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이 자살을 이기는 방법

최진실이 자살을 이기는 방법

복음제일교회 0 1,942 2021.01.28 00:23


최진실이 자살을 이기는 방법

- 교근(턱아구) 운동과 악력(손아귀) 운동이 미치는 정신력의 강화 -

 

 

故 최진실의 죽음은 별난데가 있었다.

그녀의 목매 죽은 죽음은 특히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녀를 국민스타로 일으켜 세운 요인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의 특징과 특히 그녀의 외모의 특징에 연관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공감하는 것 이상 외모적으로도 그 어떤 전통적인 미학적인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최진실의 죽음과 그 장례를 두고 언론들이 '국민장에 가까운'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던 것은 어딘가 최진실의 관상에서 우리 국민들이 겪어온 삶의 고통과 질곡에서 지켜내온 숨어 있는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삶을 살아온 최진실이 단지 어려운 생애를 산 여성상이기 이전에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야무진 미인의 특징적인 모습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볼 수 있다.

 

한 때 토끼 이빨처럼 앞니(대문니)가 큰 여성이 쌕시미의 대명사가 된 적이 있었다.

치아미인의 한 양상이다. 전통적으로 미인은 신체의 세가지 흰색 삼백(三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흰 피부와 흰 눈자위 그리고 흰 치아가 그것들이다.

 

최진실은 키가 작으면서도 특히 치아가 이쁜 미인이었다. 

그녀의 치아는 보기에도 잘 정돈되어 있고 사이즈 면에서도 큰 편에 속한다.

작은 키에 치아가 큰 미인은 강한 이미지를 준다.

 

아담한 키를 가진 여성이 이마가 둥글면서 치아가 크고 밝게 보이면

야무진 이미지를 주게 된다.

 

야무지다고 여겼던 그런 그녀의 요절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애련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1. 요절(夭折)의 종교적 사회 반향

 

故 최진실의 요절을 보면서 쿵후 스타 이소룡과 가수 배호의 요절이 떠오른다.

 

비참하게 죽는 것에는 오절이 있다. 그것이 데빠눌놀얼 즉 '데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눌려 죽고, 놀라 죽고, 얼어 죽는' 죽음을 말한다. 때로는 데어 죽는 것을 목매 죽는 것으로 대치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비명에 죽은 오절(五絶) 가운데 젊은 날에 죽는 요절(夭折)은 더욱 사회적으로 애닲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유명인의 요절은 종교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소룡이 33세에 타살되었다면, 배호는 29살에 병사했다.

불혹의 나이를 제대로 넘기지 못한 최진실이 목매 자살하여 국제적인 뉴스가 된 것은 또 다른 요절의 사회적 반향의 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명망있는 위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사회적 반향은 종교적이기까지 하는 경향이 역사에서 보여왔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죽음을 당한 최영장군이 한국 무속 전통에서 '神'으로 떠받들어진 것은 그의 꿈이 중도에 못다한 한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요절은 한을 남긴다. 동시에 요절은 사회에 오래도록 회자되지만, 결코 아름다운 의미로 남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목매 자살한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서도 터부시되었을 뿐이다.

 

최진실의 자살은 한국사회의 내부를 다시 들여다 보게 하고 있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최진실처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예인들의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남녀 탈랜트들이 '복근운동'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해왔다. 그러나 복근운동만 해가지고는 우울증을 해결하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복근 만들기는 육체미 쌕시미만을 추구한 결과이다. 무언가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한 방법이 교근운동과 악력운동이다.

 

 

2. 교근운동과 악력운동의 정신력

 

연예인들이 복근운동을 하면서 교근운동과 악력운동을 겸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즉 치아의 저작(咀嚼) 운동으로 인한 교근(咬筋, Masseter Muscle)의 발달은 두뇌와 연결되는 강한 의지를 키우게 되며 손의 아귀를 잡는 악력운동은 이웃과 더불어 힘을 강하게 서로 응원하는 정신을 키워준다.

