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첫번째 주수감사절

청교도의 첫번째 주수감사절

복음제일교회 0 1328

제목: 청교도의 감사(추수감사절)

본문: [출 15:20-출 15:24]

(20)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21)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를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던져 넣으셨다."

(22)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다.

(23)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24)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신다 말이오" 하고 불평하였다.

 

1. 청교도와 신앙의 자유

2. 청교도의 아메리카 정착

3.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

4.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

 

1. 헨리8세의 종교개혁(자료1)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스위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오늘은 추수감사절과 관련하여 우선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하고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독일이나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주최가 루터와 츠빙글리같은 신부였던 반면에 영국은 국가의 왕인 헨리8세가 종교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다른 나라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때 그 원인부터가 특이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연옥, 면죄부), 제도(교황제도, 잘못된 성사)에 반대해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일어난 것인데 영국에서는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라 헨리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본래 헨리8세는 독일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영국에서 루터의 책들을 읽기 못사도록 금하였고, 루터의 사상을 비판하여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찬을 받았던 인물입니다.(자료2)

 

 

그런데 이미 아내가 있던 헨리8세가 왕비 캐서린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지면서 문제가 됩니다. 헨리8세는 케더린과 이혼을 하고 앤 볼린과 새로운 결혼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로마 교황청이 이것을 비판하고 허락하지 않자 1531년 1월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1533년 1월 앤 볼린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1534년 11월 헨리8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영국교회의 유일한 머리임을 선언한 수장령을 통과시킵니다.

다시말해 헨리8세의 종교개혁은 결국 교리나 예배 형식은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교회정치에 있어서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왕으로 바뀐 것 뿐입니다.

 

이후 여성편력이 심했던 헨리8세는 앤 볼린에게 실증을 느끼고 결국 1536년 5월에 그녀에게 음행죄가 있다고 하여 처형을 시키고, 그 후에도 수차례 결혼을 하다가 1547년에 죽었습니다.

헨리8세가 죽자 영국은 종교적으로 헨리8세의 영국국교, 과거 가톨릭, 개신교 세력으로 분열이 됩니다. 헨리8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드워드6세 때는 개신교도였던 외삼촌 소머셀 때문에 개신교가 발전하다가 에드워드6세가 겨우 16세에 죽자 헨리8세의 첫째 부인 케더린의 딸인 메리가 여왕으로 등극하는데 메리는 가톨릭 옹호자이며 개신교에 매우 적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는 메리를 ‘피의 여왕’이라 부르고 있을 정도로 그녀는 개신교를 박해했는데 이때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러다 메리여왕이 죽고 헨리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가 새로 왕이되면서 46년간 영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1세는 수장령, 통일령을 반포하여 영국국교회를 철저하게 확립하는데 지금의 성공회의 시작입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확립한 영국국교회는 헨리8세때보다 더욱 개혁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볼 때는 여전히 가톨릭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고, 예배 양식에 있어서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라 불린 영국의 개신교 세력은 영국국교회의 예배에 참석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회중교회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영국국교에 대한 거부는 곧 국법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기에 이들은 정부로부터 투옥되거나, 추방, 사형을 받는 등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2. 청교도와 신앙의 자유

 

이런 여건에서 청교도들은 결국 영국국교회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던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게됩니다. 이때가 1608년입니다. 하지만 약 12년 후에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교섭을 통해 영국 청교도들을 체포하려했고, 청교도 35명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날 결심하기에 이르모, 1620년 9월 16일 35명의 청교도와, 일획천금을 꿈꾸며 아메리카로 이민 가는 상인 65명,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까지 총101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출항을 합니다.(자료3)

 

 

많은 사람들이 메이플라워호에 청교도들만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메이플라워호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과, 일획천금을 노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청교도들이 함께 세운 나라’입니다.

 

아무튼 메이플라워호로 출항 66일만인 1620년 11월 11일 마침내 101명의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청교도들과 65명의 상인들은 서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내용이 담긴 메이플라워 규약을 세우게 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식민지 개척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치이지만 이것이 청교도와 상인들이 함께 타고온 메이플라워호의 성격이고, 지금 미국이 지향하는 모순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청교도의 아메리카 정착(자료4)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북동부에 있는 프로빈스타운에 정박해 있던 사람들은 12월 21일 프로빈슨타운 맞은 편에 있는 플리머스에 상륙하여 해변가에 정착촌을 건설하지만 부족한 식량과 겨울 옷의 부족으로 새해 2월이 되었을 때는 거의 모든 사람이 폐결핵과 독감에 걸려 101명중 50명이 죽었습니다.(자료5)

 

 

당시 플리머스 지방을 거주하던 본토인들은 마사소잇이 추장으로 있는 왐파노악 족이었는데, 이 원주민들은 자기들 땅을 침범한 이 이방인들을 해하기 보다 오히려 병들고 굶주린 모습을 불쌍히 여겨 식량과 겨울용 침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마 왐파노악 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은 51명 역시 분명히 죽었을 것입니다. 왐파노악 족의 도움을 받으면서 청교도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면 감사를 드렸습니다.

