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복음제일교회 0 999 2020.12.25 02:08

1. 요한복음

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비교
요한복음은 특이한 복음서이다. 초대교회는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비교했다. 공관복음을 모두 땅에 거주하는 사자 (마태)와 사람 (마가)과 황소 (누가)로 비교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을 유독히 하늘날며 비상하는 독수리에 비교한 까닭은 그만큼 요한복음이 초월적이며,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공관복음도 막상 서로 자세히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면들이 있다.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하여 아주 쉬운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어는 대체적으로 단문으로 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인 쉬운 단어들을 사용한다. 시제도 대단히 쉽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요한복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자주 신학적인 사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락의 길이이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길게 다룬다. 공관복음은 수난과 부활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개별적인 활동과 개별적인 말씀을 다소 헐겁게 연결하는 결합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이 다룸으로써 주제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마치 단막극처럼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이 작은 점으로 꾸민 그림과 같다면, 요한복음은 큰 면으로 처리한 그림과 같다. 공관복음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짧게 보고하는 일간지로 비유할 수 있고,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이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말을 만연체로 늘어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각 진술마다 압축된 사상을 담고 있다. 마치 압축화일처럼. 만일에 우리가 이것을 모두 풀어낼 수 있다면 엄청난 양의 내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곱 개의 표적들이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는 대략 29개의 이적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요한복음은 단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신하의 아들 치료 요 4:46-54; 오병이어 요 6:1-13; 바다 위를 걸으심 요 6:16-21).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없는 다섯 가지의 이적들을 보고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적 요 2:1-11;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 요 5:1-9; 소경의 치료 요 9:1-7; 나사로의 살리심 요 11:1-44; 이적적인 어획 요 21:1-14). 둘째로 일곱 개의 담화들이 나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3:1-21),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4:7-26), 38년된 병자를 치료한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5:19-47), 오병이어 표적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6:25-65), 초막절 논쟁 (7:1-38), 목자설교 (10:1-18), 고별설교 (14-16장).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요한복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선한 목자 (요 10:1-18)와 포도나무 (요 15:1-6)라는 테마는 공관복음에서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셋째로 일곱 개의 "나는... 이다" 말씀이 나온다. 생명의 떡 (6:35),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7,9), 선한 목자 (10:11), 부활/생명 (11:25), 포도나무 (15:1), 길/진리/생명 (14:6).

3) 요한복음의 구조
요한복음은 세 번에 걸친 유월절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입부 (1:1-2:12)
첫번째 유월절 (2:13-5:47)
두번째 유월절 (6:1-11:54)
세번째 유월절 (11:55-19:42)
예수의 부활 (20:1-21:23)
결론 (21:24-25)

4) 요한복음의 신학
요한복음은 이중적인 결론을 가지고 있는데 둘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 20:30-31; 요 21:25). 따라서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지향한다.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시는 로고스이시다 (요 1:1-2).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행한다 (요 5:30). 둘째로 예수는 사람을 만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세례자 요한 1장, 가나 혼인 잔치 2장, 니고데모와의 만남 3장,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 4장, 38년 된 병자 5장, 오천명의 무리 6장, 초막절 7장, 간음한 여인 8장, 소경 9장 등등). 예수는 사람들의 빛이다 (요 1:4). 그래서 예수는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분이시다 (요 13장).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한다 (요 21:15-17). 사람들은 바로 이 예수를 신앙해야 한다 (요 20:30-31). 특히 요한복음의 기독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로고스 (말씀) (요 1:1-18)
사도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는 특이한 용어로 설명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 성격 중에 가장 먼저 설명되는 것은 그분의 존재이다 (요 1:1-2). 그분이 "계신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 두절(1절과 2절)에서 "말씀이 계신다"을 네 번 사용한다. 말씀이 어떻게 계시는가? 시간적으로 볼 때 그분은 태초에 계셨고 (시간적 존재방식), 공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공간적 존재방식), 성품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셨다 (인격적 존재방식).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존재 (계심)하실 뿐 만 아니라 활동하는 분임을 설명한다 (요 1:3-5).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3). 또한 만물이 타락한 후에 로고스는 그것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 (4-5). 이 회복을 위하여 로고스는 성육신하셨다 (요 1:14-18). 로고스는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육신이 되었고, 사람들가운데 거하셨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충만하게 넘친다 (16-17). 그리스도의 충만은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18).