 

'이를 악무는' 교근운동과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악력운동은 정신훈련에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이러한 이빨과 주먹을 이슈로 던지는 것은 한국 사회의 자살문제에 대응책으로서 내놓는 이론이다.  

 

최진실은 살아서도 인기가 대단했으나 그녀는 죽어서 전국민적 그리고 전에 없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을 택한 죽음은 분명 아름다운 행위가 될 수는 없다.

 

충격적인 자살에서 그녀에 대한 국민적 애정은 죽어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녀의 삶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미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진실의 죽음에서 남은 이미지들 중에는 '목매 자살'한 것과 더불어 특히 작은 그녀의 키에 '크고 잘 생긴 치아'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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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의 '자살'을 따라 모방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베르테르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OECD 국가들 중에 최고의 자살률을 가진 한국사회가 자살방지를 위한 사회적인 자성의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자살의 도미노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 속에는 최근 김지하 시인도 눈길을 끈다.

 

 

3. 김지하가 말하는 저작 근육 '격근'은 '교근'의 잘못

 

80년대 군사정권에 저항하면서 분신자살이 많아지자 '젊은이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했던 김지하는 이번 최진실 자살을 비판하면서 요즈음 청소년들의 나약성을 그 신체적 근육운동의 변화에서 찾고자 했다.

 

"우리 민족의 강인함은 (아래 턱을 가리키며) 격근, 음식물을 씹는 근육에서 나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면 라면·국수 같은 유동식(流動食)이나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식품만 먹는다. 격근이 발달할 수가 없고, 인욕(忍辱), 욕됨을 참는 힘이 생길 수가 없다.”(중앙선데이 82호 김지하 시인 인터뷰에서)

 

김지하는 최진실의 자살과는 직접 관련시키지는 않으면서, 씹는 근육운동에서 '유동식' 음식을 많이 먹는 요즈음 아이들이 나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씹는 근육으로서 '격근'이라 표현한 것은 분명 잘못된 오류이다. 그것은 '교근'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씹는 저작운동을 할 때 아래턱뼈와 윗턱뼈가 서로 이를 악물 때 사용되는 근육이 교근(咬筋  Masseter Muscle)이다. 교근은 안면 근육의 하나로서 관골(觀骨:광대뼈)에서 시작해서 상악골(上顎骨 윗턱뼈)과 하악골(下顎骨:아래턱뼈) 사이를 연결하여 서로 당겨지도록 하는 근육이다. 이를 꽉 물면 턱의 귀밑 양쪽에서 교근이 불룩거리는 것이 쉽게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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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는 저작 근육인 교근(Masseter Muscle)의 위치

 

음식을 씹는 작용을 맡은 근육에는 측두근, 교근, 외익상근, 내익상근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교근(咬筋)만 관절운동을 하고 그 밖의 근육들은 얼굴 표정을 관장하는 근육들이다.

 

교근은 씹는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와의 교감활동을 한다. 입을 크게 벌릴 때 상·하악골 사이에 붙어 있는 교근(咬筋)이 길게 늘어난다. 이때 교근 안에 있는 근방추(筋紡錘)가 자극되어 두뇌에 신호가 전달되면 뇌의 작용이 활발해진다. 사람이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면 밥맛이 있고 대화가 활발해지는 이유는 교근의 씹는 작용의 여파에 의한 것이다.  

 

교근(Masseter Muscle)은 치아의 위 아래가 맞물리는 이른바 교합이 부정확하면 성장저하 요인이 되고 두뇌성장에서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 어려움을 이겨야 할 때 '이를 악물고'라는 표현을 쓰는데는 그만큼 정신력과 교근의 악력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주먹으로 손아귀를 강하게 부여잡는 악력 또한 정신을 강하게 한다. 우리가 운동경기에서 응원을 할 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신력과 주먹의 악력 관계의 밀접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먹'과 '이빨'은 원시적인 투쟁의 힘을 상징한다.

 

손에 힘이 없으면 삶의 힘도 잃을 수 있다.

