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외교관계

조선시대의 외교관계

복음제일교회 0 1,465 2021.01.28 08:21
한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

한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간에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 유형

    개념용어

정의

정치적으로 국제간에 맺는 일체의 관계.

내용

외교는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한 나라의 대외관계의 처리방법, 혹은 대외정책 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볼 수 있다.

고대의 대외관계

1. 초기의 한중관계

선사시대 한반도의 문화는 주로 북아시아와 관련이 깊었으나 차츰 중국대륙과의 관련이 깊어졌고, 특히 위만(衛滿)과 한무제(漢武帝)의 침입으로 중국과 접촉이 많아지면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여러 민족을 중국인들은 주로 동이(東夷)라고 불렀으며, 중국 선진(先秦)의 문헌에는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어서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고조선의 여러 종족 중에서 예맥(穢貊)은 다른 종족보다 일찍이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중국의 금문(金文)에 맥(貊)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이 맥인들은 중국의 동부에도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의 중국인은 동이를 대하여 다른 이민족에 비하여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孔子)도 ≪논어≫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欲居九夷).”고 하였고, ≪맹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舜)도 동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 이루어진 ≪전국책 戰國策≫·≪관자 管子≫ 등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의 연(燕)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그것을 중국에서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은(殷)나라가 망한(기원전 11세기 말) 뒤에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하여졌다는 기록은 전한(前漢)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 尙書大傳≫과 ≪사기≫에 처음 보이는데,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또 중국의 금문에 ‘기후(箕侯)’와 ‘고죽(孤竹)’의 명문(銘文)이 보이며, 고죽국은 옛날 조선의 지역과 가까워서 이것을 기자조선에 대한 긍정적 자료로 삼으려 하는 견해도 있으나, 여기서도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전한의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4년 위씨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씨조선은 80여 년 계속되다가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한무제는 정복욕이 강하여 자주 북쪽의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남으로 남월(南越)·서남이(西南夷)를 정복하고, 드디어 조선에 침입하여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한의 4군(四郡)을 두었다.

한의 침입군은 실전에서 패하여 그 장군들은 다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는데, 오히려 조선측의 내분으로 위씨조선이 망하였으며, 한무제는 조선의 세력을 경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5명이나 한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하였다.

조선 땅에 설치되었던 4군은 조선의 세력에 굴복하여 설치된 지 20여년 만에 4군 중의 2군은 폐지되고, 현도군(玄菟郡)은 쫓겨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 안에는 겨우 낙랑군만이 그 서북쪽에 남게 되었다.

한반도는 선사시대로부터 만주를 통하여 북아시아의 선사문화를 받아들여서 한반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토기, 그리고 석관묘(石棺墓)는 북방계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벼농사는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석기·청동기의 농구는 중국에서 전하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많다. 철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전국시대에는 한반도에서도 철기, 특히 철제의 농기구가 사용되어 농업생산이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부(富)의 축적은 정치체제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반도의 성읍국가(城邑國家)가 통합되어 연맹체(聯盟體)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 서남쪽에 군치(郡治)를 두고 중국식 행정관리를 임명하였으며, 중국의 상인들이 내왕하여 중국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낙랑의 유적과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중국문화의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낙랑군은 인접한 한(韓)·예(濊)의 지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또 경제적 교류도 있었으나, 주변에 대한 영향력은 큰 것이 아니었다.

낙랑군의 세력은 3세기 중기에는 약화되고, 이보다 앞서서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가 낙랑군의 남쪽에 대방군(帶方郡)을 두었으나 그 규모와 세력이 낙랑군에 미치지 못하고, 2군이 다 4세기 초에 소멸되고 말았다.

2.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대외관계

우리 나라 고대 3국 중에서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자주 중국을 괴롭혔으며,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중국 3국의 위나라(魏, 220∼265)는 한때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한반도에 침입한 일이 있으나 4세기 초에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한의 4군의 여세를 몰아내고, 그 영역은 서쪽으로 만주의 요하(遼河)까지 이르고 중국의 통일국가인 수(隋)나라의 침입을 여러 번 격퇴하여 우리 나라의 대외항쟁의 역사를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오랜 항쟁으로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663년 백제에 이어서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약 7세기에 걸친 이 시기의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문화가 수용되고 중국문화의 핵심인 유교문화, 그리고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여서 후대 우리 나라 문화의 큰 바탕을 이룩하였다.