(2) 하나님
로고스와 연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진술한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로고스의 신분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진술된다 (요 1:1).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점에서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신분은 자연히 결론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로 두 인격이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자는 로고스 밖에는 없다 (요 1:18).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기독론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로고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 1:14). 이 때문에 로고스는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당신과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요 17:5).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 (10:30,38), 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능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한다" (요 5:17).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으로부터 예수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요일 5:20).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과 구별된다.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이라는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요 1:18).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묘사되고, 로고스는 "독생하신 자"로 묘사된다. 인격은 둘이며, 성격은 아버지와 나신 자 (아들)이다.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이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 10:30)라는 명제적인 선언이 가능하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아버지 안에 있다 (요 10:38; 17:21).

(3) 인자
요한복음에는 인자라는 표현이 13번 나온다 (요 1:51 3:13; 3:14; 5:27; 6:27,53,62; 8:28; 9:35; 12:23,34 (2번); 13:31). 이 명칭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중재성: 요한복음에서 인자의 특징은 인자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심점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1).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밀접하게 연결된 예수의 참 모습에 관한 주요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둘째로 선재성: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묘사된다 (요 3:13). 인자는 땅에 존재하기 전에 하늘에 존재하던 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자의 존재에 관한 공간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선재적인 시간과 공간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 (요 6:62).
셋째로 비하성: 인자는 본래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세상에 오신다. 그래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다 (요 3:13). 인자는 분명하게 혈육을 가진다.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요 6:53). 인자는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는 분이다 (요 6:27). 이것은 아버지의 확인가운데 이루어진다 (요 6:27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인치셨다").
넷째로 수난성: 인자의 비하는 그의 죽음에서 잘 나타난다. 인자는 들리게 될 것이다 (요 8:28; 12:34). "들리다"는 영광을 나타내는 말보다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요 12:33 참조. 땅에서 들림은 죽음의 방식을 의미함).
다섯째로 승귀성: 비하하여 수난당하는 인자는 결국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간다" (요 6:62). 이것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요 12:23; 13:31).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세상에 와서 수난당하고 승귀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와는 달리 인자가 미래의 영광중에 오실 분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물론 인자의 심판권세대하여는 언급된다 (요 5:27). 전능한 성격 (하늘과 관련)과 구속적 성격 (십자가 죽음)가 드러난다 (3:13,14)

(4) 사랑의 주님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의 주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요 13:34). 이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하되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는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살펴보자 (요 13:4-5).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요 13:1) 사랑하셨다는 것을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동작 하나 하나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술된다. 예수께서는 만찬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겉옷을 벗는다. 수건을 취한다. 수건을 허리에 두른다. 대야에 물을 담는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는다. 마치 영화를 느린 속도로 보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예수의 동작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예수께서 한 동작 한 동작에 얼마나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의 동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예수의 움직임은 사랑의 움직임이다. 예수의 각 동작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예수의 손놀림, 예수의 허리를 굽히심, 예수의 눈동자의 움직임은 제자들에 대한 끝까지 사랑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제자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는 자신의 모든 동작을 바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 예수는 사랑하심에 있어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2. 요한서신

사도 요한은 세 편지를 기록하였다. 세 편지는 길이에 따라서 성경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가장 긴 편지가 앞에 위치하고, 가장 짧은 편지가 뒤에 위치한다.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신들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단과 싸우는데 주력한다.

1) 요한일서

(1) 요한일서의 구조

0. 도입 (1:1-4)
1. 하나님과 교제 (1:5-2:17)
2. 적그리스도 (2:18-29)
3. 소망자의 삶 (3:1-24)
4. 영분별 (4:1-6)
5.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관계 (4:7-5:4)
6. 신앙의 증거 (5:5-12)
7. 결론적 권면 (5:13-21)

(2) 요한일서의 내용
요한일서는 특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과 싸운다 (요일 4:1-3). 요한일서에는 "우리"와 "그들"의 기독론적인 대립이 요점이다. 여기에 요한일서의 분립와 관련된 갈등구조가 설명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에 대하여는 먼저 2:18-20에 나온다. 첫째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분립하였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다" (2:19). 이것은 출교가 아니라 탈교를 의미한다. 반대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출교는 시행되지 않았다. 남은 자가 있고 나간 자가 있다. 둘째로 "그들"은 다수를 이루었다. "많은 적그리스도" (2:18; 4:1).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한 그룹이 아니었다. 요일서의 공동체는 "그들"에게 위협을 받을 정도로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외부적으로 진출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비기독교적인 주변세계)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4:5). 셋째로 "그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린다 (2:18). 적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우선 기독론적인 문제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2:22). 이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의 정체가 유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다 (참조. 요 7:25-27; 9:22; 10:24,36). 특히 이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 (4:2). 이들이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가능성이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자들을 거절하였다.