그만큼 이빨의 교근의 힘이 없어도 또한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

 

 

4. 뼈에 사무치는 기억과 치아의 정신력 

 

최근에 이빨이 빠지면 그만큼 기억력이 감퇴된다는 연구가 있었다.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강한 기억을 말할 때 우리 조상들은 '뼈에 사무친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아주 피곤해지면 뼈속까지 숨어 있던 옛날 일들이 떠오르곤 하는 것은 뼈에 잔재해 있던 기억들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뇌와 관계없는 척추가 독립적인 판단으로 반응작용을 하듯이 뼈 그 자체 속에 기억력이 독립적으로 '뼈 속에 사무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신체에서 뼈는 단지 몸을 지탱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닌 정신력과 관련한 독립된 '그릇'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개골이 두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뼈 자체 하나 하나들이 '담고 있는 기억'은 치아 하나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수지침을 다 모아도 한번에 주먹을 모으는 효과를 어떻게 따르겠는가. 작은 뼈마디들을 한꺼번에 모으면 일종의 '브레인 스토밍'이 된다고 할만 한 것이 주먹을 불끈 쥘 때의 '뼈모으기'라 할 수 있겠다. 

 

이빨을 씹는 윗턱과 아랙턱을 강하게 부여잡는 것도 일종의 '불끈 쥐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윗턱뼈와 아래턱뼈를 움켜 잡는 교근운동 또한 뼈의 합력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주먹쥐기와 교근운동은 뇌에 정신력을 강하게 전달하여 두뇌활동이 강해지면서 본능적으로 뼈속의 지혜와 힘까지 욹어낸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빨이 좋으면 주먹을 불끈 잘 쥘 수 있으면 그만큼 삶의 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하겠다. 복근운동보다 정신적으로는 교근운동과 악력운동은 그래서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씹는 저작운동은 교근을 강하게 하여 턱뼈가 강하게 나오도록 한다. 튼튼한 이빨 특히 교근의 발달된 모습은 사자나 호랑이 등의 고양이과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다. 사자나 호랑이는 특히 그 발톱의 강한 악력이 있다. 손의 악력과 이빨에 힘을 가하는 턱뼈의 교근의 힘은 그만큼 강한 본능적 이미지를 준다. 

 

그래서 동물의 상하악근의 이미지를 토대로 사람도 턱뼈가 강한 얼굴은 리더쉽이 있다고 여겼다. 고대 로마에서는 턱뼈가 각지게 나온 이른바 개그우먼 박경림의 턱과 같이 생겼으면 무조건 리더로 뽑기도 했던 적이 있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탈해 신화에서 이빨을 가지고 지도자로 뽑았던 것도 일면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요즈음 "몸매는 S라인 얼굴은 V라인"이라고 할 때 그 V라인은 사실상 턱뼈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스스로 죽지 않고 강한 의지를 키우려면 '이를 악물 턱뼈'와 '불끈 쥘 두 주먹"을 강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복근운동'만 하고자 할 때 탈랜트들은 자신의 위기 대처를 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극한상황에서는 자살을 감행할 수가 있다.

 

 

5. 자살의 대표적인 두 가지 양태: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목매달아 죽는 것

 

전통사회에서 자살하는 방법은 주로 두 가지를 택했다.

하나는 신발을 벗어놓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튀어나온 대들보나 감나무 가지에 목을 매 죽는 것이었다. 지금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2배 이상이라고 하지만, 전통사회에서 자살의 위기는 여성에게 더 많았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은 피동적인 면이 강하지만, 스스로 끈을 매서 목을 매 죽는 것은 대단히 강인한 자해 의지를 가져야 한다. 목매달아 죽는 것은 그만큼 매몰찬 방법이다.