한편, 우리 나라는 일본의 초기 국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한문화와 불교를 전하여 문화적으로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부여는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서기 49년에 부여왕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부여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으나(111·167),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으며, 122년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였을 때 부여왕은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200년경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공손탁(公孫度)과 혼인관계를 맺고, 244∼245년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에 위나라 군사를 환영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에는 서쪽으로부터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남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서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족의 일파로 처음에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 예맥족이 살고 있던 압록강 중류유역으로 남하하였다.

예군(濊君) 남려(南閭)는 기원전 128년에 인구 28만을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은 이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나, 2년 뒤에 창해군이 폐지된 사실로 미루어보면 중국식으로 과장된 기록이라고 믿어진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마 이 무렵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커져서 나라의 체제가 잡히고 또 왕호(王號)를 쓰게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에 한나라의 국력은 약하여지고 서기 8년 드디어 외척인 왕망(王莽)은 나라를 빼앗아 신(新)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예맥과 흉노들은 계속하여 중국의 변방을 침범하였으므로 왕망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왕망은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로 개칭하고 고구려의 왕을 후(侯)로 격하하였으나 예맥의 침범은 더욱 심하여졌다.

고구려는 1세기 중기에는 한사군의 현도군과 임둔군의 명목상의 지배하에 있던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그 지배하에 넣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여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앞서 함경도 방면에서 서북방 소자하(蘇子河)유역으로 옮겼던 이른바 제2현도군은 106년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에도 현도와 요동의 군사를 격파하고, 121년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고, 또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146년 대방령(帶方令)을 죽였다. 그 뒤 172년에 후한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한 일이 있었으나 격퇴당하였다.

중국은 후한 말에, 밖으로는 고구려·선비·흉노 등의 침입이 잦고, 안으로는 이른바 군웅이 일어나 난세가 되었으며, 요동지방에서는 공손씨가 하나의 독립세력을 이루고 고구려와 싸우고 한(韓)나라와 예(濊)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후한의 뒤를 이은 3국의 하나인 위나라 정시연간(正始年間, 240∼249)에 고구려가 여러 번 위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정시 5년, 즉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 18년(244)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2만 명의 병력으로 현도군치(撫順)를 떠나 비류수(沸流水)에서 고구려군과 싸우고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였으나 왕은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다음해 다시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침략하여 왕은 멀리 옥저로 피난하였으며, 왕기의 군은 옥저에까지 이르렀으나 고구려의 장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분전으로 침입군은 격퇴되었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晋)나라는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펴려고 하였으나 선비·흉노 등 여러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빠졌으며, 고구려도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 서안평을 쳤으며, 313년 낙랑군 또 이듬해 대방군을 몰아내어 옛날의 고조선 땅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망하고 그 일족이 317년 양자강(揚子江) 남쪽에 동진(東晋)을 세운 뒤 북중국에는 5호16국이 난립하고, 이어서 북위(北魏)·북제(北齊)·북주(北周)가 일어나고, 남중국에는 동진의 후예 송(宋)·제(齊)·양(梁)·진(陳)이 흥망하는 남북조시대가 되고, 581년 수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정립하고 있었다.

5호16국의 하나인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前燕)은 342년(고국원왕 12) 고구려의 수도를 약탈하고 고구려왕을 책봉하는 조공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조공제도는 중국이 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특수한 제도로, 외국의 왕을 책봉하고 조공을 받는 매우 의례적인 것으로 19세기에 이르러 근대적인 대외관계를 가질 때까지 인접국가와의 사이에 유지한 중국 특유의 제도인데, 남북조시대에 차츰 제도화되고 있었다.

