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일이 이렇게 틀어져 버렸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다시 큰 벽에 부딪쳤다. 정상회담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던 트럼프와 김정은의 다른 태도로부터 기인하던 불길함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협상 이전부터 트럼프는 계속 속도조절론을 주장하며 기대수준을 낮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도 없었고,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영혼이 담겨있지 않았다.
원인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마치 북한이 제재 전면 완화를 요구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말하지만, 기자회견의 다른 언급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정반대다. 즉 북한에게 영변 플러스 알파를 먼저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데, 알파는 전면적인 비핵화였던 것이다.
미국은 영변 핵 시설 폐기로도 부족하고 다른 핵시설 전부에 대한 폐기를 요구했으며, 이런 요구를 받은 김정은의 반응은 '제재 전면 완화'라는 요구로 나왔을 것이다. (사실 이것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받을 수 없는 딜이었다).
김정은은 지난 6.12회담의 성공 이후 트럼프가 아닌 실무진의 방해로 교착이 왔다고 판단해왔고, 트럼프를 직접 만나면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회담에 대해 절박할 정도로 기대를 가지고 총력을 기울여왔지만, 결국 트럼프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김정은이 지금까지 보인 진정성을 위한 일방적 양보 조치와 그간의 노력이 트럼프에게는 '선의'나 '신의'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쉬운 상대'로 인식됐고, 트럼프는 이를 역이용하여 미국의 요구 수준(bar)를 더 높여버린 것으로 보인다.
▲ 28일(현지 시각) 하노이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특히 코헨사건 등으로 사면초가인 트럼프는 영변 핵 시설 폐기와 제재 일부 완화를 교환하는 합의 정도로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기존의 강경한 원칙인 '선비핵화, 후보상'으로 돌아서 버렸다. 이를 들이밀어 김정은이 양보하면 대박이고, 아니라면 이른바 '노 딜'이 향후 국내정치적 공세를 피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계산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어떻게 보면 트럼프는 북한에게 높인 바를 제시하면서 항복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다시 한번 미국에게 배신을 당한 셈이다. '선비핵화, 후배신'이라는 리비아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는 다르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겨우 생겨나려는 양국의 신뢰는 크게 훼손당했다.
트럼프는 판은 깨지지 않았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는 김정은이 양보했을 때만 가능하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1994년 제네바 회담에서의 합의를 지키던 북한에게 '우라늄 농축'을 들이대던 때를 연상시킨다.
미국 패권 DNA는 여전히 무례하고 일방적이다. 물론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어찌 되었든지 살려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동의하지만, 효과는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무산시킬 때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지 분명하고 냉철하게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