 

여성이 자신의 목을 졸라 매 다는 목매 자살하는 방법은 성적인 결핍을 대리만족시키는 '조이는' 이미지가 있다. 반면에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던져 넣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목매 죽는 것은 현세에 저항하는 의식이 강한 반면에 물에 빠져 죽는 자살은 좀더 다른 세상으로 귀의하는 이미지가 강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물에 빠져 죽는 자살은 수면제를 먹고 죽는 형태로 변해 있다. 반면에 목매 죽는 자살은 농약 등 약물을 마셔 목과 식도에 관련한 내부 기관의 고통을 당하면서 죽는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

 

물에 빠져죽는 것과 수면제를 택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고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반면에 목매 죽거나 약물고통으로 자해행위로 죽는 것은 현실의 삶의 환경에 대한 저항이 강하다. 전자가 정신적 철학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자살방법이 되어 왔다면 후자는 그만큼 육체적으로 보다 불행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택했던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목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주로 불행한 삶 속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다 이겨내지 못해서 자신의 신체에 가학적 행위를 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故 최진실의 죽음이 목매자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그만큼 배우로서 신체적인 번민을 늘상 하면서 살아온 삶이 그 뒤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삶은 현대사회에서 모델로서 배우로서 최상의 인기를 유지해온 정상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시절의 가난과 배우로서 겪은 폭행과 그녀의 삶과 결혼의 파경에서 겪은 구타의 경험의 과정은 특히 남달리 전통사회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신체적 고통을 겪은 것과 인고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일면 일치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전통적인 저항의 방법으로 목을 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은 어쩌면 자살 방법에서 너무나 고전적 전통 방법을 택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전통적 여성의 고통을 이겨보려 여성 독립을 강하게 어필하는 현대적 방법으로 싱글마더(이혼모)의 삶의 가치를 주장한다든지 자신의 어려운 정신적 고뇌의 삶을 다시 일으켜 보려 애썼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최진실은 외모 이상 여성으로서 삶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 성격 배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연예인으로서 특히 이혼모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여타의 연예인들과는 달리 최진실의 성격만이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두 아들의 성(姓)을 자신의 성으로 바꾼 것도 최진실은 그녀의 외모 이상 내면의 성격을 사회적으로 강하게 어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려운 생활을 이겨온 만큼 삶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최근 최진실 자살을 크게 다루면서 "최진실은 매우 보수적이지만 기술적으로는 능숙한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다"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보수적'이라 함은 그녀의 고전미와 고전적 삶의 의미와 통해 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치아이다. 

키가 큰 사람은 손발도 크듯이 치아도 큰 것일까?

최진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신체사이즈와 관련없는 치아 크기의 요인

 

치아는 가난한 사람들이 큰 사이즈를 가지게 될까 아니면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큰 사이즈의 치아를 가지게 될까?

 

치아는 강한 것을 깨물어 먹으면 튼튼해지고 큰 사이즈가 되는 것일까?

이빨 즉 치아의 크기는 무슨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타고나는 것과 후천적인 요인 중 어느 영향이 클까?

 

요즈음 임플란트 기술은 적절하게 큰 치아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치아의 크기는 여러 요건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치아의 사이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치아 크기 연구 논문들에 의하면 치아(crowns)의 크기는 어린 아기 시절에 이미 완성된다.

 

특히 치아의 크기는 신체 사이즈와는 관계없이 독립된 배경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외로 키가 작은 사람들에게서 큰 치아 사이즈를 볼 수 있다.

피그미족(Mbuti Pygmies)은 특히 신체가 작으면서도 큰 이빨 사이즈로 유명하다. 

 

참고 사이트:VARIATION OF TOOTH SIZE AND SHAPE

http://www.uic.edu/classes/osci/osci590/5_2VariationOfToothSizeAndShape.txt.htm

 

동물세계에서는 수컷에 한해 이빨 사이즈는 신체사이즈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빨이 클수록 동물들은 그 신체적 사이즈와 힘의 강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신체 사이즈와 치아 사이즈의 관계성은 아주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로리를 적게 섭취해서 키가 작아진다면 치아의 크기는 오히려 칼로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치아 중에 세번째 어금니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의 치아는 3살 반 정도에서 그 크기가 완성된다. 대나무 사이즈의 크기는 이미 죽순이 솟아 오르면서 거의 결정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사이즈의 치아를 가진 사람들은 오스트랄리아 원주민들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가장 작은 치아는 북부 유럽인들(Lapps)이다.