전연이 망한 뒤 북중국에 세력을 펴고 있던 전진(前秦)과 고구려는 친선관계를 맺었으나, 모용씨가 새로 세운 후연(後燕)과는 다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고국양왕(384∼391)은 대군을 보내 385년 요동성과 현도성을 함락시켰다. 고국양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391∼412)은 후연을 요하의 서쪽으로 몰아내고, 후연은 드디어 고구려 출신의 신하 고운(高雲)에게 나라를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장수왕(413∼491)의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로서,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 처음에는 우호와 적대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5세기 후기에 와서는 평화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장수왕은 한편으로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 송나라의 청에 의하여 군마(軍馬)를 보낸 일도 있고, 북위와 적대하고 있던 흉노의 별종인 유연(柔然)과도 통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에는 중국 북조의 북제·북주와 통교하고, 남조의 양·진과도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는 4세기 후기에 그 세력이 커져서 남조의 동진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고 동남의 바다 건너 구주(九州)에 세워진 왜(倭)의 여러 나라와도 통교하였다.

이 왜의 나라들은 백제의 유망민들이 세운 나라로 추측된다. 백제는 가야와 신라를 치기 위하여 왜의 군대를 이용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으로 397년 왕자(뒤의 腆支王)를 왜에 보내기도 하였다.

같은 무렵, 신라도 왕자를 왜에 보냈다.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한 신궁(神宮)에는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후반에 백제왕이 왜에게 하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믿어지며, 당시의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다.

일본의 문헌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이 보이며, 일본의 학자 중에는 당시 일본세력이 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한 것처럼 꾸미는 사람도 있었으나 근래에는 일본인 학자들도 그것을 부정하며, 당시의 한반도 실정으로 보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중국의 역사 기록인 ≪송서 宋書≫·≪양서 梁書≫ 등에는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차지하고, 백제가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하였다고 하며, 또 우리 나라의 학자들 중에서도 백제가 수군으로 중국 동부의 강소(江蘇)·절강(浙江)지방을 차지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 또는 화북진출설(華北進出說)인데, 이에 대하여 기록의 착오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한반도에서 3국이 서로 각축하고 있을 때 중국도 남북조의 혼란기였는데, 581년 드디어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 무렵 바이칼호 근방의 오르콘하(Orkhon河) 유역에서 일어난 터키족의 돌궐은 유연을 대신하여 북쪽에서 만주와 몽고에 걸친 큰 제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백제는 표면상 수나라와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와 연결하였는데, 고구려도 왜에 사신을 보내 접근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백제와 돌궐·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번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 문제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원정하였으나 큰 타격을 받고 철수하였는데, 생존자는 그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더욱 원정준비에 주력하였다.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의 수리는 이미 문제 때에 시작한 것인데, 양제도 계속 수리하여 남방의 양곡과 군대를 수송하여 원정에 대비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 준비한 결과 612년에 113만여 명의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따로 수군 4만 명을 파견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고 또 30만을 이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평양성의 공격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하기 시작하였는데,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은 이 때의 일이다. 다음해에 수는 요동성을 20여 일에 걸쳐 공격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으나 마침 국내의 반란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때에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郎:국방차관격)이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다음해인 614년 수양제는 제3차 원정군을 보내어 평양성으로 향하였으나, 망명한 병부시랑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다음해에도 양제는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고구려 침입의 실패가 큰 원인이 되어 수나라는 망하게 되고 당나라가 이를 대신하였다.

당나라 고조 때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태종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요동지방에 1,000리에 걸치는 장성을 16년이나 걸려서 쌓기도 하였다.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644년 요동에 침략군을 보내고, 다음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작은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을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굴복시키지 못하고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에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땅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두었고 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로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신라는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검모잠(劍牟岑)을 도와서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내려고 하며,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기도 하였다. 또, 백제 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를 격파하였다.

드디어 고구려가 망한 8년 뒤인 676년에 신라는 당나라 군사를 한강유역에서 몰아내니,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옮겨서 대동강 이남지역을 신라가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여 한반도의 통일이 대체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한중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첫째로 한자(漢字)문화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중간의 교류가 이때부터 이루어졌고, 고구려 초에 편찬된 ≪역사≫는 한문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한자문화의 보급이 일찍부터 널리 행하여졌음에 틀림없다.

삼국은 모두 그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상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그 윤리가 요청되어 고구려에서는 이미 4세기 후반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유학을 교육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사기≫·≪한서 漢書≫ 등의 역사서적, 사전과 문자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다. 백제에서도 중국 한나라와 같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으며, 한편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하여주기도 하였다.

또,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 고유의 명사나 용어를 표기하는 방법도 고안하였다.

한자 및 유교문화와 더불어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불교이다. 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고구려에서 태학이 세워진 것과 같은 해인 372년이며 중국의 전진에서 이때에 불상과 불경이 전하여졌다.

