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다싱의 생애가 주는 교훈(1889-1929)

썬다싱의 생애가 주는 교훈(1889-1929)

복음제일교회 0 3,587 2021.01.28 18:10

<신앙의 발자취> 썬다 싱의 생애가 주는 교훈(1889-1929)

20세기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13세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18세기 임마누엘 스웨덴붉과 더불어 교회사의 3대 신비주의자로 간주된다. 또한 썬다 싱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성 프란시스와 교회사에서 가장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썬다 싱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썬다 싱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려보고 그가 우리에게 남겨진 신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시크족에서 태어남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푼잡지역의 시크족의 대지주 세르 싱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크족은 15세기말 나나크가 이슬람적 요소와 힌두교적 요소가 결합된 시크교를 창설하면서 전 종족이 시크교도가 되었다. 19세기 초 시크 국가가 창설되었으나 영국과의 시크전쟁(1845-46, 1848-49)에 패배한 후 영국령 인도에 병합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시크족들은 자신들의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 시크종교가 무굴황제에 의해 박해를 받으면서부터 평화주의자에서 호전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자'를 뜻하는 싱이라는 성씨를 공통으로 사용하면서 시크교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 그래서 시크족들은 동일한 시크종교를 신봉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전투공동체로 변했다. 시크족들은 자신들의 부족을 지키고,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가치가 되었다. 썬다 싱도 어릴 때 이러한 시크족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특별히 썬다 싱의 어머니는 대단히 종교적인 여성으로 박타(bhakta, 여성 종교인)라는 칭호까지 받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썬다 싱의 어머니 아주 썬다를 아주 어릴 때부터 종교적으로 양육했다. 썬다 싱은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인도 경전들을 공부했다. 또한 썬다 싱의 어머니는 때때로 힌두나 시크의 종사들을 집으로 모시거나 또는 숲 속에 있는 노 사두에게 데리고 가서 가르침을 받게 하기도 했다. 썬다는 이렇게 어머니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라면서 조숙한 소년이 되었다. 어린 썬다의 어른스러운 언행을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사원의 사제를 찾아가 아이의 장래에 대해 걱정스러운 듯 의논했다. 그러자 사제는 썬다사 자라서 사두가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훗날 썬다 싱은 힌두의 사두가 아니라 기독교적 사두가 되어 인도의 토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두적 전도자가 되었다.

회심이전의 꼬마 기독교 박해자

썬다 싱은 12살쯤 되어서 미국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공립학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썬다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썬다 씽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가 죽었다. 이것은 어린 썬다 싱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썬다는 식음을 전폐하고 비애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가 하던 대로 새벽 일찍 목욕재계부터 하고 정좌수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요가철학을 깊이 묵상하면서 깨침의 세계를 향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나날이 말이 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생의 허무를 일찍 경험한 그로서는 진리를 깨우치면 살고,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다. 그러자 기독교 학교에서 썬다는 점점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게 되고, 썬다 또한 점점 기독교 선생들과 학교와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썬다는 점점 성경과목을 싫어하게 되었고, 때로는 성경과목 시간을 불참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의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여 선생을 괴롭히기가 다반사였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졸라 멀리 왕복 40리를 다녀야 하는 공립학교로 옮겨갔다. 기독교 교육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썬다는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행동했다. 악동들을 모아 공공연히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미션계 학교를 부수자. 선교사를 추방하자, 시장부근에 모여 사는 예수쟁이들을 추방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썬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병으로 약해진 썬다를 위해서 아버지는 다시 장로교의 미션학교를 찾아가 썬다를 복교시켰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썬다는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서 성경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기름으로 조각조각 불태워버리는 행동을 했다.