 

두개골 고고학에 따르면 인간이 최초로 도구를 만들었다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로부터 직립인간인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로 진화하면서 치아 사이즈는 반대로 작어져 왔다. 그러나 작은 치아는 오히려 균열이나 미세 구멍, 주름 등이 적게 나타난다.

 

과학적으로 치아의 지름 크기는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특히 자녀의 치아 크기는 임신모의 건강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천적인 환경 요인으로는 성장하면서 치아를 강한 저작운동으로 튼튼하게 해야 한다. 설탕제품이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도시형 아이들보다 이빨의 씹는 운동을 많이 해야 하는 거친 생 음식을 먹어야 했던 시골 아이들의 이빨이 훨씬 튼튼하게 생긴 것은 물론이다.

 

지구촌 오지를 탐험하는 TV 현장 르포 프로그램에 나오는 원주민들이 유달리 이빨이 크고 길고 튼튼하게 보이는 것은 보다 원시적인 삶의 식생활이 치아 활동에서 튼튼한 이빨 구조를 유지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군밤이나 군고구마가 아닌 생밤을 깨 먹고 생고구마와 소나무 껍질을 이빨로 직접 베어 먹던 아이들의 치아는 분명 튼튼하고 강하며 사이즈가 크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생강냉이, 좁쌀을 씹어먹었던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이나 라면 짜장면을 후루룩 먹는 도시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치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전통사회에서 어려운 삶을 살 때 결혼한 조강지처는 제법 살만하게 되었을 때 옆으로 들이게 된 첩들보다 키는 작지만 이빨이 크고 튼튼했다고 볼 수 있다. '조강지처'라는 말은 지게미와 쌀겨와 같은 거친 음식을 함께 먹던 시절의 아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7. 최진실의 치아와 '수제비'

 

최진실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가난해 매일 수제비만 먹었다'고 했다.

부드러운 수제비만 먹으면 치아를 강하게 씹는 저작운동에 자주 사용하지 않아 치아가 약해야 할텐데 최진실의 치아는 크고도 튼튼하게 보였다. 

 

키는 작지만 튼튼하고 상대적으로 큰 치아를 가졌던 최진실은 타고난 유전적 요인 외에도 후천적으로 그녀의 어린시절 '수제비'를 먹는 것 외에 아마도 치아로 세게 씹어야 되는 거친 음식을 많이 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치아가 크면 일단 건강하게 보이며 웃음을 지을 때 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밝은 이미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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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이라고 말하면 치아라고 쓰는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굳이 한자말인 치아(齒牙)보다 이빨이라고 할 때 우리말의 정통성이 있고 더 친근감이 있다.

 

치아는 일반 이빨과 어금니를 구분하여 치아라고 하지만, 이빨이란 말은 둘 다를 칭한다. '치아'라는 말이 이빨의 종류를 말한다면, '이빨'이라는 말은 드러난 이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빨의 뿌리(이의 발)까지를 말하여 이발 - 이빨이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무엇보다 이빨이라는 말을 사용한데는 이빨의 그 뿌리가 뽑힐 때 가장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이빨'의 이름 속에 그 의미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옛날 어린이들의 흔들리는 이빨을 그 부모들이 뽑아줄 때는 실을 이빨의 뿌리에 감아 매서 잡아 당겨 뽑았다. 그 실 끝은 문고리에 매서 문밖에서 갑자기 문을 당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고, 갑자기 아이의 눈 앞에서 성냥불을 켜서 감짝 놀랄 때 실을 잡아 당겨 어린 아이들의 이빨을 뽑기도 했다. 그만큼 이빨 뽑기가 아팠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이갈이를 할 때면 아이들에게는 여러 개의 이빨을 뽑는 것이 침맞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침은 오히려 한번에 놓기 때문에 현대 의학의 주사보다 덜 아픈 것이었다. 주사는 주사 액체를 다 밀어넣을 때까지 아픈 것처럼 이빨을 뽑는 일은 여러번 시도하여 뽑게 되는 수가 많아 주사맞는 것처럼 오래 아팠다. 뽑고나서도 한참동안 아파서 따뜻하게 데운 간장을 입 안에 머금고 아픔을 참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치아를 뽑는 것은 아프기도 했고 허전한 뒷맛을 남겼다. 최근의 연구처럼 치아에 남은 기억이 잠시 사라졌기 때문일까.