또한 12년 뒤에는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승려가 와서 불교를 전달하였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그보다 늦으며, 처음에는 불교 수용에 반대가 있어서 이차돈(異次頓) 같은 순교자도 나타났으나, 3국에서 다 불교가 성하게 되었다.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된 점도 있으나 호국신앙으로서의 불교의 구실은 매우 크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 있어서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崔致遠)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으며, 고선지(高仙芝)와 같이 무장으로 용명을 날린 사람도 있다.

그가 멀리 파미르고원 서쪽으로 원정하였을 때 그의 부하들이 중국의 제지술(製紙術)을 서방에 전달하여, 서방의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진(秦)·한(漢)의 통일 이후로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는 서서히 제도화하여 갔는데, 조선의 3국과 중국의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4세기 이후에 점차 정비되어 갔다.

중국의 조공제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서 명(明)·청(淸)시대에 이르러 완비되는데, 그 완비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특징의 일부가 중국의 3국에서 남북조를 거쳐서 수·당에 이르는 시기, 즉 우리 나라의 3국과 통일신라의 시기에 나타난다.

고구려는 주로 중국 북조의 여러 나라와, 백제와 신라는 주로 남조의 여러 나라와 조공관계를 가졌으나, 그것은 계속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조공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의 시기가 많았으며, 특히 고구려는 중국과 자주 전쟁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당나라가 개방적이었던 관계로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 즉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 거류민과 그 밖의 인물의 내왕은 신라의 선박에 의하였으며, 일본인의 중국 내왕도 유명한 장보고(張保皐) 부하의 선박에 의하였으니 당시의 중국과 한국 및 일본 사이의 해상권은 신라인이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을 남긴 일본 승려 엔닌(圓仁)도 두 차례 중국을 내왕하는 데 신라인의 배를 이용하였다.

한편,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접촉은 선사시대나 초기 부족국가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와 서부 일본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상의 유물 중에서 특히 지석묘(支石墓)·옹관(甕棺), 그 밖에 도검(刀劍) 등 많은 금석기의 출토로써 고대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고, ‘구니비키(國引)’의 전설을 비롯한 여러 전설로써도 피차의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의 북구주(北九州)와 야마토(大和)지방의 부족장들이 한사군과 접촉한 사실과 일본의 국가기원에 관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등도 두 지역의 내왕·교섭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의 초기 부족국가의 지배층에는 한민족 출신이 많았으며, 그 초기의 집권국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고도의 문화수준에 이른 한민족이었다.

당시 일본은 주로 우리 나라를 통하여 대륙의 발달한 토목기술을 수입하고 개간사업을 일으켰으며, 쇠붙이 농구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달시키고, 쇠붙이를 달구어 온갖 기구를 만드는 법과 조선술·양조법 등을 배워, 한반도의 여러 가지 공장(工匠)들에 의하여 기술상으로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이루었다.

유교문화의 전달에 있어서도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왕인 등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백제의 오경박사가 일본 유학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유교의 정치사상은 당시 일본 집권국가의 정책으로 채용되었고, 뒤에 일본의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정치이론을 마련하게 하였다. 한(漢)문화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와 그 미술·건축도 백제와 고구려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학술과 기술에 관한 전문가와 기술자, 그리고 서적·기구가 동류하여 일본의 정신문화·기술문명의 바탕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일본의 통일국가 형성과 문화발전에 있어서 한민족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한민족의 정치적·문화적 우세는 절대적이었으며, 일방적인 문화전파였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은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압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문화적 선진국으로서의 긍지로 후진국을 선도하였다. 그 뒤 일본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지였던 수나라와 당나라에 직접 조공사신을 보내어 그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우리 나라와의 교섭은 줄었다.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안(平安:지금의 京都)을 중심으로 나타난 정치와 문화의 양상은 마치 당나라의 그것을 축소시켜 놓은 듯이 중국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중국화는 오래 계속되지 않고, 점차로 일본 고유의 것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왜구가 우리 나라의 동남해안에 침구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고려시대의 대외관계

1. 초기 송나라와의 관계

고려가 건국하였을 시기에 중국에서는 오대(五代) 혼란기의 왕조인 후량(後梁)의 시기였으며, 그 뒤 반세기를 거치는 동안 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의 여러 왕조가 흥망하고 난 다음에 송나라가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났으나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전통적인 관계가 계속되었다.

