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와 성공회의 다른점

천주교와 성공회의 다른점

복음제일교회 0 5,984 2021.01.28 08:43

re: 성공회와가톨릭은어떻게다른가요..?

autovan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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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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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신자입니다. 답변들이 너무 편파적이라 답변을 안할 수가 없네요.

 

보통 성공회를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들어보지는 못하셨을겁니다. 전세계적으로 약 2억5천만명이 성공회신자이며 2천년동안 내려온 정통 교단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회신자가 많지는 않습니다.

(10만~15만추정)

 

가끔 성공회와 카톨릭의 차이점에 대해 답변하시는 분들이 천주교 신자분이나, 개신교(장로,감리,성결등)신자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성공회의 특징을 설명을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잘못된 답들도 많구요. 

 

가장 큰 잘못된 답이 성공회는 헨리8세가 이혼하려고 만들었다라는 대답입니다.

 

성공회는 카톨릭과 유사하지만 카톨릭과는 다릅니다.  아래 글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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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공회의 뜻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 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성공회의 단어적 의미는 "카톨릭"입니다. 아이러니 하죠? 카톨릭을 우리 한국에서 번역하다 보니 "성공회"가 된것입니다.

 

천주교는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면서 하느님을 온 우주의 주인으로 보았고, "천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유래되어 천주교가 되었습니다. 원 명칭은 "로마가톨릭교회 [Roman Catholic Church]"이 맞습니다.

 

보통 카톨릭하면 로마카톨릭교회와 정교회를 함께 부를때 사용합니다.

 

성공회는 "중용"을 신앙의 특징으로 나타냅니다. 흔히 "남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틀렸다라고 단정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한다" 이며, 극한을 버리고 가운데의 길을 걷는다 라고도 합니다. 즉 양극단적인 생각을 포용하여 중도의 길을 간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신앙적 특징으로 성공회는 예전부터 줄곧 "교회 일치운동"을 주장해오고 있으며, 많은 교회와 교파가 동참하고 있습니다.

 

2. 성공회 성직제도

성공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성직3품제(주교, 사제,부제)를 지키고 있습니다.

또 카톨릭과는 달리 여성사제를 인정 하고 있습니다.   

 

 

3. 성공회 신앙의 정통성여부

성공회는 온건한 칼뱅주의로, 세례·성찬례는 성사로 혼인·견진·고해·서품·조병을 예식으로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의 판단은 성서, 이성, 전통 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말씀과, 예수님이 직접세우신 성사의 전통과,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이성으로 신앙을 판단합니다.  신앙고백으로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 을 사용합니다.

( ※니케아신경 [Nicaenum] : 그리스도교회의 신앙의 도리를 재확인하기 위해 4세기 초반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범로마제국 차원에서 결정된 신조 )

 

사도시대에 영국으로 전도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거 영국의 옛교회인 "켈틱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전설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를 보시고 영국으로 가서 전도했다 합니다.

성공회는 초대교회에서 로마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가 분리가 되기전까지의  교리를 기본으로 하고,

영국의 겔틱교회 -> 로마카톨릭과 합쳐짐 -> 영국 국교회로 분리 되기 까지 2천년동안 미사와 성찬례가 끊이지 않고 내려온 정통 교단입니다.

 

또한, 성공회는 교회일치운동을 주장하며, 교회의 단일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4개조항에 합의 한다면 모두 한교회로 인정 하고 있습니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다.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성직에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계급이 있다. 네 개 이상의 교구가 있으면 관구를 형성할 수 있고, 교구는 많은 전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도구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4.사제의 결혼 여부

카톨릭에서는 성직자의 혼인을 금하지만 성공회는 결혼을 허용합니다. 성공회 뿐만 아니라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도 결혼을 허용합니다. 가끔 신부님이 왜 결혼하냐고 하지만, 로마 카톨릭도 초기에는 사제들이 결혼을 하였습니다만, 후에 결혼때문에 교회에 안좋은 문제와 부정부패가 많아지면서 당시 교황께서 결혼을 금지시켰고 그게 오늘날에 이른 것이지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5. 성공회의 역사

성공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을 이어오는 정통교단 입니다.

성공회의 기원을 보자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분이셨던 아리마대 요셉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영국으로 박해를 피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영화인 인디아나존스에서 최후의 성배를 찾는 장소가 영국인 이유입니다. 만약 이런 이유가 없다면 "최후의 성배"라는 영화 배경은 예루살렘이나 로마 카톨릭이 되어야 겠죠.