 

 

8. 스타의 목매 자살하는 것은 실 감아 뽑는 사랑니 뽑힌 아픔과 같은 사회병리적 현상

 

독립된 뼈가 심겨져 있는 이빨은 뽑히면 허전하면서도 아픈 것이다.

유명인이 자살하고 나면 사회의 '이빨' 특히 '사랑니' 하나가 뽑혀 사회심리적으로 아픈 기분이 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타임지가 말한대로 스타의 자살로 한국인들이 흔들렸다(South Koreans Are Shaken by a Celebrity Suicide)고 표현한 것은 큰 이빨 하나가 빠진 것과 같은 얼얼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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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최진실의 자살 원인에 대하여 악플의 문제라기보다

    이혼모를 비중있게 캐스팅하지 않은 한국의 TV 방송들의 편협한 의식을 비판했다.

http://www.time.com/time/world/article/0,8599,1847437,00.html

  

특히 최진실의 자살이 목을 맸다는데서 남아 있는 팬들에게는 실을 감아 이빨을 뽑힌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실을 이빨의 뿌리에 감아서 뽑는 것은 살아 있는 이빨을 '교수형'을 시킨 것과 같다고 하겠다.

 

목을 매는 것은 오랜 전통의 사형 방법의 하나이다. 자살이란 자신의 목을 매서 죽이는 스스로를 교수형(絞首刑)에 처하는 것과 같은 짓이 된다. 분명히 어릴 때 이빨을 뽑으면 다시 새 이빨이 나지만, 목을 매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는 못한다. 윤회 환생을 믿더라도 자신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른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최진실은 남모르는 고통이 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 좋은 세상을 살았다. 그녀의 죽음이 전국민은 물론 전세계에 뉴스로 타전될만큼 그녀는 화려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고의 스타로서 죽기 전날도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CF 촬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최진실의 장례에서 웃지못할 표현들이 있었다. "더 좋은 세상에 가서 잘 살기를!"이라는 사람들의 조의 표현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8. 자살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과 自然의 미학적 가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두 유명 연예인이 최근 자살한 것은 종교계에도 크게 충격을 주고 있다. 오히려 종교계에서 생명의 가치를 주장하는 이론이 약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된다.

 

자살은 종교들의 교리들로 보면 어떤 면에서 '장려'되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지만 요즈음 자살률이 높아진 것에는 한국 사회가 기독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

 

자살한 안재환과 최진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위기를 교회 목사들과 상담도 했었다. 기독교에서는 죽으면 천당간다고 한다면 오히려 빨리 죽는 것이 천당에 빨리 가는 것이 된다. 불교에서 죽어 열반에 들거나 보다 나은 윤회 환생을 한다면 죽는 것이 당겨질수록 의미가 있다는 것이 된다.

 

다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한 보완설명을 하더라도 이와같은 근본교리의 강조가 현세상에 대한 가치와 생명경시를 유발시킬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 '믿음 소망 사랑'만 강조하고 '길, 진리, 생명'은 덜 강조되며 특히 기독교 교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 부분은 거의 도외시되고 있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 '생명'이 단지 메시아를 믿어 생기는 '영혼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육신 경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불교가 보다 나은 사후의 세계를 위하여 현세상의 고뇌와 번민을 이겨가는 생노병사의 아픔을 이기며 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인생의 가치를 제시하는 면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다 현세상 자체의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는 것 또한 중요하고 필요하다.