여기서 전통적인 한중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제반문물의 계속적인 접촉과 중국에서 이루어놓은 특수한 대외적 접촉방식, 이른바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한중간의 전통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질이 없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있었다.

대외관계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왕조가 한족의 왕조인가 또는 이민족의 왕조인가 하는 점이다. 오대의 여러 왕조 중의 일부는 이민족의 왕조였으나,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는 기간은 매우 짧아서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송 초의 대외관계는 그 앞의 오랜 한족의 통일왕조였던 당나라의 대외관계와 같은 성격이었다.

이 점은 요(遼)나라나 금(金)나라의 고려와의 관계와 비교하거나, 특히 몽고와 고려와의 관계와 비교하여 보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한중간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개방성 또는 폐쇄성에 대한 문제이다. 당나라는 개방적인 국가이며 이질적 요소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 이질적인 것을 흡수하고 동화시킬 수 있었다.

송 초에는 그러한 개방적인 태도가 계승되었으나 북방의 요·금 등 이민족 국가의 성장으로 그 개방성이 점차 폐쇄성으로 옮겨갔다.

송나라가 북송과 남송을 합하여 3세기 이상 계속하는 동안 북방민족 세력의 영향으로 그 대외관계가 개방성에서 폐쇄성으로 옮겨 갔으며, 송·고려 관계가 질적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려의 송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고려와 오대의 여러 왕조와의 관계를 들어 본다. 고려가 처음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은 923년(태조 6)의 일이며, 복부경(福府卿) 윤질(尹質)이 오대의 첫 왕조인 후량(後梁)에 가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온 일이다.

3년 뒤에는 장빈(張彬)이 다음 왕조인 후당에 사신으로 간 뒤 여러 번 사신내왕이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그 책봉을 받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937년 이후에는 후진(後晋)과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

후한(後漢)을 거쳐 후주(後周)와의 사신내왕도 빈번하였다. 사신이 내왕할 때에는 조공·사여의 형식으로 두 나라의 조정 사이에 물품교환이 있었다. 한편, 두 나라 사이의 물품교환은 조공·사여의 형식을 벗어나 일반적인 교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예로 929년에 후당(後唐)으로 간 장분(張芬) 등 53인의 사행은 향로(香爐)·도검(刀劍)·마필(馬匹)·백저(白紵:흰 모시)·백전(白氈:흰 모포)·두발(頭髮)·인삼·향유(香油)·전도(剪刀:가위)·송자(松子:잣) 등 광범한 종류의 물자를 가져가고, 후당으로부터 역서(曆書)·은기(銀器)·비단 등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중국의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한 일도 있다.

958년에는 후주의 상서원외랑(尙書員外郎) 한언경(韓彦卿)이 비단 수천 필을 가지고 와서 동(銅) 5만 근과 자수정·백수정 각 2,000개를 받아간 일도 있다. 이와 같은 조공관계의 사신내왕과 그에 따르는 물품교환 이외에 두 나라 사이에는 일반적인 접촉과 교류도 자주 있었다.

이미 고려의 태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919년에 중국 남쪽에 있는 오월(吳越)의 백성이 고려로 건너온 일이 있었고, 956년에는 후주 사신의 한 사람인 쌍기(雙冀)가 병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에 남아서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그의 아버지 쌍철(雙哲)도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많은 중국인이 귀화하였다.

대체로 문화적으로 중국이 선진국이어서 유교나 불교의 경전도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으나 때로는 그 반대현상도 나타난다. 즉, 중국에서는 당 말과 오대(吳代)의 혼란기에 많은 서적이 없어져서 959년에는 고려에서 별서효경(別序孝經)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서적을 후주에 보낸 일이 있었다.

또 송나라가 건국한 960년에 오월의 국왕은 천태종의 교권(敎卷)이 없어서 그것을 고려에 구하여, 고려에서는 승려 체관(諦觀)을 보내어 천태종의 논소(論疏) 등을 전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천태종의 고려가 다시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오월의 왕은 이를 구하기 위하여 50종의 보물을 보내왔다고 한다.

