 여유돈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아는 분이 소개하기를 경매로 나온 오래된 아파트가 있어 투자해보라고 하는데 저는 이집이면 충분하니 집이 없으면 당신들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
그분들은 5천만원을 투자하여 낙찰을 받았고 몇 년도 안되어 그 지역자체가 재개발되어
2억가까이 올라버린겁니다. 집에 갈때마다 봤는데도 내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하고 건물청소도 열심히 해주신 신혼부부.... 그동안 도움준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을 한것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두달전이었습니다.
그 신혼부부가 제게 언제 이사올거냐고 묻더군요.
내년에 투룸짜리 계약이 완료되어 거기로 이사갈것이라고 하니 “주인세대로 오지 그러느냐”....하길래, 당신들이 이사가면 그때 갈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동생들이 그집을 자주 드나들길래 청소하러 가는줄 알았습니다.
오늘 와보라고 해서 그집에 갔습니다.
주인세대를 들어갔는데 완전히 새 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을 해놓은겁니다.
신혼부부가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저더러 주인세대에 들어오라고 하는겁니다.
지하창고의 스티로폼하고는 비할수 없는 침대에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가구들....
인테리어비용 많이 들어갔을것이라 하니...그 신혼부부가 하는말이
“모두가 인건비잖아요. 동생들이 도와줘서 큰돈 안들어갔어요. 남편이 가구공장을 다녀서
모두 저렴하게 구입하고 직접 만든것도 있고......
.이렇게라도 해야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받으실것 같아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공사를 했네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다음주 일요일 드디어 동생들과 함께 우리집으로 이사를 간답니다. 이제야 비로서 내집이 된것 같습니다.
광고문구처럼 정말이지 열다섯살부터 지금까지 오직 한길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돈을 모으느라 정말 모질게 살았고 연애한번 아니 영화한편 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중학교 2학년때 친구들과 몰래 들어가 본 “영웅본색“이었습니다.
아는 가수도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가 전부일정도입니다.
이제는 다시 열다섯 소년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걸 하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제 최종학력이 중졸입니다.
이사하면 검정고시 준비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날같은 오늘 저녁.......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지만 그중 부모님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시거나 영화배우같은 멋진 외모를
물려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정말 돈이 필요할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이토록 모진 세상에 장남으로 태어난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제가 열두살 때 친구들 모두 다니는 보습학원조차 못가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거야.”라며 철없이 대들어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았을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매를 빼앗으며
“때리지 마라. 못배우고 못난 애비가 죄다. 미안하구나...”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셨던 아버지.....
어린동생들을 기르면서 한집안의 가장이 느껴야하는 무거운 책임감과
가족들에게 말할수 없는 아픔들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아버지....죄송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그곳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한 사랑 많이 베풀어주시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하는 어머니....
아니 오늘만큼은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어.
엄마.....
어느새 내가 서른네살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난 엄마의 철없는 아들이고 싶어.
지하창고에서 잘 때 동생들과 아무리 껴안고 자도 추워서 잠을 이룰수 없을때 엄마사진을 꺼내 품안에 넣고 자기도 했어. 그때 막내가 내 귀에 대고 "엄마품처럼 따뜻하다”고 했을때 엄마는 곁에서 우리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어.
어느시인의 슬픈 싯구처럼 이 세상 소풍 마치던날 엄마는 내손을 붙잡고서 “어린동생들만 남겨두고 가는것이 한없이 미안하다며...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수 있다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 엄마......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수박, 이 추운 날에도 몇트럭을 사줄만큼 돈도 모았건만 엄마는 곁에 없고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퍼..........엄마.....이제는 우리들 걱정하지도 말고 하늘에서는 아프지도 말고......먼훗날 내가 그곳에 가게 되면 엄마품에서 맘껏 울고 싶고 그때가 되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들려줄게. 엄마....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