사도바울을 닮은 특별한 회심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서 이처럼 적대적이던 썬다 싱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전도자의 한 사람이 되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썬다 씽의 인생을 180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놀라운 회심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썬다 싱의 회심 이야기는 기독교의 수많은 급격한 회심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 중의 하나다. 또한 썬다 싱의 회심이야기는 사도 바울의 다메섹 회심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회심이전의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 박해자라는 점, 회심시 빛 가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점, 회심시 하신 말씀, 회심이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된 점등이 너무나 닮았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초대기독교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듯이 썬다 싱의 회심은 인도교회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히말리야산을 해마다 오르내리면서 전설적인 전도사역을 펼쳤던 썬다 싱의 전도사역의 뿌리는 그의 회심사건의 강렬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썬다 싱의 회심사건은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 1904년 12월 18일 일어난 썬다 싱의 회심 이야기는 칸디에서 행한 썬다 싱의 강연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전도자와 기독교인들의 저에게 찾아오곤 했으나, 저는 그들에게 저항하며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저는 그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 전도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서를 찢고 불태워 버리곤 하였는데, 아버지의 면전에서 저는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서적들을 난도질하여 석유를 붓고 태워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거짓종교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박멸하는 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종교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의 의례와 규율을 모두 수행했는데도 저에게는 만족이나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자살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불태운 지 삼일 후에, 저는 새벽 세 시에 일언 목욕 재계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 신이여! 만일 당신이 계신다면 저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자살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만족을 얻지 못하면 5시 기차가 지나는 철로 위로 머리를 얹고 자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내세에서나 그것을 얻을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계속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다시 평화를 얻길 바라며 30분을 더 기도하였습니다. 새벽 4시 30분, 저는 이전엔 결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불이 났는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것은 어쩌면 신이 저에게 주시는 응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함 빛 속을 바라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영광과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힌두교의 화신이었다면 저는 그 앞에 굴복하여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며칠 전에 제가 모욕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저는 이런 환상이 제 상상력에서는 나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힌두스탄어로 말하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네가 나를 핍박하겠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올바른 길을 알고자 기도하면서 왜 그 길을 취하지 않느냐?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살아 계시며, 이 분이 바로 그 분이심에 틀림없다.' 그래서 저는 그 분 발아래 엎드려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이 놀라운 평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처럼 원하던 기쁨 바로 그것이었으며, 천국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어났을 때 환상은 사라졌지만 그 평화와 기쁨은 지금까지 제게 남아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자거라. 네가 성경을 불태운 것이 바로 엊그제이지 않느냐. 그런데 이제는 또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구나.' 저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오늘부터 저는 그의 제자로서 그를 섬기겠습니다."

박해하던 자가 박해받는 자로

바울의 다메섹 회심사건이 사도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처럼, 썬다 싱의 회심사건은 썬다 싱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썬다는 그 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했다. 썬다 싱의 얼굴을 너무나 기쁨으로 빛났고, 썬다 싱의 말은 너무나 힘이 있었다.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썬다 싱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썬다 싱의 회심은 너무나 뚜렷한 변화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썬다 싱의 이러한 기이한 개종 소식이 주변 일대에 금방 퍼지게 되었다. 썬다 싱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썬다 싱을 돌이켜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매질을 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썬다 싱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썬다 일가는 학교측에 거칠게 항의를 했다. 이 일로 인해서 교장 선생님이 다른 학교를 전임을 가게 되었다. 급기야 마을의 대지주인 썬다 일가의 조직적 박해로 기독교 학교까지 문을 닫게 되었다. 9개월 동안 썬다 씽은 가족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창피 그리고 박해를 당했다. 나중에는 족장이 종족의 명예와 자존심에 호소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썬다 싱을 완전히 의절하고 집에서 추방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독이 든 빵을 주어 떠나게 했다. 아마도 살아서 가족과 종족에 불명예를 끼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썬다 싱은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제가 집에서 쫓겨나던 첫날밤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구주를 만나고 나서, 그 일을 아버지와 형,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제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커다란 불명예가 된다고 생각하여 저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 추운 첫날밤, 저는 나무 아래서 지샜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몸을 피할 곳도 없이 그러한 곳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집에서 호화롭게 살았는데, 이제는 몸을 의탁할 곳도 없고, 따뜻한 옷이나 음식도 없이 여기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게 되었구나' 저는 그 밤을 꼬박 나무아래서 지새야 했으나 제 마음속에 있는 그 놀라운 기쁨과 평화 그리고 구주의 현존을 생각하였습니다. 제 손에는 신약성경이 들려있었습니다. 저는 그 날 밤을 천국에서의 첫날밤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집에서의 호사스럽게 생활하던 때와 그 때를 비교하게끔 하는 그 놀라운 기쁨을 생각했습니다. 사치와 안락 속에서 저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구주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평화로 바뀐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항상 구주의 현존을 느껴왔습니다."

홍포 입은 인두의 사두적 전도자

썬다 싱은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8복을 체험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는 바로 썬다 싱을 위해 예비된 말씀이었다. 썬다 싱은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과 박해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찼다. 아니 그리스도 자신이 썬다 싱의 모든 것이 되었다. 집에서 쫓겨난 후 썬다 싱은 장로교계 학교에서 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의 보호 속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1905년 9월 3일 정확히 만16세 되던 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5년 10월 6일 세례 받은지 33일 되던 날 썬다 싱은 크리스천 사두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년에 걸쳐 인도전역을 전도하러 다녔다. 이후 썬다 싱은 홍포와 담요, 그리고 신약성경 한 권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그의 설교를 듣고 감사를 느끼거나 동정하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지냈다. 아무 것도 얻어먹지 못할 때는 풀뿌리와 나무 잎사귀를 먹고 지냈다. 잠자리를 제공해 주면 받고 제공해주지 않으면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이런 삶의 방식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과 전도방식이었다. 또한 12세기 성프란시스로부터 시작된 탁발수도회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인도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힌두교의 성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사두, 산야시, 파키르라 불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홍포만을 걸치고 다녔다. 이러한 힌두교의 성자적인 배경 속에서 불교도 탄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자들은 인도사회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썬다 싱은 힌두교의 성자 복장과 삶의 방식을 택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인도교회의 새로운 전도자가 탄생했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도가 썬다 싱으로 인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의 인도교회에서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썬다 싱의 영웅적인 티베트 전도