고려와 오대의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로 연장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국교를 열게 된 것은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려서 후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2년 뒤인 962년에 고려의 광종이 광평시랑(廣評侍郎)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시작된 일이다.

그 뒤 약 30년 동안 사신이 내왕하며, 형식적인 책봉과 연호의 사용이 행하여지며, 또 공물과 사여의 교환이 있었다. 이 기간에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에 있어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송나라가 고려에 대하여 원병을 청하여 고려가 이에 응하였던 일이다.

송나라가 고려와 국교를 맺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전통관계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으나, 송나라로서는 특수한 이유가 있었다.

후당을 세운 석경당(石敬塘)은 거란의 원조에 대한 대가로 중국 북부의 연운(燕雲) 16주를 거란에 양도하였던 것인데, 송나라 태종은 979년에 이 지역을 회복하려다가 크게 패하였고, 다시 회복할 기회를 엿보면서 고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드디어 986년에 거란의 연소한 황제 성종(聖宗)의 즉위를 이용하여 원정군을 일으켰는데, 이 원정에 앞서서 송나라는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드디어 그 청에 응하였으나 고려군은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고려는 거란의 침구로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1016년에는 그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란의 연호 대신 송의 연호를 다시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이념상으로는 송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거란의 압력에 대항하기 어려워서 2년 후인 1018년에는 다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거란은 이에 응하지 않고 또다시 제3차 고려침입을 감행하여 드디어 고려와 거란과의 국교가 성립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의 공적인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두 나라의 국교단절은 그 뒤 약 50년간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는 993년 거란의 제1차 고려침입 이후 거듭 단속(斷續)되고 드디어 제3차 침입으로 단절되었으나, 공적인 국교가 단절되었다고 하여 모든 접촉과 교섭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송 초에 고려와 국교가 열렸을 때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고, 송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김행성(金行成)·최한(崔罕)·왕림(王琳) 등이 그 예인데, 국교가 끊어진 뒤에도 김성적(金成積)이 송나라의 과거에 등제한 일이 있다. 한편, 중국인이 고려에 귀화하는 일도 자주 있었으며, 특히 남부 중국으로부터의 귀화인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상당한 문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공물·사여 형식의 물자교환도 초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광범하게 행하여졌으며, 1030년 송나라로 간 민부시랑(民部侍郎) 원영(元穎) 등 일행 293인의 사신이 가지고 간 것은 금은동기·도검·안마(鞍馬)·향유·인삼·세포(細布)·유황·청서피(靑鼠皮) 등이었으며, 그들이 다음해 귀국할 때에는 각종 비단·의대(衣帶)·금은기·안마·유교와 불교의 경전·역서(曆書)·의서(醫書) 등 다수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공제도에 따른 물자교역 이외에 일반교역도 매우 활발하였다. 송나라는 무력으로는 약하여 그 점에서는 폐쇄적인 경향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이것이 고려와의 국교를 단절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재정적 수입을 위한 무역의 장려책을 써서 송나라의 상인은 동남아시아의 연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해상무역에 종사한 것은 이례적이다. 송나라의 해상무역의 중심지는 남부 중국의 광주(廣州)·천주(泉州)·명주(明州) 등지였는데, 고려와의 교역에서는 등주(登州)·밀주(密州)가 이용되었다.

고려의 항구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거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예성강(禮成江)이 이용되었다. 예성강의 무역은 매우 성하였던 까닭에 고려의 가요에 <예성강곡>이 있고, 또 문인들의 시에서도 당시의 번영을 읊고 있다. 당시 송나라의 상인들에 끼어서 아랍상인들도 고려에 몇 차례 온 것으로 보아도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이 매우 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2. 중기의 대외관계

거란과의 관계로 고려와 송나라의 공적 국교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된 것은 문종 말년의 일이다. 본래 국교가 단절된 데에는 그 까닭이 있다.