2) 요한이서

(1) 요한이서의 분해

0. 도입 (1-3)
1. 형제사랑 (4-6)
2. 이단경계 (7-11)
3. 결론 (12-13)

(2) 요한이서의 내용
요한이서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한다. 요한이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믿는다 (육체재림설). 이것은 이단을 분별하는 중요한 요점이다. 발신자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혹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7). 이들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다 (7). 이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로 이것은 기독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관계가 있다 (요일 4:2). 둘째로 이것은 종말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재림을 다룬다 (현재분사에 주의하라).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다르다.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한다 (요일 4:2). 셋째로 이것은 신앙고백에서 문제가 된다. "고백하지 않는 자들". 미혹자는 초대교회의 공동적인 신앙고백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이런 이단에 대하여 엄격하고 냉정하게 거절할 것을 권면하였다 (10-11).

3) 요한삼서

(1) 요한삼서의 분해

0. 첫말(1)
1. 첫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2-4): 가이오를 칭찬
2. 둘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5-10): 디오드레베를 반대
3. 셋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11-12): 데메드리오를 추천
4. 끝말(13-15)

(2) 요한삼서의 내용
장로가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는 선교론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장로는 선교지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장로의 선교정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로 선교대상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이방인선교이다 (7). 둘째로 선교주체자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헌신선교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7). 개인보다 예수가 앞선다는 강조이다. 셋째로 선교방식과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방랑선교제이며 (나그네 5, 나간다 7). 교회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보고중심제이다 (교회앞에서 증거 6). 선교자와 피선교자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또한 이것은 무보수제이다 (아무것도 받지 아니 함 7). 선교자가 자비량으로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장로의 선교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디오드레베가 선교지향적이 아닌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장로가 행하는 선교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디오드레베는 많은 말로 (여러 면에서) 장로를 비판하였다 (10). 따라서 디오드레베는 방랑선교자들을 접대하지 않았고 (형제들을 대접하지 않았고 10), 접대하려는 자들을 엄금하고 추방하였다 (10). 사도 요한은 이런 분파주의자를 거절한다. 사도 요한은 이방인선교를 방해하는 것은 악한 행위로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 (11).

3. 요한계시록

사도 요한의 신학은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밝히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반드시 속히 될 일과 관련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말하다가 체포를 당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에 이 계시를 받았다. 예수의 계시는 일곱 교회 (1-3장) - 일곱 인 (4-7장) - 일곱 나팔 (8-14장) - 일곱 대접 (15-20장)의 도식을 가진 종말론으로 구성된다.

1) 예수의 명칭
요한계시록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은 기독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11:15-19; 12:10-12; 20:4-6 두 번), 어린양 (29번 사용), 하나님의 아들 (12:18), 알파와 오메가 (21:6; 22:13), 하나님의 말씀 (19:13)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과 승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를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가운데 먼저 나신 자, 땅의 왕들의 머리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1:5).

2) 예수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1)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 (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진다 (1:13). 그의 외모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설명된다 (1:13-16).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는 권위를 (13),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과 눈같음은 성결을 (14), 눈이 불꽃같음은 통찰을 (14). 발은 풀무에 단련된 주석같음은 능력을 (15), 음성은 많은 물소리같음은 세계통치를 (15),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은 교회통치를 (16),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말씀의 권세를 (16), 얼굴이 해처럼 비치는 것은 생명수여자를 상징한다 (16).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자증하신다 (1:17-18).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 (17), 산 자이시며 (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열쇠지니어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 (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다시 한번 각각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흰 옷 입으라)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가진 이
라오디게아 - 창조의 시작

(2) 우주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에서 우주는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와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전면에는 일곱 영이 있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이 중심이다. 이것을 중심하여 네 생물, 24장로, 144천의 유다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 천사들, 만물이 배치된다.
예수는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5:1-14). 어린 양이신 예수가 보좌와 네 생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 (5:5),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한다. 찬양이 드려진다. 네 생물과 24 장로가 노래하고 (5:9-12), 많은 천사들이 노래하고 (5:12), 만물이 노래한다 (5:13). 이 노래들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따라 우주를 다스릴 권세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 (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을 거두신다.

(3)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는 전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음녀 바벨론 (14:8; 16:19; 17:5; 18:10)을 비롯하여 세 가지 지원세력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16:13)와 싸우신다. 이들이 하르마겟돈에 집결한다 (16:16). 하르마겟돈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 900승을 가진 강한 병력이기에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인데 바락과 드보라가 이겼다 (삿 5:19).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 큰 세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여도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19:19-20:10).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 (16:14)이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유배를 당하는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이었다. 고난이 신앙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록 그의 육신은 밧모라는 지중해의 먼지처럼 작은 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영안은 하늘보다도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는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를 기대하였다. 사도 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하여 세상나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로부터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현재를 이해하는 삶이었다.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렬하게 소망하였던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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