썬다 싱은 19세 때인 1908년 최초의 티베트 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부터 티베트는 썬다 싱의 주요 전도지역이 되었다. 썬다 싱이 티베트를 선교지역으로 택한 것은 아직 티베트에서는 기독교 전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티베트 선교가 인도교회에 맡겨진 선교사명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썬다 싱이 티베트에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티베트 전도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따를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전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지역이고, 순교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썬다 싱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1908년 이후 썬다 싱의 계획은 일년의 절반 이상을 티베트에서 전도하며 보내고 겨울철에는 인도에서 선교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겨울철에는 티베트에서 내리는 엄청난 눈 때문에 순회전도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썬다 싱은 20세 때 1909.12월-1910.7월까지 성공회 소속의 성 요한 신학교에서 8개월 간 신학교육 받은 적이 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말았다. 이미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썬다 싱에게 신학교의 지성적인 면에 치우진 교육은 너무나 맞지 않았다. 썬다 싱은 신앙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짧은 기간동안의 신학교 생활이었지만 썬다 싱의 평생 사역에 도움되는 면도 있었다. 그것은 이 기간동안 성인전과 신비주의문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책을 접한 것이었다. 성 프란시스와 신비주의자들의 삶 등은 썬다 싱이 의도적으로 모방하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신앙체험과 삶의 방식을 설정하는 데 하나의 선례를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썬다 싱은 자신의 사역은 전도사역임을 깨닫고 하나의 교파에 매여 교파내의 교회에서만 설교할 수 있는 관행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듣지 못하는 모든 세상을 자신의 설교단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12년 23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티베트 전도를 했다. 이 두 번째 티베트 전도여행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24세 때인 1913년 봄 3차 티베트 전도여행 때는 최악의 박해를 당하여 시체가 뒹구는 우물 구덩이에 3일 동안 갇혔다가 기적을 통해 구출 받는 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1913년 제4차 티베트 전도여행 때는 감옥 속에서 거머리떼에 2시간 피를 뜯기는 속에서도 전도하기도 했다. 30세 때인 1919년 여름 19살 때부터 시작된 티베트 전도가 10번째 되는 해 그 유명한 눈 속의 동사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5대양 6대주 순회설교와 그의 비밀스러운 최후

썬다 싱은 1920-22년 그의 나이 31-32세 때 유럽을 비롯한 세계나라의 초빙을 받아 순회설교를 했다. 썬다 싱은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삼국, 홀랜드 그리고 미국 호주, 팔레스틴 등 5대양 6대주를 다 돌아보았다. 그리고 35세 때인 1924년 6월 위궤양과 폐결핵으로 3년 간 요양을 한 후 40세 때인 1929년 4월 편지를 남기고 티베트로 간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사람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빙벽들이 있는 그 준령의 협로를 통과하다가 천길 절벽으로 떨어졌는지, 폐결핵과 위궤양으로 고통받던 그가 어느 산길에서 홀로 쓰려져 잠들었는지, 티베트에서 박해를 당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버려졌는지 추측만 무성할 뿐 아무도 정확한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는 사라졌다.

썬다 싱이 남긴 신앙의 발자취

그러나 그가 우리 후배들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은 참으로 많다. 사도바울에 비교되는 그의 특이한 회심을 통해 오늘도 살아 역사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의 뇌리에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었다. 또한 사도적 삶의 양식과 중세의 성 프란시스의 삶의 양식을 닮은 사도적 순회복음전도자로서의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는 강력한 헌신된 제자의 삶을 보여준다. 썬다 싱의 목숨을 건 히말라야의 티베트 선교는 오늘날도 미전도 종족 선교사들의 순교를 각오한 모범이 된다. 썬다 싱은 교회사의 3대 신비주의자로 인정될 정도의 신비체험을 많이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도와 전도의 균형 잡힌 삶은 수도원에 파뭍혀 개인적인 영적 체험만을 추구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과 격을 달리하는 모범적인 신비적 체험소유자라 할 수 있다. 썬다 싱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전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순교를 오히려 자발적으로 짊어지기를 바라며,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며 살았던 그의 삶이다. 그리하여 썬다 싱은 회심이후 자신의 평생을 그리스도와 임재 속에서 살아갔으며, 내적인 평화와 기쁨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서방의 한 기자가 썬다 싱에게 영적인 어두운 침체의 시기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썬다 싱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임재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몇 시간이상 넘어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있었기에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깊이를 가장 최고의 깊이까지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썬다 싱이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였다. 썬다 싱을 20세기 최고의 전도자로 만든 비결이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썬다 싱의 생애|작성자 World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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