 

고통스러운 1620년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자 청교도들은 농사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때 역시 청교도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주인없는 비옥한 농토’를 보며 다시한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역시 왐파노악 족이 농사를 한번도 지어본적이 없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보리, 밀, 감자, 호박, 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법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자료6)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영국사람이었던 청교도들과 원주민들간에 원활한 소통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원주민들 중에는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잡혀 스페인에 팔렸다가 영국을 거쳐 다시 극적으로 아메리카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추장 마사소잇의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자신들을 노예로 판 서양인들에게 복수하기 보다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청교도들의 정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자료7)

 

 

이후에도 추장 마사소잇은 6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와서 청교도들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청교도들을 계속해서 겨울 위기에서 가을 추수기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지금 도 미국 플리머스 해변가에 가면 마사소잇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그의 고마움을 기리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자료8)

 

 

그리고 마침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을 때 이 영국인들이 플리머스 처음도착했을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풍년이 들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때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는데, 이때 추장 마사소잇은 부하 90명을 거느리고 사슴 5마리와 야생 칠면조 다수와 토산물과 옥수수 튀김 등을 가지고 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때가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고 이때를 공식적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어려웠던 고난과 역경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생사를 헤매던 이들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 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

 

청교도들은 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한 순간부터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준비하시고,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청교도들은 마사소잇과 원주민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추수감사절과 관련된 청교도들의 감사의 내용입니다. 항상 유럽과 미국중심으로 교육을 받았고, 생각해왔던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 그리고 한국교회는 여기까지만 알고 있고,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합니다. 이후 청교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고백했던 이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이제는 이들을 ‘마귀가 보낸 사탄’, ‘영혼이 없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 부르며 천대했던 역사. 자기들이 굶주렸을 때 원주민들이 식량을 가져다 줄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며 하나님과 원주민들에게 감사한다고 했으면서, 자기들이 강성해지자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후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던 역사. 과연 이런 청교도들의 감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을까요?

 

앞서 여러분들에게 청교도들이 처음 아메리카에 와서 농사를 지을 때 ‘주인 없는 비옥한 농토’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곳에 그렇게 넓고 이미 누군가 모두 일궈놓은 비옥한 농토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청교도들이 이 땅에 오기 4년전에 앞서 이 땅에 왔던 영국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그 지방 원주민 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쨌든 항상 나만을 기준으로 나에게 이득이되면 모든게 선하고, 감산한 것인가...한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렇게 은혜로웠던 첫 추수감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인 원주민들은 영혼이 없는 마귀의 앞잡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민의 번영을 위해서는 원주민을 추방하고 우리가 그 땅을 소유하는 행위는 정의로운 일이다”라는 논리와 명분으로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이들은 1637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민촌을 습격하여 500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잡아 서인도로 팔아버린 후 “우리는 오늘 600명의 이교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청교도들의 야만스러운 광경을 바라본 원주민들은 치를 떨며, ”우리들이 믿는 신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가르치는데 당신들이 믿는 신은 왜 남을 죽이고 빼앗으라고만 가르치느냐“고 울부짖으며 남긴 호소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4.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모세의 지도아래 홍해를 건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은혜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축제를 지냈습니다.

 

(20)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21)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를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던져 넣으셨다."

하지만 사흘만에 이스라엘 백성이 돌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22)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다.

(23)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24)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신다 말이오" 하고 불평하였다.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시고, 베풀어 주셨던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사절에 하나님께 어떤 감사의 예배나 기도를 드리기 전에 이 감사가 정당한 것인가, 이 감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감사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주 부끄러워해야 하거나, 용서를 빌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뻔뻔한 잘못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모두다는 아니지만 청교도들이 했던 상당수의 감사는 이런 뻔뻔한 감사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며 원주민들 학살했던 역사를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땅을 확장해 가는 감사의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마치 과거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전쟁승리에 대해 감사예배를 드리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시키고, 3.1운동 이후 한국교회를 그렇게 핍박할 때 조차 일본군대를 위해 감사예배와 전승기원예배를 드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워해야할 문제이지 감사할 내용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초기 청교도들이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사했던 내용들을 금방 망각하고, 전혀 감사할 것이 없는 자들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향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라며 감사했으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들을 이교도라며 학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역시 겨우 사흘전에 홍해를 건넜던 기가막힌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예배를 드렸으면서 어떻게 지금 조금 광야를 헤매고 있다고 바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의 감사에는 진정성이 없었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하나의 쇼맨십 같은 감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면 안됩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적이 올랐다면 그것은 감사하기 보다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불의한 방법으로 성공하고, 부동산 투기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눈물흘림게 함으로써 돈을 벌고, 정당하지 않게 승진을 했다면 그것은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요. 맞습니다. 모두가 하니까 나도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감사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내 불의한 행동의 파트너로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면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관성있게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감사의 내용을 고백하기 전에 이것이 정말로 감사할 내용인지, 용서를 빌어야할 내용인지, 부끄러워해야할 내용인지 먼저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이것이 상식적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성숙한 기독교인의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자신의 ‘감사의 내용’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지고, 일관성있게 감사할 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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