고려가 중국의 문화를 중시하여 송나라와의 통교를 원한 것이 사실이나 거란의 강압적인 태도로 부득이 송나라와 단교할 수밖에 없었고, 또 송나라도 명목상 종주국으로서 고려와 단교할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문약한 송나라로서는 거란의 위력에 눌려 하는 수 없이 고려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와 송이 다시 통교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고려의 문종이 송나라의 문화를 중히 생각하여 친송책을 쓴 것과 시기를 같이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도 또한 연려대료책(聯麗對遼策)을 택하게 되었다는 점과, 거란의 세력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거란은 제3차 고려침입 후에도 1037년에는 그 수군이 압록강변을 침범한 일이 있고, 1042년에는 송나라로부터 받는 세폐(歲幣)를 증액하고 서하(西夏)를 정벌하여 그 세력이 매우 팽창하였으나, 한편 같은 시기에 중국적 국가체제의 도입을 추진하는 혁신파와 국수적인 보수파 사이에 파쟁이 심하여지고, 종실 내부의 권력쟁탈이 겹쳐, 드디어 1063년에는 종실 내부의 반란이 일어나고 다시 황후와 황태자가 피살되는 일이 일어나 국력은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한편, 고려의 문종 때에는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도 표면상 심한 마찰 없이 의례적인 사신내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1063년에는 거란이 고려에 대장경을 보내온 일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문종은 적극적인 친송책을 쓰고 있었다. 그의 정책이 곧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이미 1058년(문종 12)에 표면화된 일이 있었다.

즉, 그는 제주와 영암 등지의 목재를 베어서 큰 배를 만들어 송나라와 교통하려고 하였는데, 신하들은 그 때문에 요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며, 제주의 가난한 백성을 피폐하게 함으로써 어떤 변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또 고려는 문물제도가 흥하고 외국상선의 내왕이 빈번하여 굳이 송나라에 기대할 바가 없다고 반대하여 문종의 의도는 한때 중지되었다.

그런데 송나라 신종은 안으로는 신법(新法)의 실시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며, 밖으로는 거란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려와 제휴하려고 하여 드디어 1068년에 도대제치발운사(都大制置發運使)인 나증(羅拯)에게 명하여 상인 황신을 보내왔다.

문종은 그를 우대하여 귀국시켰는데, 2년 뒤 황신이 같은 목적으로 다시 고려에 오게 되자 문종은 정식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낼 뜻을 전하였다.

이 시기에 송나라에 보낸 예물에는 많은 진귀한 물건들이 있었다. 즉, 어의(御衣)·금대(金帶)·금반잔(金盤盞)·금주자(金注子)·은장장도(銀裝長刀)·안구세마(鞍具細馬)·향유(香油) 220근·송자(松子) 2,200근·인삼 1,000근·포(布) 4,000필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약 50년 동안 끊어졌던 고려와 송나라의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다음해 송나라의 의관(醫官) 왕유(王愉)·서선(徐先) 등이 고려에 왔는데, 이것은 문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뒤에도 송나라의 의관이 자주 고려에 왔다. 다시 국교가 열리게 되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송나라와의 왕래 항로는 예성강 하류에서 중국 산둥의 등주·내주(萊州) 등에 이르는 것이었는데, 이 항로는 북쪽에 치우쳐서 거란이 알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변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073년에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 등을 보내자 송나라에서는 상륙지를 남쪽 절강(浙江)의 명주(뒤에 닝보)로 옮길 것을 청하여 그렇게 정하였다.

그리하여 새 항로는 예성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자연도(紫燕島)·마도(馬島)·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죽도(竹島:전라북도)·흑산도(黑山島) 등 서해안의 여러 섬을 거쳐서 서남으로 향하여 명주에 이르는 것이었다.

문종을 비롯하여 고려의 문신들은 한문화를 깊이 이해하여 사신으로 송나라로 간 인물들은 대부분 문재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의 시와 문장을 엮어서 송나라에서 ≪소화집 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일도 있다.

송나라도 사신을 고려에 보낼 때에는 신중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신종은 국서를 고려에 보내려 할 때에 여러 사신(詞臣)들에게 국서를 짓게 하여 그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택하여 보냈다고 한다.

또, 고려의 문종이 죽었을 때에 송나라 신종은 조위사(弔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선정함에 있어서 그 정사가 추천한 서장 후보는 문장이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에 하명하여 문장을 고시하여 선정한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송나라는 고려와의 통교에 있어서 충분한 예를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내왕하는 사행(使行)과 관련하여 불미로운 일도 있었다. 1078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안도(安燾)는 고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대신 그 대가를 은으로 받고, 그가 받은 많은 선물 또한 은으로 바꾸어 간 일이 있다. 뒤에 송나라의 조정은 그것을 알고 안도를 문책하고 고려에 대하여 사과한 일이 있다.