 

죽어 천당을 가는 것 이상 왜 이 세상에서 오래 건강하세 장수하며 살아야 하는지의 당위성에 대한 생명과 현세상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그점에서 유교철학은 사후의 세계보다 현세상을 더욱 강조한 면이 있다. 더불어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가적 지상천국과 영생불멸에서 찾을 수 있다.

 

시인 김지하가 대학시절 자살의 위기를 느꼈을 때 그의 지도교수가 노자의 <도덕경>을 권했던 것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강한 자에 눌린 약한 자를 위로하는 <도덕경>의 경귀 이상 자연이 가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도가사상의 지상 영생(삶)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사상은 자살과 거리가 멀다.

 

반면에 불교나 기독교 모두 타계주의적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사후의 세계에 치중하는 것을 말한다. 꽃은 열매라는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볼 수 없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순간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다. 다음 세상이 열매라 하더라도 현 세상이 꽃이라는 의미는 희랍철학의 쾌락주의 이상 정의와 생의 가치가 현재에 존재한다는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다. 

 

지나친 사후세계에 대한 강조는 중세 지배자들이 압박받는 사람들에게 다음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정치프로파겐다의 영향이 있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해도 다음 세상에 기회가 있다는 것으로 회유하면서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속 강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종교제국주의적 지배 이디올로기는 현세보다 사후세계에 대한 강조를 지나치게 강화시킨 것이다.

 

메시아가 '부활' 했다는 것도 이 세상으로 다시 살아나온 것을 의미하는데도 '승천'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것이다. 종교인들의 자살은 비종교인들의 자살율보다 결코 낮지 않다. 사후 세계의 강조는 그만큼 현세상의 가치를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수 종교인들에게서 어려운 고난에서 자살을 택하는 수가 있다.

 

종교라고 하면 사후 세계가 너무 강조되어 현세의 인간 생(生)의 위대함보다 죽음 뒤의 영혼의 삶에 더 무게를 두는 이상주의에 지나치게 몰두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의 중요성과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 특히 자연과 더불어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종교지도자들이 보다 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메시아가 이 세상에 다시 온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가는 것보다 이 세상으로 다시 그가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현세주의의 의미가 강하다. 메시아 강림은 '새하늘 새 땅'을 만드는 지상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신천지의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다.

自然이라 함은 '있든 그대로 둠' 또는 '있는 그대로 지속'의 뜻을 가진다. 

자연은 세상을 현세상의 아름다움과 함께 파악하는 무위(無爲)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故 최진실이 '납골당이 아닌 산에다 뿌려달라'고 말한 것은 이 세상의 자연에 대한 미련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버리지 못한 마지막 그녀의 삶의 의미를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부더 산소들이 산에 있는 이유는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신선의식과 자연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불의 탄생은 현세상에 미륵이 나타나는 현세주의를 바탕한다.

'미륵'이라는 말은 그 음운은 물론, 역사적 의미에서나 교리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메시아'라는 말과 그 사상이 연결되어 있다. 불교가 풍수적 의미를 가지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사찰을 두는 이유 또한 신선도가적 전통과 이어져 있는 이 세상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신본주의를 강조하는 나머지 인본주의의 현세적 삶의 가치를 약과 평가해온 오류는 이미 그들의 역사에서 르네상스를 통하여 비판을 거친 셈이다. 그러나 서양문화를 접한 역사가 짧은 비서양 기독교 국가들에서 아직도 고전적 타계주의를 고집한 현세 혐오주의는 생명 경외심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을 나는 중세 기독교 암흑시대를 빗대어 '변방 기독교 암흑시대'라고 칭한다. 