 

영국의 옛날 교회로서 "켈틱교회"를 말하며,  네이버보다는 다음에서  "켈틱십자가"를 보시면 어떤 십자가인지 알수있습니다. 현재 이 십자가를 천주교에서 일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켈틱교회가 영국의 약 1/2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로마카톨릭이 1/2정도로 비슷했습니다. 비슷한 미사와 성직제도를 유지했기에, 기원후 600년경에 로마카톨릭과 일치를 보고 합치고 나서도 약 9백여년간을 켈틱의 전통을 따른 교회와 로마카톨릭를 따르는 교회로 지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흔히 헨리8세의 이혼으로 분리되었다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헨리8세는 교황으로부터 "카톨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친 로마카톨릭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의 내정간섭과 교회의 횡포, 또 자신의 이혼문제가 겹치면서 영국교회와 로마교회와의 분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글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국의 전통교회와 로마카톨릭은 서로 합쳐졌다가 정치적인 문제로 다시 분리가 된것이지, 처음부터 로마카톨릭이었다가 성공회가 분리되어 나온것이 아닙니다.

 

 

6. 대표적인 교회 분리의 역사

  예수님 부활이후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교회의 일치를 중시했습니다만, 전세계로 전도되는 과정에서 교리상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원로(사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토론하고 교리를 정립하는 회의를 하는데 이를 공의회라고 합니다.

 

제1차공의회를 니케아 공의회(기원후 325년)라 하며 당시 로마에서 열렸고, 이것이 지금의 로마가 카톨릭의 중심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사실 당시의 교통의 최고 요충지는 로마였기 때문에 로마에서 열린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성공회는 이 니케아공의회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공의회 이후 세계각지에서 전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거리상의 차이로, 또 가르침의  차이로 숱한 이단도 많이 나타납니다.

 

중세유럽의 역사에서도 보듯이 교황의 권위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울수도 있는 막강한 자리였습니다. 또한 사제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이 사제들의 부정부패를 보고, 교회를 바로세우고자  결혼을 금지시키게 된것이며, 지금도 로마 카톨릭은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정교회나 성공회는 결혼문제는 사제의 자율에 맡기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분리역사로

1) 초대교회   에서.. 

2) 로마 카톨릭, 정교회로 분리 됨.

3) 로마카톨릭교회와 영국교회가 하나로 합침( 600년경 )

4) 로마카톨릭에서 영국교회가 분리됨 -> 성공회 ( 1530년경 )

5) 로마카톨릭에서 장로교단등이 분리됨(마르틴루터, 칼뱅, 츠빙글리) --> 종교개혁(16~17세기)

6) 성공회에서 감리교단이 분리가됨(요한 웨슬리 신부, 찰스웨슬리 신부) --> 1820년경

 

로마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등)도 정통 교단입니다. 모두 한분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온 가지들이지요.

 

 

다음 자료들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있는 자료들이며, 위 글의 객관적인 자료로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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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사전 ]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요약
영국의 국교회.
구분영국교회
1534년
영국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 독립
종교활동
영국의 성공회 및 세계의 성공회
↑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 덕수궁 옆에 위치한 대한성공회의 서울 대성당건물.
본문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 칭을 사용한다.

영국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59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가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영국에 파견한 이후 로마가톨릭은 영국교회는 물론 정치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으며, 교회법정에서는 국가의 사법권을 대행하였다. 성공회의 개혁은 헨리 8세(1491∼ 1547)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소송으로 시작되었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이 소송을 거절하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 을 발표한 데 이어, 1536년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개혁은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크랜머는 1549년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킨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다. 1553년 여왕 메리 1세(15 53~ 1558)가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했으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즉위 후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하였다. 1559년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하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0년 교황 비오5세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성공회 로마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성공회는 온건한
 칼뱅주의로, 세례·성찬례는 성사로 혼인·견진·고해·서품·조병을 예식으로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다. 신앙의 판단은 성서와 이성, 전통에 의거하며, 다음의 람베드-시카 고 4개 조항을 신앙적 기준으로 삼는다.

① 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②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③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다. ④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성직에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계급이 있다. 네 개 이상의 교구가 있으면 관구를 형성할 수 있고, 교구는 많은 전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도구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성공회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 니아로 확대되었으며, 대표 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관구와 통공(通共)관계에 있 는 모든 교회를 일컫게 되었다. 세계성공회는 중앙헌법이나 연방적 통치의 체제 를 갖지 않으며, 독립관구가 되지 못하여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 하에 있는 소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성공회는,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 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요약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국적독일
종교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 《로마서 강의》(1515∼1516)
↑ 루터 동상 /
본문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벌부(免罰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로마가톨릭교회 [Roman Catholic Church]
요약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본문
↑ 천주교 성경 /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남목성당.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이 명칭은 그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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