송나라의 사신에게 주는 물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다. 앞에서 말한 안도 등은 명주에서 건조하여 신주(神舟)라고 명명한 큰 배 두 척에 많은 예물을 싣고 고려에 왔는데, 이들을 맞이하는 고려의 조야는 열광적이었다.

송선이 흑산도에 이른 뒤 예성강에 이르기까지 서해의 여러 항구에서 고려의 관리들이 이를 맞았고 밤에는 산에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배를 안내하였다.

송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이 입경한 뒤의 숙소접대도 융숭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사례품·증여품도 막대하였다. 그들의 사무역(私貿易)을 위하여 특별히 시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사신들의 숙소로 개성에 순천관(順天館)이 있고, 상인들을 위하여 영빈관(迎賓館)·회선관(會仙館) 등 10개의 객관(客館)이 있었다.

송나라와 고려가 교환한 예물의 품종과 수량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는데, 앞에서 말한 안도가 왔을 때는 100종을 넘으며, 건수는 총 6,000건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 품목을 대별하면, 의대·옥(玉)·안마·채단(綵緞)을 비롯하여, 차(茶)·촉(燭)·주(酒)·칠갑(漆匣)·악기·금은기 등이다.

한편, 고려에서 송나라에 보낸 조공품목도 보통 수십 가지에 이르렀다. 공식적인 조공과 예물 등 증여품만이 아니고 공무역(公貿易)도 성하였는데 왕공·귀족, 그리고 관인들은 신변의 장식품·사치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약재와 서적을 수입하였다.

예를 들면, 1079년 사여품의 형식으로 송나라에서 보내온 약재는 침향(沈香)·목향(木香)·철분(鐵粉) 등 100종과 우황(牛黃) 50냥, 용뇌(龍腦) 80냥, 사향(麝香) 50개, 법주(法酒) 10병이었다.

송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이 고려에 들어왔는데, 송판대장경을 비롯하여 ≪문원영화 文苑英華≫·≪책부원귀 冊府元龜≫·≪자치통감 資治通鑑≫·≪태평어람 太平御覽≫·≪신의보구방 神醫補救方≫ 등 송대에 이루어진 방대한 출판물과 유교의 경서, 제자(諸子)의 책, 역사서적·역서(曆書)·음양서·형법서·의약서·불전(佛典) 등이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1086년(선종 3) 송나라에서 귀국할 때에 가져온 불교의 교소(敎疏)는 3,000여 권이었고, 귀국 후에도 계속 불서를 구입하여 그 수가 5,000권에 가까웠다.

이와 같이 고려는 많은 귀중한 서적을 수집하여 중앙의 비서성(秘書省)을 비롯하여 궁궐 안의 각 전각과 국자감, 서경(西京)의 각지에 수장하였다.

고려에 많은 진서(珍書)와 선본(善本)이 있다는 소식은 중국으로 전하여져서, 송나라의 철종(哲宗)은 ≪백편상서 百篇尙書≫를 비롯한 백수십 종의 서적목록을 고려에 보내어 잔권(殘卷)이라도 무방하니 전사(轉寫)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고려에서는 부분적이나마 그 요청에 응하였다.

고려와 북송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송의 민간상인의 내항이다. 기록에 보이는 것만도 북송의 상인이 내항한 것은 100여 회에 이른다.

1회에 내항한 인원수는 수십 명에서 100명에 이르며, 1056년에는 240명이 내항하였으니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산출되는 물자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향료와 약재를 가져와서 무역하였으며, 개성에 1년 이상 체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역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본래 목적이기는 하나, 고려와 송나라의 두 조정 사이의 교류가 어려울 때에는 그 중간역할을 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고려의 사신과 그들을 동행한 상인들이 송나라의 금령을 어기고 중국의 서적과 물품을 구하는 예가 자주 있어서 북송 말기에는 이에 대처하려는 송나라 조정의 논의도 많았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문물의 교류뿐만 아니라 서로 귀화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고려에서 송나라로 귀화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으로는 김행성·강전(康戩) 등이 있고, 송나라의 사신이나 상인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관직에 오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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