 

자연은 자살하지 않는다. 자연을 '제2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연주의가 가지는 그 현세적 심미학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물들은 스러질 때까지 열심히 스스로를 위하여 생의 운동을 끈질기게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포가 자살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사실은 사람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 사실은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로 세포가 죽을 뿐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한국사회는 도가적인 자연사랑 현세사랑의 철학이 강하지 못하고 저 세상을 찬송하는 종교들이 유행해왔다 는, 아니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 현향된 가르침을 강조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지적해야 한다. 종교는 토착화 현지화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현세화' 즉 기독교 신학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의 중요성이 보다 강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9. 모델은 신체적 정신적 양면의 '롤 모델'이 되어야

 

연예인들이 흔히 '공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탈랜트로서 모델이 되는 것을 온통 외모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사회적 롤 모델을 경시하는 수가 많다. 그것은 그만큼 내며내적으로 평소에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를 위한 자신의 도량을 잘 키워 가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능력이 있거나 유명해져서 사회적 모델이 되었을 때 항상 그 자리에서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보통 사람의 삶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겸허한 인생의 가치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소기업 비지니스맨보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자살율이 높은 것은 그러한 기본적인 낮은 인생의 삶을 기본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무리 낮은 보통 서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도 이웃이 있다. 그것은 노숙자라 해도 사회적 이웃을 가질 수 있다. 최진실로 말하자면 탑 연예인으로서 자신의 위상추락을 걱정한 것은 항상 개인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갈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목숨 또한 그런 면에서 사회적 공유의 목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것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최진실은 분명 그녀의 많은 친구들은 물론 그녀의 수많은 팬들이 애달퍼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자살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한 부분적 삶이기도 하다.

 

순간적인 충동자살을 했다고 하더라도 순간이나마 이 세상을 버린다는 생각을 평소에 가졌기 때문에 그러한 순간 오판을 하게 된다. 술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잠재의식을 강하게 가졌다면 비뚤어진 오판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사람은 생활 속에서 그 자신의 개인의 삶을 위한 것과 더불어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과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짐승과 구별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이 죽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버리는 것과 같은 '타살' 행위가 되는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삶이 불편하더라도 스러져 죽을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자신을 죽이는 힘이 남아 있는 만큼의 삶의 의미가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최진실은 그녀의 두 아들을 정말 사랑했다면, 그녀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생명의 소유가 그녀의 두 아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잊지 말아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그렇게 자살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개인 '소행'인 것이다. 

 

더불어 국민 배우로서 나라와 사회에 미치는 자신의 영향은 물론 사회의 많은 동료 친구들의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개인 판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혼자서 버리는 자살 행위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팬들과 이 사회에 문화예술적인 면에 공헌하는 기여도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자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유명인이거나 사회 지도자일 경우 자신의 목숨에 대한 책임 또한 사회적으로 더욱 큰 것이다. 모델은 복근이나 S라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사회적인 '롤 모델'의 역할을 전제할 때만이 진정한 모델인 것이다.

 

인류문화는 아름다운 인간세의 역사의 연속을 전제한다.

다음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세상의 인류에게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남기는 것이 문화예술의 힘이다.

 

삶이란 고난과 화려함의 경계를 떠난 치열한 현재적 삶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새벽 시장통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 사는 맛'을 자주 말하는 것은 고생여부를 넘어 그러한 치열한 현재적 삶의 가치가 숭고하기 때문이다. 

 

현재적 삶의 가치를 추구할 때 특히 중요한 것은 정신적 건강이다.

대중매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열심히 몸의 건강을 챙기는 '건강 강의'는 흔하다. 그러나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비타민'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 세상의 고난도 숭고하고 고생도 아름다운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를 가르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무슨 훈장이나 되는듯이 자랑하면서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는 식의 발언을 너무 쉽게 하는 것 또한 문제다. 자살 방지를 강조하면서 김지하는 자신 스스로도 '자살을 세번이나 기도했었다'고 말하는 모순을 드러내 보인 것은 무언가 잘못된 관행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시도는 훈장이 아니다.

 

이명박씨가 대통령 후보로서 서민층을 이해시킨다는 의도로 자신 스스로 어려운 시절 한강변까지 가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말한 것 또한 사회적으로 책임없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지도자나 유명인 및 권력자의 사회적 발언은 비판되어져야 할 일이지 두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살을 기도한 것은 자랑거리도 경력도 아니며 지탄받아야 할 낙오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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